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金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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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 Kim Lip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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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3년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1월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4월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2월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9월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5월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9월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0월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2월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1월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5월 |
몰년 시기/일시 | 1922년 2월 6일 |
활동지 | 러시아 연해주 |
활동지 | 중국 상해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원 비서장 |
1910년대부터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하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원 비서장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김립은 1911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권업회에 참여하였다. 1913년 중국 북간도에서 간민회에 참가하였고, 중국 왕청현에 설립된 동림무관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1918년 1월 아령한인회 대표자 회의에 참석하여 청구신보 그룹과 한인신보 그룹이 통합하여 새롭게 조직한 전로한족회에서 부회장에 선임되었다. 1918년 2월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극동소비에트 외무인민위원인 김 알렉산드라와 이동휘의 주도로 열린 해외망명자회의에 참석하였고, 4월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김립은 당 선전부장을 맡아 당 기관지인 한글 잡지 『자유종』의 주필로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전로한족회 중앙총회가 대한국민의회로 확대 개편했을 때 참모로 선정되었다. 1919년 3월부터 오주혁과 함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일대에서 병력을 모집하여 간도로 보내는 활동을 하였다.
김립은 1919년 9월 18일 이동휘 등과 함께 중국 상해로 이동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원 비서장에 취임하였다. 1920년 5월경 중국 상해에서 조직된 상해 한인공산당의 중앙 간부로 이동휘, 이한영, 김만겸, 안병찬, 여운형, 조동호 등과 함께 선임되었다. 1920년 9월 22일 계봉우와 함께 코민테른과의 교섭을 위한 상해 한인공산당 대표로 선임되어 러시아 모스크바로 출발하였다. 1920년 10월 말 김립은 러시아 모스크바로 향하던 중 러시아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1919년 7월에 한인사회당 대표로 러시아 모스크바로 파견됐다가 귀환 중이던 박애와 박진순, 1920년 4월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전권 위원으로 러시아 정부가 지원한 금화 40만 불을 수령하고 귀환 중이던 한형권과 만나 통일 공산당 창립 대회 소집 문제, 모스크바 자금 문제, 동양공산당 조직 문제에 대해 토의하였다. 이 회의 결과에 따라 김립은 한형권이 러시아 정부로부터 받아 온 금화 40만 불을 전달하고 동양공산당 설립을 추진할 목적으로 중국 상해로 귀환했다. 1920년 12월경 박진순과 함께 중국 상해에 도착한 김립은 모스크바 자금을 상해 한인공산당에게는 비밀로 하고 한인사회당에 전달하였다. 이 일로 인하여 상해 한인공산당과 한인사회당은 대립하였고, 1921년 1월경 김립은 이동휘, 이한영 등과 함께 상해 한인공산당에서 탈당하였다. 1921년 4월 이동휘, 김규면, 박진순과 공동 명의로 당 창립 대회 소집 통지서를 공표하고, 김하구와 함께 대회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중국 각지를 순회하였다. 1921년 5월 개최된 상해파 고려공산당 창립 대회에 러시아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여 중앙 위원에 선출되었다. 1922년 2월 6일 중국 상해에서 모스크바 자금을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반납할 것을 주장하던 오면직, 노종균에게 암살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