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趙明熙 |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출생 시기/일시 | 1894년 8월 10일 |
---|---|
수학 시기/일시 | 1919년 9월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
활동 시기/일시 | 1924년 6월 15일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
활동 시기/일시 | 1928년 8월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
활동 시기/일시 | 1936년 |
몰년 시기/일시 | 1938년 5월 11일 |
추모 시기/일시 | 1988년 12월 10일 |
추모 시기/일시 | 1992년 5월 21일 |
추모 시기/일시 | 1994년 9월 10일 |
출생지 | 대한민국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 수암부락 |
학교|수학지 | 일본 도쿄도 분쿄구 |
활동지 |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
성격 | 문학가 |
성별 | 남 |
본관 | 양주(陽州) |
1928년 소비에트연방으로 망명하여 고려인 문학을 개척한 문학가.
조명희(趙明熙)[1894~1938]의 호는 포석(抱石)이다. 1920년 극예술협회를 창립하였고, 1921년 7월 희곡 「김영일의 사」를 발표하였다. 1924년 시집 『봄 잔디밧 위에』를 간행했고, 1925년 첫 단편 소설 「땅속으로」를 『개벽』에 발표했다. 1925년 ‘카프’ 창립 회원으로 가입해 활동하면서 1927년 대표작 「낙동강」을 발표했다. 조명희는 1928년 자신의 사상적 조국인 소련으로 망명했고, ‘조생’이라는 필명으로 산문시 「짓밟힌 고려」[1928]를 발표했다. 『선봉』 신문에 ‘문예 페이지’ 안을 만들어 고려인 문학 건설에 헌신한 고려인 문학의 선구자이자 아버지라 할 수 있다.
조명희는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에서 태어났으며, 1910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9년 일본 동경 동양대학에서 수학하였다. 조명희는 일본 동경 유학 중 1920년 김우진과 함께 극예술협회를 창립했고 조선으로 돌아와 1925년 카프(KAPF)에 가입하여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한 조명희는 재소 고려인 한글 신문인 『선봉』에 문예 페이지를 개설하고 편집을 맡으면서 고려인 한글 문학을 본격적으로 개척하고 일군 선구자 역할을 했다. 조명희는 1938년 일본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하여 생을 마감하였다.
조명희는 1921년 7월에 희곡 「김영일의 사」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김영일의 사』는 1923년 2월에 희곡집으로 발간되었으며, 근대 문학 최초의 희곡 창작집이었다. 이후 일본과 조선에서 쓴 시를 모아 1924년 6월에 적로(笛蘆)라는 필명으로 시집 『봄 잔듸밧 위에』을 간행했다. 1927년 7월 『조선지광』에 단편 소설 「낙동강」을 발표하여 주목을 받았다. 1928년 소비에트연방으로 망명한 후 첫 시 「짓밟힌 고려」를 발표한 이후 「십월의 노래」[1930], 「볼세비키의 봄」[1931], 「녀자공격대」[1931], 「맹서하고 나아서자」[1934], 「‘오일’ 시위 운동장에서」[1934], 「아우 채옥에게」[1935], 「까드리여, 너이의 짐이 크다!」[1935] 등의 산문시를 발표했다. 소련에서 발표한 조명희의 산문시는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대한 찬양과 사회주의 건설과 혁명을 통해 조선의 해방을 고취시키는 내용으로 이루어졌다. 또한 조명희는 소련에서 「아동 문예를 낳자」[1935], 「조선의 놀애들을 개혁하자」[1935] 등의 평론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