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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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 | Kim Aleksandra Petrovna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85년 2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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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17년 2월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10월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10월 무렵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3월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4월 |
몰년 시기/일시 | 1918년 9월 16일 |
추모 시기/일시 | 2009년 |
출생지 |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 |
활동지 | 러시아 연해주 |
원어 항목명 | Александра Петровна Ким |
성격 | 사회주의 운동가 |
성별 | 여 |
일제 강점기 러시아 최초의 한인 여성 사회주의 혁명가.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1885~1918]는 러시아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자로 1917년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 조직된 극동인민위원회 외무 인민 위원을 맡았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노동하던 한국인과 중국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 활동했고, 러시아에 망명해 있던 한국인 혁명가들을 지원하여 1918년 4월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 건립에 기여했다. 미국과 일본의 무력간섭기에 하바롭스크를 지키기 위해 백위군에 맞서 싸우다 사로잡혀서 처형되었다.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의 아버지는 김두서(金斗瑞)이다. 김두서는 함경북도 경흥에서 거주하다가 1869년 노령으로 이주하였다. 남편은 스탄케비치이고, 아들 두 명을 두었다.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1885년 2월 러시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태어났다. 1895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청부업과 통역 등의 일을 하던 아버지가 사망한 뒤, 아버지의 폴란드 친구인 스탄케비치의 도움을 받아 성장했다. 16세에 스탄케비치의 아들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았으나 이혼하였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사범학교를 마친 후 추풍 영안평의 소학교 교사가 되었다. 재혼하였으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교사를 사직하고 가족을 떠나 러시아 관영 기업들이 모여 있는 우랄 지방으로 가서 통역 일을 하였다. 러시아 우랄 지방에서 노동하고 있던 한인과 중국인 노농자들의 권익을 위한 활동을 벌였고, 이들을 조직하여 우랄 노동자동맹을 결성했다. 이 무렵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러시아사회민주당 예카테린부르그위원회에 참여했으며,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는 러시아 사회민주당 볼셰비키에 가담했다. 7월에는 우랄 노동자동맹 간부들과 러시아 하바롭스크로 이동하여 10월 혁명에 적극 가담했다. 10월 혁명 이후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 설립된 극동인민위원회에서 외무 인민 위원을 맡았다. 1918년 3월 러시아에 망명한 한인들과 러시아 사회민주당 볼셰비키와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하여 한인망명자대회를 주도했다. 한인망명자대회에서 볼셰비키와의 적극적인 제휴를 주장한 이동휘를 지원해 1918년 4월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이 발족하는 데 힘을 보탰다.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한인사회당 중앙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8월 일본과 미국의 무력간섭을 등에 업은 백위파의 칼미코프 군대가 러시아 극동 지방의 볼셰비키 정부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하바롭스크를 공격하자,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백위군에 맞서 싸웠다. 러시아 하바롭스크가 백위군에 함락되기 직전인 9월 2일 러시아 공산당과 한인사회당 동료들과 함께 기선 바론코르프호를 타고 아무르강을 통해 탈출을 시도하다 백위군에게 붙잡혔다.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는 전향을 거부하고 9월 16일 함께 붙잡힌 동료들과 같이 처형당했다.
2009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