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Синегорс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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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러시아 사할린주 시네고르스크 |
시대 | 현대/현대 |
개칭 시기/일시 | 1947년 10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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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항목명 | Синегорск |
러시아 사할린주에 있는 일본 기업 미쓰이 소유의 탄광이 있던 탄광촌.
1942년 11월, 소속 군이 토요사카[豊栄] 관할에서 토요하라 지청으로 변경되었다. 이후 1943년 4월 1일 ‘가라후토 시행법률특례에 관한 건’[1920년 칙령 제124 호]이 폐지되어 내지[홋카이도]로 편입되었다. 1945년 8월 22일에는 소련에 의해 점령되었다. 소련 점령 이후 1947년 10월 15일 시네고르스크(СИНЕГОРСК)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49년 6월 1일, 일본 국가 행정 조직법의 시행을 위하여 법적으로 가라후토 청과 가와카미 촌은 폐지되었다. 시네고르스크에 위치한 가와카미 탄광은 1908년에 개발을 시작하였으며 남사할린 지역 내수를 목적으로 한 탄광이었다. 남사할린 지역 석탄 공급을 위해 1914년에 토요하라[豊原][현 유즈노사할린스크시]-가와카미를 잇는 철도가 완성되었다. 사쿠라이쿠미[櫻井組]가 관리했던 가와카미 탄광은 1916년 미쓰이 광산 소유로 넘어가면서 사할린 최대의 산출량을 달성하기도 했다. 한때 광산 면적만 약 16.5㎢ [500만 평]에 출탄량은 연간 26만 톤 규모였는데, 주로 화태청 철도, 토요하라, 오도마리[大泊][현 코르사코프], 오치아이[落合][현 돌린스크]의 제지 펄프 공장 및 가정용으로 활용되었다.
가와카미 탄광은 일제에 대한 조직적인 동원이 이루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한인을 모집했던 탄광으로 알려졌다. 『매일신보』 1921년 12월 16일 기사에 따르면 1917년부터 관의 허가를 받아 1920년 6월까지 8회에 걸쳐 한인 539명을 모집했고, 그 외 사할린에서 189명을 모집했다고 한다. 강제 동원 시기인 1935년에는 인구가 2,967명이었고, 1959년 5,639명이었다가 점차 줄어들어 2002년 2,597명으로 조사되었다. 현재 한인은 3가구 정도가 남아 있고, 1943년 아버지를 대신해 강제 동원되었던 징용 1세 김윤덕도 2018년 사망하였다. 김윤덕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한인 사망자들은 주로 강변의 화장터에서 화장을 했다고 한다. 1990년 KBS 이산가족찾기 위성중계 프로그램으로 어머니와 상복하기도 했던 김윤덕은 사할린 징용피해자의 산증인이었다.
현재 시네고르스크 공동묘지에는 한인묘 71기, 추정 한인묘 65기 등 총 136기가 확인되었다. 또 시네고르스크 탄광에서 일했던 신동필은 1945년 10월경 일부 일본인들이 탄광굴 안에 한인들을 몰아 넣고 몰살시키려다 실패하자 숙소를 습격하여 살해할 계획을 세웠으나 일본인 탄광 부책임자가 만류하는 한편 학살 계획을 한인들에게 알려 실행되지 못했다는 증언을 했다.
사할린은 온대성 몬순 기후인데, 산간 지대 강설량은 5m 이상이고 강풍을 함께 동반하는 경향이 있다. 산림 지역은 대부분이 침엽수림 지대이다.
1934년 일본 최초의 공룡 화석이 마을에서 발견되었다. 2004년 부분적으로 유지되던 탄광이 결국 폐쇄되었고, 탄광 폐쇄 이전부터 석탄 산업은 축소되었고, 과거 일본 점유 시기에 초등학교가 있을 정도의 마을이었지만 인구가 줄어들고 여성 비율이 많은 곳으로 쇠락했다. 한편, 온천을 포함한 휴양 시설 ‘미네랄나야 보다’에서 휴가뿐만 아니라 각종 행사가 열리기도 한다.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하루 네 번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