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血誠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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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해체 시기/일시 | 1922년 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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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19년 가을 |
최초 설립지 | 러시아 연해주 수이푼 |
1919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활동했던 재러 한인 빨치산 부대.
혈성단의 조직 시기는 불명확하지만 1919년 강국모(姜國模)가 단장이 되면서 빨치산 부대로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강국모는 1919년 3·1 운동 소식을 듣고 독립운동에 뜻을 두어 광산에서 다액의 사금을 소지하고 수이푼으로 와서 그 금으로 무기를 매입하여 혈성단에 기부함으로써 혈성단의 단장이 되었다. 이 과정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되었던 소년모험단이 개입되었다. 1918년 김운학, 박춘근, 김봉기, 김형식 등 18명의 청년들은 소년모험단을 조직했다. 이들은 각지에 지단을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하기 위해 인원을 파견했다. 단장 김운학은 오호츠크로 가서 금광에서 일하는 한인 노동자 120명을 모아 지단을 조직했다. 김운학은 여기에서 의연금으로 모음 금 4부드[буд, 1부드는 약 16㎏]를 강국모에게 맡겨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온 강국모는 소년모험단 간부들이 모두 젊은 청년들이라 뜻이 맞지 않아 금전을 가지고 수이푼 구역의 여호촌 마을 재피거우로 가서 혈성단을 조직했다고 한다.
1919년 가을 러시아 그로데코보 일대를 배회하다 희생된 최영호의 독립단부대를 흡수하여 부대를 확장했다. 1920년 5월 채영(蔡英) 등 신민단 부대원 16명이 결합하여 재조직되었다. 단장에 강국모, 사령관[중대장]에 채영, 참모장 한일제, 재무장 왕채호 등의 간부진을 중심으로 보병 4소대와 기병 1소대, 모연대, 적십자대, 피복대 등으로 이루어진 혈성단 부대가 재조직되었다. 1920년 10월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수이푼 재피거우를 떠나 러시아 빨치산 부대 총사령부가 있는 아누치노로 이동했다. 아누치노 근처 트레치-푸진에서 수찬 빨치산 부대, 신민단 부대와 통합하여 통합 부대를 조직했다.
1921년 11월 통합 부대가 와해되자 강국모는 수이푼 지역 다부허로 돌아가 혈성단을 재건했다. 러시아 내전이 종료되고 1922년 11월 연해주 한인 빨치산 부대에 대한 무장 해제 명령이 내려진 후 혈성단은 해산되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연해주에서 조직된 한인 빨치산 부대의 하나로 일본군 및 일본군이 지원하는 백군과 전투를 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