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安應七遺族救濟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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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1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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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사회단체 |
설립자 | 최봉준|김병학|김학만|유진률 |
1910년대 러시아 연해주에서 조직된 재러 한인 단체.
언제 해체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로 연해주 한인들의 민족 운동이 불가능해지면서 사라졌다.
안중근은 1909년 10월 10일 대동공보사 사무실에서 대동공보사 유진률, 정재관, 정순만 등과 함께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논의했다. 『대동공보』와 안중근과의 이런 관계로 인해, 안중근의 의거가 처음 신문에 게재된 것은 바로 『대동공보』였다. 『대동공보』는 1909년 10월 28일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실을 1면 기사로 대서특필했다. 이후 『대동공보』는 안중근의 재판과 사형까지의 과정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특히 『대동공보』는 안중근을 암살자가 아닌 의사라고 불러야 한다고 처음 주장하기도 했다. 『대동공보』를 통해 안중근의 의거가 알려지자 러시아 지역의 한인들의 민족의식이 고취되었다. 대동공보사는 러시아 각 지역의 한인 사회 주체로 안중근 추도회를 개최했으며, 연해주 지역에서는 최봉준, 김병학, 김학만, 유진률 등에 의해 안응칠 유족구제회가 결성되었다.
안중근은 의거 이전에 동료들에게 가족을 국외로 불러오도록 부탁하였다. 그리하여 안중근의 처와 자식들은 의거 전에 조선을 떠나 하얼빈을 거쳐 러시아 연해주의 코르지포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안중근이 순국한 직후 조직된 ‘안응칠 유족구제회’의 주선으로 1910년 10월경에 코르지포에 안중근의 어머니와 동생 안정근, 안공근 등 안중근 일가 여덟 명이 모여 살게 되었다. 안중근 가족은 1911년 4월 경 코르지포에서 10여 리[4㎞] 떨어진 한인 마을인 중국 목릉현(穆陵縣) 팔면통(八面通)으로 옮겨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