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極東民族大會 |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러시아 모스크바주 모스크바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2년 1월 21일 |
---|---|
종결 시기/일시 | 1922년 2월 2일 |
발단 시기/일시 | 1921년 8월 |
발생|시작 장소 | 러시아 모스크바시 |
종결 장소 | 러시아 모스크바시 |
1922년 1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린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 대표자들의 연석회의.
극동 민족 대회는 미국이 주도한 워싱턴 회의에 대항하여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가 기획하였다.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2일까지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 대표자들이 모인 연석회의이다. 처음에는 1921년 11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열릴 예정이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시기와 장소가 변경되어 1922년 1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극동 민족 대회를 처음 기획한 시기는 1921년 8월이다.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는 미국에서 열리는 워싱턴 회의에 대항할 회의를 열려는 의도로 극동 민족 대회를 생각해 냈다.
1921년 8월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는 미국의 워싱턴 회의에 대항하기 위해 1921년 11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극동 민족 대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코민테른 극동 비서부가 대회 소집을 주관하였다. 극동 비서부는 산하의 민족별 지부를 중심으로 각국 대표자를 선정하였다. 한국 대표를 선정한 당시 극동 비서부 고려부의 위원은 한명세, 최고려, 이형근으로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의 중앙 위원들이었다. 한국 대표로 선정된 인물은 1921년 12월 20일 기준 한국 국내, 중국 상하이, 서간도, 일본, 러시아 등지에서 모인 48명이었다. 여기에 12월 21일 열린 고려 공산당 연합 중앙 위원회 및 코민테른 극동 비서부 고려부의 연석회의 결과 추가된 3명의 상해파 인물을 더해서 51명이 되었다. 한국인 대표자들 중 단 한 명도 극동 민족 대회 예정일인 11월 11일 이전에 러시아 이르쿠츠크에 도착하지 못했다. 이는 다른 나라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극동 민족 대회의 개최 일시를 재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극동 민족 대회는 1922년 1월로 연기되었고 장소도 러시아 모스크바로 변경되었다.
각국 대표단은 특별 열차를 타고 1922년 1월 7일 러시아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본격적인 대회 시작을 위해 대표자 자격 심사 위원회가 각 민족별 2명과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에서 지정한 3명을 합쳐 11명의 심사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한국 대표단으로 여운형과 최고려가 참여하였다. 한국 대표단은 모스크바 고려 학생회 소속 김규찬, 김정하, 전러시아 고려 노동회 소속 박파벨, 홍진우, 그리고 김마트베이 티모페예비치까지 5명이 추가되어 총 56명이 되었다. 1922년 1월 21일 대회 첫날 의장단 16명이 선출되었다. 의장단의 구성은 코민테른 집행 위원회 2명, 극동 비서부 2명, 한국·중국·일본·몽골 각 2명, 자바 1명, 각국 청년 대표 1명, 여성 단체 1명으로 구성되었다. 한국 대표로는 김규식과 여운형, 각국 청년 단체 대표로 김단야, 여성 단체 대표로 김원경이 포함되어 의장단에 4명의 한국인이 포함되었다. 각국 대표 단장이 차례로 한 개회 연설은 김규식이 하였다. 극동 민족 대회 기간 중 본회의는 총 12회가 열렸고, 본회의와 별도로 민족별 분과 회의가 진행되어 각국의 혁명 정세에 대한 분석과 검토, 혁명 운동의 전략과 전술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본회의에서는 코민테른 집행 위원장 지노비예프가 보고한 ‘국제 정세와 워싱턴 회의의 결과’, 중국, 한국, 일본, 몽골의 혁명 운동에 대한 ‘각국 정세 보고’, 코민테른 집행 위원 사파로프가 보고한 ‘민족 식민지 문제와 그에 대한 공산주의자의 태도’, 그리고 대회 ‘선언’이 주요 의제로 다뤄졌다. 극동 민족 대회 마지막 날인 1922년 2월 2일 2개의 결의와 1개의 선언을 채택하고 폐막하였다. 대회 선언문은 의장단에 일임되었는데, 김규식을 포함한 6인 위원회에서 초안을 가다듬었다.
한국 대표단의 민족별 분과 회의 토론 결과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원문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여운형의 경찰 진술을 통해 결의안의 개략적인 내용은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결의안에는 산업의 미발달로 계급 운동은 시기상조이며, 조선 민중이 민족 운동에 참여하고 있으므로 계급 운동자는 독립운동을 후원하고 지지해야 하며,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명칭에 비해 실력이 부족하므로 조직을 개혁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결의안의 주장은 1923년 초에 개최되는 국민 대표 회의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극동 민족 대회는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여러 나라 사회주의 운동에 민족 통일 전선의 필요성을 확신시켰다. 민족 통일 전선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강령과 서로 반대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였다. 민족 혁명 단체들과 적극적으로 제휴하여 민족 통일 전선 기관을 설립할 필요성이 공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