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석

한자 柳麟錫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2년 1월 27일
활동 시기/일시 1895년
활동 시기/일시 1908년
활동 시기/일시 1910년 6월
활동 시기/일시 1911년
몰년 시기/일시 1915년 1월 29일
추모 시기/일시 1962년
출생지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군 남면 가정리
거주|이주지 중국 서간도 회인현
거주|이주지 중국 서간도 통화현
거주|이주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도
거주|이주지 러시아 연해주
활동지 러시아 연해주
묘소 대한민국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십삼도의군 총재
정의

개항기 의병 대장으로서 러시아 연해주에 망명하여 십삼도의군 총재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유인석(柳麟錫)[1842~1915]은 구한말 연해주로 망명한 국내 의병 가운데 가장 상징적 인물이다. 14세 때 화서 이항로의 제자가 되었으며 이항로 사후에 중암 김평묵과 유중교를 스승으로 삼아 화서학파 최후의 학자이자 실천가가 되었다. 1876년 조일수호조규 체결 시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으며, 1894년 갑오개혁 후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성립되자 1895년 을미의병을 일으켰으나 패한 후 만주로 망명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연해주로 이동하여 의병 항쟁을 하였다. 국권 피탈 뒤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1915년 서간도 봉천성 관전현에서 병사하였다.

가계

아버지는 유중곤이다.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이다.

활동 사항

1896년(고종 33) 5월, 유인석의 의병대는 장기렴의 관군과 맞서 싸웠다. 그러나 일본의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대대적인 공세를 펼친 관군을 상대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이 전투에서 패한 제천 의병은 크게 위축되었다. 장기렴에게 패하여 제천에서 밀려나 단양으로 후퇴한 유인석은 남은 의병들을 수습해 재기를 다짐하였다. 그러나 강원도를 거쳐 평안도로 쫓기듯 북상한 후에도 좀처럼 기회를 잡지 못하였다. 재기를 꾀하여 압록강을 도강(渡江)함에 앞서 1896년 7월 초산 아이성(楚山 阿夷城)에서 「재격백관(再檄百官)」이라는 장문의 격문(檄文)을 지어 천하에 발표하였다. 7월 20일 압록강을 건넌 의병진은 중국 관헌에게 이범직(李範稷)과 부하 장졸이 피살당하고 무기도 빼앗겼다. 의암이 요동으로 간 것은 청병(請兵)하고자 한 것인데 오히려 부하 219명의 의병과 함께 무장 해제를 당하였고, 219명의 의병은 본국으로 되돌려졌다. 그 후 1897년 5월 회인현 호려두(胡蘆頭)에 정착하여 생활하다 원세계의 군사 지원을 받기위해 심양으로 갔지만 성과를 얻지 못했다. 서간도 일대에서 생활하던 중 1897년 고종 황제의 유지(諭旨)가 내려 한때 귀국하였다. 그러나 1898년 가족과 뜻을 함께 하는 문인들과 함께 다시 만주로 망명하여 통화현 오도구진(五道溝鎭)에 정착하여 향후 의병 활동을 재개하기 위한 기반 조성에 노력했다. 하지만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1900년 다시 귀국하여 평안도 일대를 근거지로 활동했다. 귀국 후 의암은 황해도 평산(平山)과 평안북도 용천(龍川)·태천(泰川)·개천(价川) 등지에서 강학하였는데 평산은 종숙인 유중교가 강학하던 곳이고, 태천은 동문 박문일(朴文一)이 강학하던 곳이었기 때문에 자리잡기에 좋은 여건이었다. 당시 서북 지방 유림들의 지지를 받으며 화서학파의 사상과 의병 활동을 기록한 『소의신편(昭義新編)』을 간행하였다. 유인석은 향약의 실천으로 공자와 맹자, 주자의 전통적 유교 사상을 보존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문하에 다시 수많은 인재가 운집하여 모두 후일 을사의병으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 출국할 때 유인석을 수행하여 해외 독립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중 전덕원(全德元)·백삼규(白三圭)·이진용(李鎭龍) 등이 대표적 인물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외래문물을 반대하며 일본 세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후 춘천과 서울을 오르내리며 새로운 항쟁을 대비하였다.

연해주 망명시기에 대해 1908년 7월[음력]로 기록되어 있으나 1908년 전반기 적어도 5월[양력] 이전으로 추측된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인석의 거의(擧義)노선과 화이론에 입각한 항일 이념의 구현 노력이 일단 한계에 봉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재러 한인 사회를 주도해 오던 김학만, 차석보, 양성춘 등의 세력으로 유인석의 활동의 폭이 제한되었다. 이에 유인석연추로 이동하였다. 연추에서 최재형이범윤과 연합하여 의병 항전을 재개하기 위함이었다. 남우수리 일대를 순회하면서 의병 세력 통합의 심혈을 기울인 결과 이범윤, 이남기, 우병렬, 안창호, 홍범도, 이상설 등과 1910년 6월 국외 의병의 통합체인 십삼도의군을 결성하였으며 도총재로 추대되었다. 1910년 국치 후 이천만 민족 대표로 열국에 성명서를 보내었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911년 연해주에서 창립된 한인들의 자치 단체인 권업회의 총재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우주문답(宇宙問答)』과 『소의신편』이 『의암집(毅菴集)』에 수록되어 편찬되었다.

묘소

강원도 춘천시 남면 가정리에 묘소가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 정부에서 건국 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윤병석, 『해외 동포의 원류-한인 고려인 조선족의 민족 운동』(집문당, 2006)
  •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 연구』(한울,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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