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일

한자 金弘壹
영문 Kim Hongil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98년 9월 23일
수학 시기/일시 1915년
수학 시기/일시 1919년
활동 시기/일시 1921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21년 7월
활동 시기/일시 1921년 9월
활동 시기/일시 1922년 상반기
활동 시기/일시 1926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44년 6월
몰년 시기/일시 1980년 8월 8일
추모 시기/일시 1962년
출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리
거주|이주지 중국 상해
거주|이주지 러시아 연해주
학교|수학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북도 정주군
학교|수학지 중국 귀주
활동지 러시아 연해주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 차장|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외무부 장관|국회 의원
정의

1920년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한인 빨치산 부대 지휘관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

개설

김홍일(金弘壹)[1898~1980]은 1920년대 초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한인 빨치산 부대인 대한의용군을 이끌고 러시아 백위군 및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며, 이후 중국 국민당 군대에 가담하여 계속적으로 항일 운동에 투신하였다. 1944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 차장 겸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하며 광복 때까지 꾸준히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가계

김홍일의 본관은 김해(金海), 호는 일서(逸曙)이다. 별명은 최세평(崔世平), 중국식 이름은 왕웅(王雄)·왕일서(王逸曙)·왕부고(王復高)이다. 아버지는 김진건(金振健)이다.

활동 사항

김홍일은 1898년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리에서 4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다. 15세에 만주 봉천(奉天)에서 중국 소학교를 마치고 귀국하여, 1915년에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 황해도 신천 경신학교(儆新學校) 교사가 되었다. 경신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1918년 9월 학생 비밀 결사 사건으로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9년 초 중국 귀주 강무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 군사 훈련을 받고 12월에 졸업하였다. 김홍일은 1921년 3월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장 노백린의 지시에 따라 중국 상해에서 만주로 건너가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 합류하였다. 대한독립군비단은 중국 장백현 지역에서 1919년 11월경 조직된 단체로 의연금을 모집하고 군사 행동을 위한 무기 구입 활동을 벌였다.

1920년 11월 15일 대한독립군비단은 제2차 대회에서 군사본부를 러시아 연해주로 옮기기로 결정하고 부대를 여러 차례 나누어 이동시켰다. 당시 대한독립군비단 군사부 임시 사령관이었던 임표는 새롭게 합류한 김홍일에게 부대 지휘를 맡겼고, 김홍일대한독립군비단과 함께 러시아 이만으로 이동하였다. 1921년 초에 중국 간도와 러시아 연해주에서 모여든 한인 빨치산 부대들은 러시아 이만을 거쳐 러시아 자유시로 향했고, 김홍일대한독립군비단도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김홍일은 러시아 프리아무르주 공산당원인 박영으로부터 자유시에서 군대 통수권을 둘러싼 분쟁이 벌어지고 있다는 내용을 전달받고, 혼자 러시아 자유시로 가서 유홍열을 만나 분쟁 상황을 확인하였다. 결국 대한독립군비단은 러시아 자유시로 이동하지 않고 러시아 이만 지역에 남아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일본군 및 러시아 백위군과 싸우기로 결정하였다.

1921년 7월 13일 러시아 이만의 대한독립군비단 군사부는 제3회 회의를 열어 명칭을 고려혁명의용군(高麗革命義勇軍)으로 바꾸고 러시아 적군과 협력하기로 결정하였다. 1921년 9월 15일 자유시에서 무장 해제를 피해 이동해 온 상해파 인물들과 함께 다시 한 번 고려의용군사의회로 조직을 재편하였다. 고려의용군사의회 산하에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을 두었고 사관학교도 운영하였다. 김홍일한운용과 함께 사관학교 교관으로 일하며 대한의용군 산하 3개 중대 중 제3중대장을 맡았다. 김홍일이 속한 대한의용군은 1921년 12월 초 이만 전투를 시작으로 인 전투, 볼로차예프카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볼로차예프카 전투 이후 김홍일은 러시아 인민해방군에 소속된 한인 빨치산 부대로 새롭게 조직된 한인특립보병중대의 지휘를 맡았다. 시베리아 내전이 종료된 후 한인 빨치산 부대의 해산과 무장 해제가 진행되자 김홍일은 계속적으로 항일 투쟁에 투신하고자 중국으로 이동하여 중국 국민당 군대에 가담하였다. 국민당 군대에서 북벌 전쟁과 중일 전쟁에 참전하였고, 상해 병공창의 창장, 황포군관학교 교관 등을 거쳐 중국 국민당의 장군으로까지 진급하였다. 1944년 민족혁명당 집행 위원, 6월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군무부 차장 겸 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을 맡았다. 1945년 12월 중국 동북보안사령장관부 고급 참모 겸 한교 사무처장이 되었고, 1947년 5월 중국 국방부 정치부 전문 위원으로 임명되어 복무하였다.

김홍일은 1948년 8월 귀국하여 대한민국 국군에 들어간 후 육군사관학교 교장, 육군 참모학교 교장, 육군 제1 군단장, 육군종합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51년 육군 중장으로 예편하였고, 이후 외무부 장관, 국회 의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80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소

김홍일의 묘소는 국립서울현충원 국가 유공자 2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홍일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 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1986)
  •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 2003)
  • 윤상원,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1918~1922)」(고려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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