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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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沿海州 |
영문 | Maritime Province in Russia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러시아 연해주지방 |
시대 |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개설 시기/일시 | 186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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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시기/일시 | 1937년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04년 |
원어 항목명 | Приморский край |
면적 | 164,673㎢ |
인구[남/여] | 1,923,116명[2017] |
러시아 시베리아 동쪽의 동해에 접한 지방으로서 재러 한인들의 독립운동 근거지인 동시에 거주지였던 지역.
러시아어로 프리모르스키 크라이(Примо́рский край)는 ‘바다에 인접한 지역’이란 뜻이다.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연해주(沿海州)라 불렀다.
1864년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 마을로 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갑자도강 때에 약 300명이 이주했다. 그 후 연해주에서는 한인의 수가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1867년 러시아 연해주 얀치헤 마을, 1870년의 러시아 연해주의 소왕령[우수리스크], 1874년의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개척리, 러시아 연해주 추풍과 수청 지역 등 재러 한인들의 연해주 개척은 꾸준히 계속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전까지 연해주 지역은 13도의군, 성명회, 권업회, 안창호의 대한국민회 원동지회 등이 잇달아 설립되면서 해외 독립운동 기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특히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에 있었던 신한촌은 독립운동의 메카로 인식되었다. 1919년 2월에 대한국민의회가 연해주에 설립됨으로써 독립운동에서 연해주 지역이 차지하는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1919년에는 노인단이 세워져 강우규를 조선에 파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0년 일본군에 의해 자행된 러시아 연해주 4월 참변 이후 친일 단체인 블라디보스토크의 조선인거류민회와 우수리스크의 간화회가 세워졌으나 추풍 및 수청과 같은 농촌 지역에서는 연해주 빨치산 활동이 활발해졌다.
1922년 일본이 연해주에서 철병을 한 후에 연해주 지역의 한인들은 소비에트 건설에 몰두했으나 여전히 민족 문제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졌다. 한글 신문인 『선봉』을 발간하고 우수리스크에는 고려사범전문학교,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원동조선인사범전문대학, 고려극장 등을 세우며 교육과 예술 활동을 통해 민족 문화를 유지해 갔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전까지 연해주에 사는 한인의 규모는 약 2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강제 이주 후에는 연해주 지역의 한인 마을은 폐허가 되었고, 고려인들의 무대는 중앙아시아로 옮겨 갔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연해주는 고려인의 새로운 중심지로 떠오르고 있다.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 타민족들에 대한 배타적 분위기가 형성되자 고려인들은 강제 이주 전에 부모들이 살았던 역사적 고향인 연해주로 다시 돌아오고 있다. 1998년 8월 한국의 주택 건설 협회에서 1,000가구의 고려인 농업 정착촌을 건설할 계획을 마련하였으나 IMF와 현지 조사 부족 등으로 중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