원어 항목명 | Ли Доннё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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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東寧 |
영문 | Lee Dongnyeong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69년 10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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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06년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11월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2월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4월 10일 |
활동 시기/일시 | 1939년 |
몰년 시기/일시 | 1940년 3월 13일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출생지 | 대한민국 충청남도 천안시 |
활동지 | 중국 상해 |
묘소 |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용산구 효창동 |
원어 항목명 | Ли Доннён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
일제 강점기 중국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이동녕은 1869년 충청남도 천원[현 천안시]에서 태어났다. 1892년 응제진사시(應製進士試)에 합격하였고, 1896년 독립협회에 가담해 구국 운동을 전개하였다. 1897년 독립협회 주최로 서울 종로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가 열렸을 때 잘못된 정치를 탄핵하고 상소하여 이준(李儁)·이승만(李承晩)과 함께 옥고를 치렀다. 1898년 7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뒤 『제국신문(帝國新聞)』 논설위원으로 개화 논설 수십 편을 집필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동지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덕수궁 대한문(大漢門)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면서 조약의 무효와 파기를 외치다가 일본 헌병에 잡혀 2개월 간 고문을 받았다.
이동녕은 1906년 중국 만주 북간도의 용정촌으로 망명하여 이상설(李相卨)·여준(呂準) 등과 함께 서전의숙(瑞甸義塾)을 설립했다. 1907년 귀국하여 안창호·전덕기·양기탁·이동휘·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 등 동지들을 모아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안창호·이회영과 협력하고 전국에 교육단을 조직하여 공립협회 조직과 『대한매일신보』 발행을 지원하였다. 1910년 중국 요녕성(遼寧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망명하여 한인 자치 기관인 경학사(耕學社)를 설립에 참여하였고, 신흥무관학교 초대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이동녕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해 나철(羅喆)이 창시한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고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러시아의 시베리아 총독 보스타빈이 약속한 한국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가 발각되어 3개월간 수감 생활을 하기도 했으며, 1915년 이상설·이동휘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고 『대동신문』과 『해조신문』을 발행하였다. 1917년 니콜라예프스크에서 대종교 포교 활동에 참여하였고, 1918년 11월에는 길림성에서 대종교 김교헌(金敎獻) 외에 조소앙(趙素昻)·조완구(趙琬九)·김좌진(金佐鎭)·여준 등과 독립선언서를 선포하였다.
이동녕은 1919년 2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하이로 건너가 정부 조직을 모색하였다. 3·1 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조직하고 4월 10일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헌법이 대통령 중심제로 바뀌자 내무총장이 되었고, 193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이동녕은 1940년 3월 13일 중국 사천성(四川省)에서 사망하였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이동녕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