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金萬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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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 Kim Mankyem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6년 10월 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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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06년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5월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5월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4월 |
활동 시기/일시 | 1922년 |
몰년 시기/일시 | 1938년 10월 7일 |
추모 시기/일시 | 2005년 |
출생지 | 러시아 연해주 포시예트 지역 부르시예 마을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연해주 소비에트 집행 위원 |
일제 강점기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김만겸은 1886년 10월 6일 러시아 연해주 포시예트 지역 부르시예 마을의 농민 가정에서 출생했다. 서당에서 한학을 배운 뒤 조선인 소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06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김나지움을 졸업했다. 김나지움 졸업 후 신한촌 조선인 소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했다. 1910년 8월 일본의 조선 강점에 항의하여 발표된 「성명회(聲明會) 선언서」에 서명했다.
1911년부터 1912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된 러시아어 신문 『Далекая Окраина[변경(邊境)]』 서울 주재 특파원으로서 서울에 거주했으나 일제의 조선 침략 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를 쓴 뒤 일본 경찰에 의해 국외로 추방당했다. 1914년에서 1917년까지 국경대표부 통역으로 일했으며, 1917년 5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열린 전로한족대표자회에 참석한 뒤 『청구신보』 편집인이 되었다. 김만겸은 3·1 운동을 옹호하는 글을 다수 집필하는 한편, 「기미독립선언서」를 러시아어로 번역하여 배포했다.
1920년 5월 코민테른에서 김만겸을 보이친스키와 함께 상해(上海)로 파견했다. 김만겸은 1920년 가을에 한인사회당 성원들과 협력하여 재상해 한인공산당을 조직했다. 1921년 5월 고려공산당[이르쿠츠크파] 창립 대회에 참가하여 중앙 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2년 10월 베르흐네우딘스크 고려공산당 연합대회에 출석했으나, 이르쿠츠크파 대의원들과 함께 집단 퇴장하여 치타에서 별도의 당 대회를 개최했다. 치타 당 대회에서 코민테른 파견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12월 코민테른 제4차 대회에 출석했다. 치타 당 대회 직후 조선 문제를 토론하기 위해 조직된 조선문제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김만겸은 시베리아 내전이 끝난 뒤 연해주 소비에트 집행 위원이 되었으며, 소련공산당에서 제명당한 후 소련 경찰에 체포되어 1938년 10월 7일에 총살당했다.[옥중에서 사망하였다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