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韓人社會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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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러시아 하바롭스크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18년 4월 2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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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칭 시기/일시 | 1921년 5월 |
최초 설립지 |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시 |
성격 | 사회주의 정당 |
설립자 | 이동휘|김알렉산드라 |
1918년 4월 28일 이동휘, 김알렉산드라가 중심이 되어 러시아 연해주 하바롭스크시에서 결성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한인사회당은 1918년 4월 28일[서력 5월 10일]에 하바롭스크에서 결성된 독립운동 단체이자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정당이다. 이동휘는 항일 독립운동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볼세비키의 원조가 필요하다고 판단, 모스크바에서 파견나온 제3인터내셔널의 원조 아래 한인사회당을 결성하였다. 연해주와 아무르주에 8개의 지부를 설치하였다. 한인사회당 최초 중앙 위원으로는 위원장 이동휘, 부위원장 오 바실리, 군사부장 유동열, 선전부장 김립, 김 알렉산드라 등이 선임되었다. 한인사회당의 정강은 소비에트 공산당의 정강을 기초로 작성되었다. 한인사회당의 러시아 내 한국인 이주민들 사이에서 조직, 선전 활동에 종사하고 무장 부대를 양성하여 독립을 쟁취하는 활동에 주안점을 두었다.
한인사회당은 민족의 해방과 조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였다.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제2차 당대표자대회를 개최하여 신민단과 통합하였다. 1919년 말 이동휘가 통합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어 상해로 가면서 당 중앙을 상해로 옮겼다. 1921년 5월 상해에서 3차 당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당명을 고려공산당[상해파]으로 개칭하였다.
주요 사업으로 첫째, 무장 부대 편성사업을 하였다. 무장 부대 편성은 한국인 사관 학교를 설립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군사부장 유동열을 책임자로 하는 사관 학교를 원동공화국 지원하에 하바로프스크에 설립했다. 두 번째로는 츨판, 선전, 교육사업을 진행하였다. 1917년 9월에 설립된 출판사 보문사를 활용했다. 보문사는 원동공화국의 재정 지원과 인쇄기와 종이 자금 지급이 있었다. 츨판 활동은 한국인의 민족 문화를 보급하고, 마르크스주의 서적을 간행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당 기관지로서 한글 잡지 『자유종』 발간을 준비하였다. 주필은 선전부장인 김립이 담당하였다. 그 외에 한국인 학교 문덕중학교를 설립하였다.
1918년 4월 5일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맞써 적위대 모집활동을 하였다. 1918년 8월말 하바롭스크의 볼세비키들이 빨치산 체제로 전환을 결정한후 아무르주로 이동하던 중 한인사회당 간부들은 흑룡강에서 체포되어 하바롭스크로 압송되었다. 전일, 유동열, 이인섭 등은 중국인 노동자로 위장하여 석방되었지만, 김 알렉산드라는 백군에 의해 처형되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이동휘 등은 4월 25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한인사회당의 대표자대회를 열었다. 박진순·박애·이한영 3명을 소련 코민테른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들 3명은 모스크바에 가서 한인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선언하고, 한인사회당 당원 명부를 코민테른에 제출하여 상당한 규모의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받는 데 성공하였다. 이후 이동휘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상해로 왔다. 상해 임시 정부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된 대한국민의회 통합 시 주도적으로 참여해 이동휘가 임시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 김립이 국무원 비서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첫째, 한국 역사 속의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이다. 설립 과정은 사회주의 운동의 기원에 대한 인식의 폭을 넓게 한다. 둘째, 일제 강점기라는 현실 속에서 민족주의 내 최초의 사회주의자들의 분립, 형성 과정이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셋째로는 한인사회당의 사회주의 이념의 수용이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라는 역사적 용어를 탄생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