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吳周爀 |
---|---|
영문 | Oh Juhyeok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76년 10월 16일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12월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8월 |
활동 시기/일시 | 1912년 |
활동 시기/일시 | 1914년 2월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몰년 시기/일시 | 1934년 9월 1일 |
추모 시기/일시 | 2006년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단천 |
활동지 | 중국 간도 |
활동지 | 러시아 연해주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권업회 교육부장 |
일제 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오주혁은 1876년 10월 16일 함경남도 단천에서 태어났다. 1905년 을사늑약에 항의하여 상소 운동(上疏運動)을 벌였으며 1907년 12월에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 특별총회에서 이동휘, 오상규와 함께 평의원에 추가 선출되었다. 1910년 8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인석, 이상설 등이 조직한 성명회(聲明會)에 참여하였다. 1912년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경기도 대무의도(大舞衣島)에 거주 제한 조치를 당했다. 이후 해외로 망명하여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오주혁은 1914년 2월 권업회(勸業會) 정기총회에서 교육부장으로 선출되었다. 1919년 3월 무렵부터 김립과 함께 중국 왕청현(汪淸縣)의 삼분구(三岔口)와 토문자(土門子) 중간인 나자구(羅子溝)라는 산골의 조선인 마을에 사관 학교를 설치하여 병력을 모집하고, 훈련시키는 활동을 벌였다. 특히 김립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스크우스리스크 일대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간도로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오주혁은 신민단(新民團)의 주요 인물이었는데, 신민단은 기독교 일파인 성리교(聖理敎) 계열의 신도들이 3·1 운동 직후 김규면을 중심으로 조직한 단체로 항일 무장 투쟁을 위한 군자금과 병력 모집에 주력하였다. 또한 신민단은 1919년 5월 제2회 한인사회당 대회에서 한인사회당과 통합되어 한인사회당의 비밀 군사 조직이 되었다. 오주혁은 1934년에 사망하였다.
2006년 대한민국 정부는 오주혁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