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金學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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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 Kim Hakma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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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추모 시기/일시 | 2012년 |
활동지 | 러시아 연해주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일제 강점기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학만(金學萬)[?~?]은 1910년대 함경도 일대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등지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다.
김학만은 1908년경 함경도 일대에서 의병 부대에 자금을 지원했으며, 1908년 4월경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계동학교(啓東學校) 교장을 지내는 등 민족 교육 활동에 종사하였다. 1910~19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민회(韓民會)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10년 유인석(柳麟錫), 이범윤(李範允) 등과 성명회(聲明會)를 조직하고 부의장으로 활동하였다. 성명회는 일본 왕에게 서신을 보내 국제 공약의 배신 행위를 질책하였다.
김학만은 1911년 3월 이후 중국 길림성 밀산현(密山縣) 봉밀산(蜂密山) 일대에서 이승희(李承熙)와 함께 한인 정착촌 건설 계획을 추진하였다. 1911~1912년 권업회(勸業會) 총재로 활동하였으며, 거류민회 회장을 지냈다. 거류민회는 1911년 6월 1일 단체 명칭을 신한촌회로 개칭하였다. 1917년 5월 일본 북경 주재 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처단 계획에 참여하여 자금을 제공하였고, 6월엔 신한촌에서 민족 신문 간행을 준비하였다. 1919년 2월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고, 1921년 12월경에는 노인동맹단(老人同盟團) 단장으로 활동하였다.
2012년 대한민국 정부는 김학만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