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봉우

한자 桂奉瑀
영문 Kyeo Bongwoo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0년 8월 1일
수학 시기/일시 1893년
활동 시기/일시 1910년 12월
활동 시기/일시 1910년 12월
활동 시기/일시 1910년 12월
활동 시기/일시 1912년
활동 시기/일시 1912년
활동 시기/일시 1913년
활동 시기/일시 1913년
활동 시기/일시 1916년 11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8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말~1920년대 초
활동 시기/일시 1919년말~1920년대 초
활동 시기/일시 1919년말~1920년대 초
활동 시기/일시 1921년 2월
활동 시기/일시 1922년 10월 19일~1922년 10월 28일
활동 시기/일시 1937년
몰년 시기/일시 1959년 7월 5일
추모 시기/일시 1995년
출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도 영흥
거주|이주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활동지 중국 북간도 소영자
묘소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위원
정의

일제 강점기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한 항일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

개설

계봉우(桂奉瑀)[1880~1959]는 함경도 영흥에서 1880년 8월 1일 출생했다. 빈궁한 관노 출신이었으나 1893년 서당에 들어가 유년 시절 서당에서 수학하였다. 1903~1906년 중국사를 공부하였다. 별칭으로 뒤바보, 북우, 사방자를 사용했다. 일생 동안 언어와 풍속이 다른 4개의 국가를 넘나들면서 살았다. 구한말 함흥 홍명학교, 영생중학교에서 교사를 했으며 신민회에 참여하는 등 애국 계몽 운동을 하였다. 망명 초기 일제의 식민 사관에 의한 일선 동조론을 폭로하고 동화 정책에 맞서 교과서 집필과 역사 서술을 통해 민족주의 교육 운동을 펼쳤다. 1919년 이후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임시의정원 위원과 독립운동사 사료 수집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동휘와 함께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다. 1920년대 초 러시아 치타(Chita)에서 러시아 공산당 산하 한인부 간부로 활동하였고,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 지역 무장 독립 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계봉우는 1959년 7월 5일 사망하였다.

가계

계봉우의 어머니는 정씨이다. 아들로 계태림, 계정림, 계창림, 계학림이 있고, 딸 계화림이 있다.

활동 사항

계봉우는 1908년 동경 유학생 단체인 태극학회(太極學會)의 영흥지회에 들어가 「진지사(眞志士)」 등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고 신민회에 들어가 구국 계몽 운동에 참여했다. 1910년 12월 북간도로 망명하여 간민교육회, 간민회 등 중국 당국의 인가를 받은 민족 운동 단체에서 민족 교육과 한인 자치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길동기독학당의 역사 교재로 『신한독립사』를 편찬하고, 1912년 중등학교 교과서로 『조선 역사』와 초등학교 수신 교과서로 『오수불망』 등을 편찬하였다. 북간도 소영자에 있는 광성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1913년 러시아 연해주로 넘어가 이상설, 이동휘가 주동하던 대한광복군정부 책임 비서와 『권업신문』의 기자로 활동했다. 『만고의사 안중근전』을 집필하던 중 1916년 11월 북간도 하마탕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었다. 3·1 운동이 일어난 후 1919년 8월 다시 망명하여 북간도 국민회에서 활동하였다. 이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롭스크를 중심으로 중국 상해를 오가며 사회주의 운동과 국학 연구에 투신했다. 1919년 말에서 1920년대 초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임시의정원 위원, 독립운동사 사료 수집 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한인사회당에 입당하여 이동휘와 함께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하였다. 러시아 치타에서 러시아 공산당 산하 한인부의 선전선동 출판부장으로 1921년 2월 한인부의 기관지 『노동신문』을 창간하였다. 전한공산당[고려공산당] 건설과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에서 온 한인 무장 세력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으나 이르쿠츠크파의 탄압에 의해 체포, 투옥되었다. 이동휘 등 고려공산당 대표단이 1921년 가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전개한 외교 활동으로 석방되고 1922년 10월 19일부터 28일까지 러시아 연해주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개최된 고려공산당 통합 대회에 참가하였다. 1937년 이후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되어,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등에서 말년을 보내며 모국어와 조국의 역사를 연구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 상해 『독립신문』에 연재된 「아령실기」, 「북간도 그 과거와 현재」, 「김알렉산드라 소전」, 「의병전」이 있고, 『동학당 폭동』, 『만고의사 안중근전』, 『조선사 1, 2』 등의 저술이 있으며, 교과서로 『신한독립사』, 『조선역사』, 『오수불망』 등이 있다.

묘소

계봉우의 유해는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2019년 4월 22일 60년만에 국내로 봉환되어 국립 서울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95년 대한민국 정부는 계봉우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조동걸, 「해제-북우 계봉우의 생애와 저술 활동」(『북우 계봉우 자료집』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 1996)
  • 반병률, 「러시아 혁명 전후 시기 계봉우의 항일 민족 운동, 1919~1922」(『러시아의 한국학과 북우 계봉우』, 소명출판, 2013)
  • 윤병석, 「계봉우의 민족 운동과 한국학」(『러시아의 한국학과 북우 계봉우』, 소명출판,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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