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 | 大韓義勇軍 |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이만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설립 시기/일시 | 1921년 9월 25일 |
---|
1921년 9월 이후 러시아 연해주 이만시 지역에서 조직된 상해파, 군비단 중심의 한인 무장 독립 부대.
1921년 3월 이후 서간도에서 이동한 군비단이 이만[지금의 달네레첸스크 지역]에 주둔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혁명의용군으로 개칭한 군비단은 1개 대대 3개 중대로 편성하고 사관 양성 속성과를 두고 군사 교육을 장려하고 있었다. 자유시 참변을 피해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던 상해파들이 이만으로 집결하고, 중국령에선 이용, 한운용, 김홍일 등이, 흑룡주로부터는 임상춘이 왔다. 1921년 9월 25일 이만 와구통촌에서 시국 문제 토론회를 열고 ‘고려의용군사의회’를 조직하였다. 비서부, 사령부, 재무부, 문화부. 서무부를 두었으며, 의회 의원으로 마용하, 임표, 이용, 김찬, 김덕은, 최중천, 장재관, 박춘근, 윤동선을 선출하였다. 고려의용군사의회의 산하에 대한의용군을 1개 대대로 편성하였으며 사령관에 이용, 사령부관에 박춘근, 참모장에 임표, 한운용, 김홍일이 선임되었다. 사관 학교를 설립하여 사령관인 이용이 교장을 겸임하고, 교육장에 한운용, 학도대장에 김홍일을 선출하였다. 대한의용군은 이를 기반으로 3개 중대로 편성되었다. 임표, 한운용, 김홍일이 각각 1, 2, 3중대장에 임명되었으며, 소대장은 김동명, 이빈, 강신우, 박흥, 마춘걸, 마건, 이성춘, 오동명 등 이었다. 병력은 약 357명이었다. 1921년 12월 2일 백위파군 육군대장 몰차노프의 이만 공격에 맞서 러시아 적위군의 구원 요청으로 이만 전투를 시작으로 연해주 해방 전쟁에서 반제, 반일의 소비에트러시아와의 국제적 연대 속에서 항일전을 전개했다.
대한의용군의 설립 목적은 혁명 단체와 무장 독립 부대의 통일과 반제, 반일의 국제적 차원의 연대 실현이었다.
시베리아 내전에서 반제, 반일의 항일전을 국제적 차원의 독립운동으로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