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희제

한자 安熙濟
영문 Ahn Huij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5년 8월 4일
활동 시기/일시 1909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14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활동 시기/일시 1942년 11월
몰년 시기/일시 1943년 8월 3일
추모 시기/일시 1962년
출생지 대한민국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
활동지 러시아 연해주
활동지 중국 만주
정의

1910년대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안희제(安熙濟)[1885~1943]는 러시아 연해주와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가계

안희제의 본관은 강진(康津), 호는 백산(白山)이다. 아버지 안발(安鏺)과 어머니 창녕 성씨(昌寧成氏)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안희제는 경상남도 의령군 부림면 입산리에서 태어났다. 한말 애국 계몽 운동에 참가하여 1907년 동래의 구포(龜浦)에 구명학교(龜明學校)와 의령군 의령면에 의신학교(宜新學校)를 설립하였다. 1908년에는 고향인 의령군 입산리[설뫼]에 창남학교를 설립하고 청소년들을 양성하였다. 1909년 10월에는 서상일(徐相日)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 청년 결사인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설하여 활동하였다. 대동청년당은 안창호 계열의 지하 청년 단체로서 1945년까지 일제에 발각되지 않고 활동하였다. 안희제는 해외 독립운동을 결심하고 1911년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 운동 등을 벌이다 블라디보스토크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였다.

안희제는 귀국한 뒤 1914년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설립했다가 3·1 운동 직후 ‘백산무역주식회사’로 확장하였다. 백산상회는 단순한 사업체가 아니라 독립운동의 연락 기관으로 활동했으며, 상해 임시 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1919년에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의령 각지에 배포하여 군민들의 봉기를 촉구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기미육영회(己未育英會)를 조직하여 다수의 학생들을 외국에 유학시켰으며, 기미육영회 장학생 중에서 다수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1927년에는 이시목(李時穆) 등 동지들과 함께 자력사(自力社)를 조직하여 협동조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1931년 안희제는 민족 종교인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여 만주로 건너갔으며, 1933년에 발해의 옛 수도인 동경성(東京城) 부근에 발해농장(渤海農場)과 발해학교(渤海學校)를 설립하였다. 당시 한인 농민들은 일제의 식민지 약탈 통치하의 국내에서 토지를 잃고 남부여대하여 만주로 건너가 유랑하다가 중국인 지주들의 불리한 소작 조건 밑에서 착취당하는 일이 흔했다. 안희제는 동경성 부근에 대규모 농토를 구입하여 농장을 만들고 유랑하고 있는 한인 농가 300여 호를 유치하여 토지를 분배해 주고, 5개년 연부 상환 조건으로 자작농 전환을 추진하였다. 또한 발해학교를 농장 일대에 설립하여 이주 농민 자녀들을 교육하였다.

1942년 11월 일제는 대종교가 독립운동 조직이라고 보고 만주와 국내에 있는 대종교 지도자 윤세복(尹世復) 이하 21명을 일거에 체포하였다. 이를 대종교에서는 임오교변(壬午敎變)이라고 부르는데, 임오교변 때 일제의 고문으로 10명의 대종교 지도자가 순국했다. 안희제도 그중 한 사람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다가 1943년 8월에 옥사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안희제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 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1986)
  • 박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최 발렌틴 발렌티노비치, 『사진으로 본 러시아 한인의 항일 독립운동』(국사편찬위원회·재러독립유공자후손협회·주러시아연방 한국대사관,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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