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水淸軍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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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19년 2월~1919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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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 시기/일시 | 1919년 6월 |
성격 | 군사 단체 |
설립자 | 한창걸 |
1918년 한창걸이 조직한 재러 한인 빨치산 부대.
1918년 10월 러시아 연해주 수찬 지역에 체코군과 일본군이 도착하여, 빨치산 색출을 위해 한인 주민들을 위협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항하기 위해 한인 소비에트 위원들은 스스로 빨치산 부대를 결성했다.
1918년 10월 체코군과 함께 일본군이 수찬 지역에 도착했다. 이에 한인들은 러시아 빨치산과 함께 대항했다. 그러나 곧 한계를 절감한 한인들은1919년 2월부터 4월 사이에 독자적인 한인 빨치산 부대를 조직했다. 새롭게 조직된 수청군대는 한창걸을 대장으로 하여 35명의 부대원으로 결성되었다. 한창걸을 중심으로 한 수청군대는 수찬 지역의 다른 한인 빨치산 부대들과 쉬코토프 구역에서 통합하였고, 1919년 7월 연해주 지역 혁명 사령부로부터 니콜라예프카, 노비츠키이, 크라스노폴례 지역을 작전 구역으로 할당받았다. 그러나 극도로 나빠진 식량 사정으로 수청군대는 어려움을 겪었다. 러시아 연해주 지역 혁명 사령부에서는 빨치산 부대 조직과 노동 주민 조직에 대한 문제 해결을 위한 노동자 대회 소집을 결정했다. 1919년 6월 니콜라예프카에서도 한인노동자대회가 소집되었다. 한인노동자대회에서는 누구와 전투를 할 것인가에 대해 모든 제국주의 간섭군과 싸우자는 수청군대와 민족적인 입장에서 일본군 및 백군에 대항해서만 싸우자는 대한국민의회 대표 간에 의견 대립이 있었다. 양측의 의견 대립으로 인해 노동자대회는 성과 없이 해산됐다. 한인노동자대회가 해산된 후 러시아 연해주 지역 혁명 사령부에서는 수청군대에게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모든 활동을 중단하고 부대를 해산하라는 결정을 내렸다.
1918년 10월 결성된 수청군대는 러시아 빨치산 부대와 함께 백군과 제국주의 간섭군에 맞서 싸웠다. 1919년 새롭게 재조직된 수청군대는 1919년 5월 처음으로 백군과 전투에 나섰다. 백군이 블리지미로-알렉산드로프카에 상륙하자, 수청군대는 러시아 빨치산 부대와 함께 페레치노에서 백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백군은 15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부대를 후퇴시켰다. 두번째 전투는 카잔카 마을 교외에서 미국군을 상대로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도 미국군은 15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피해를 입었다. 백군과 전투를 겪은 한창걸의 수청군대는 이후 수청 지역의 다른 한인 빨치산 부대와 통합하고, 니콜라예프카 부근에 사관 강습소를 설치하하여 사관 생도 100명을 교육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