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우규

한자 姜宇奎
영문 Kang Wookyu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55년 7월 14일
활동 시기/일시 1919년 5월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2일
활동 시기/일시 1919년 9월 17일
몰년 시기/일시 1920년 11월 29일
추모 시기/일시 1962년
추모 시기/일시 2011년 8월 3일
출생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안남도 덕천군
활동지 러시아 연해주
성격 독립운동가
성별
대표 경력 신한촌 노인단 길림성 지부장
정의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신한촌 노인단원으로서 1919년 경성에서 사이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진 독립운동가.

개설

강우규(姜宇奎)[1855~1920]는 1910년 한일 합병 이후 북간도를 거쳐 중국 길림성, 러시아 시베리아·연해주로 등지로 이주하였다. 신한촌 노인단원으로서 사이토 마코토 총독에게 폭탄을 던졌다.

가계

강우규의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찬구(燦九), 호는 왈우(曰愚)이다.

활동 사항

1855년 평안남도 덕천에서 태어난 강우규는 1911년 중국 북간도 두도구(頭道溝)로 망명하였다. 1915년 중국 길림성 요하현(遼河縣)으로 이주한 뒤 동광학교(東光學校)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과 독립 정신 고취에 주력하였다. 1919년 3·1 운동 소식을 접하고 강우규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노인단(新韓村 老人團) 길림성 지부장이 되어 조직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했다. 그러나 1919년 5월 노인단원 이발(李撥)·정치윤(鄭致允) 등 5명의 대표단이 서울에 들어와 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히자 노인단 대표로서 일본 총독 암살을 결심했다. 1919년 7월에 러시아인으로부터 영국제 수류탄 1개를 구입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원산으로 가서 최자남(崔子南)·허형(許炯) 등과 거사 계획을 세웠다.

1919년 8월 5일 경성에 도착한 강우규는 안국동 김종호(金鍾鎬)의 집에서 머물며 허형(許炯)에게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사진과 부임 정보를 입수하였다. 1919년 9월 2일 남대문 정거장에서 사이토 마코토가 마차를 타려는 순간 강우규는 폭탄을 던졌다. 폭탄은 마차 앞 십여 보 지점에서 폭발했으나 파편은 사이토 마코토의 혁대를 스쳐 지나갔고,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鍊太郞]는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 일본 경찰 1명과 『오사카 아사히신문[大阪朝日新聞]』의 특파원 1명이 사망하고 다른 특파원 외 다수가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으로 한일 합병이 조선이 원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전 세계에 알리던 일제의 계획이 폭로됐다. 경찰의 눈을 피해 빠져나온 강우규는 허형(許炯)을 만나 재거사를 계획했다. 오태영(吳泰泳)의 소개로 가회동 장익규(張翊奎)의 집과 오명숙(吳明淑)의 주선으로 사직동 임승화(林承華)의 집에서 머무르며 지냈다. 강우규는 1919년 9월 17일 누하동에서 김태석(金泰錫)의 밀고로 체포되어 1920년 11월 2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강우규의 공적을 기려 건국 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2011년 8월 3일에는 사단 법인 강우규의사기념사업회에서 서울역 앞에 강우규 의사 동상을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독립 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 1986)
  • 계봉우, 「아령실기」(『독립신문』, 1920. 2. 20~1920. 4. 12)
  •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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