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安重根 |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79년 9월 2일 |
---|---|
몰년 시기/일시 | 1910년 3월 26일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출생지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황해도 해주 |
활동지 | 러시아 연해주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의군 참모중장 |
개항기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하며 1909년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격살한 항일 의병 활동 독립운동가.
안중근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한문을 수학하였으며, 자라면서 무술에 더 집중하였다 1904년 평양에서 석탄상을 경영하고 이듬해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자 상점을 팔아 1906년 그 돈으로 삼흥학교[후에 오성학교(五星學校)로 개칭]를 세우고, 이어 남포의 돈의학교를 인수하여 인재 양성에 힘썼다. 1907년 정미7조약의 강제 체결과 군대 해산으로 의병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하자 망명을 하였다. 1907년 연해주로 가서 의병 운동에 참가, 엄인섭, 김기룡과 함께 수청[현재 파르티잔스크]와 수이푼(추풍) , 연추(현재 노에프스키)에서 거병에 필요한 자금과 의병 모집을 하였다. 1908년 이위종, 최재형, 이범윤등과 함께 동의회를 조직했으며 우영장 직책을 맡았다. 1908년 전제덕의 휘하에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 독립대장 및 아령지구 사령관의 자격으로 엄인섭과 함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다.
이후 연해주로 와서 노에프스키[연추(烟秋)]에서 발간하는 『대동공보』의 탐방원으로 활약하는 한편 1908년 11월 이후 연해주 러시아 원동 지역 한인 마을 순방을 하며 애국 계몽 운동을 펼쳤다. 한인일심회를 조직하여 표면상으로 재러 한인 사회의 아편 금지와 상호 부조 활동을 하였지만 항일에 뜻을 두는 동지 규합에 역점을 두었다. 한인일심회 중 안중근을 포함한 핵심 인물 12명이 1909년 의병 활동을 중시한 항일 운동 단체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으며 안중근은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재무상 코코프체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온다는 소식을 듣고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이강 등의 후원으로 이토 히로부미 처단 거사를 계획, 실행하였다.
『안응칠 역사』, 『동양 평화론』 등의 저술이 있다.
대한민국 정부에서 1962년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