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

한자 朴愛
영문 Park Ae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6년
활동 시기/일시 1917년 말경
활동 시기/일시 1918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11월
활동 시기/일시 1920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20년 12월
활동 시기/일시 1921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21년 3월 29일
활동 시기/일시 1921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21년 5월 21일
활동 시기/일시 1921년
활동 시기/일시 1923년
몰년 시기/일시 1927년
추모 시기/일시 2008년
활동지 러시아 연해주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 서무부장
정의

일제 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박애(朴愛)[1896~1927]는 1910년대 말부터 활동한 사회주의자로 극동소비에트 정부에 참여하였으며, 한인사회당에 창립에 기여하였다. 한인사회당 대표로 코민테른과 교섭하였으며, 극동국 한인부를 조직하여 러시아 한인 사회주의자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활동 사항

박애는 1917년 러시아 10월 혁명 이후 하바롭스크에서 수립된 극동소비에트 집행부에서 비서장을 역임했다. 1918년 2월 열린 해외망명자회의에 참석하였고, 4월에 조직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한인사회당 제2차 대회에서 박진순, 이한영과 함께 코민테른 교섭 대표로 선출되어 11월 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박애는 모스크바에서 박진순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요청했고, 제7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하였다. 1920년 4월 러시아 모스크바를 출발해서 돌아오던 도중 러시아 옴스크에 머물며 옴스크 한인공산당 간부 그룹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중반 지역 국민회와의 협력 문제로 옴스크 한인공산당이 분열하였을 때 안경억·이다물과 함께 국민회와의 협력을 주장하였지만, 이성·이괄·채성룡 등 반대파에 패퇴하였다. 1920년 7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전로한인공산당대표자회의 참석하여 이르쿠츠크파에 맞서 한인사회당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박애는 1920년 12월 2일 러시아 치타에서 극동공화국 영토 내에 있는 한인 사회주의 단체들의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였다. 대표자 회의를 통해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가 조직되었고, 박애계봉우·장도정·김진·박창은과 함께 중앙집행부에 선출되어 서무부장을 맡았다.

장도정, 이다물과 함께 1921년 1월 전한의병대회 소집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어 3월 열린 전한의병대회를 준비하였다. 극동국 한인부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결정에 따라 3월 29일 극동국 한인부 중앙집행부 전원이 당에서 제명되었고 아무르주 한인공산당도 해체되었다. 4월 말에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요청으로 명령 불복종에 따른 반혁명 혐의로 극동국 한인부 중앙집행부 전원이 체포되었다. 박애는 5월 21일 열린 임시특별혁명재판소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1921년 11월 15일 확정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한국 문제 결정서에 따라 석방되었다.

박애는 1923년 중국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에 고려혁명군 적위장교단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고, 그 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코민테른 극동국 고려부장 겸 소수민족부장 등을 맡았다. 1927년 일본 밀정으로 몰려 체포되어 총살당하였다.

상훈과 추모

2008년 대한민국 정부는 박애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 사회주의운동 인명사전』(창작과비평사, 1996)
  •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 2003)
  •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http://e-gonghun.mpv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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