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문화·예술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러시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러시아에서 이루어진 정신적, 물질적 성과의 총칭으로서 문화와 예술.

개설

러시아 문화와 예술은 넓은 의미로 살펴보면 오랜 역사 속에서 러시아인이 이루어 놓은 모든 정신적·물질적 성과물을 총칭한다. 러시아의 지리적 환경, 역사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의식주 문화나 문학, 러시아인의 의식 구조와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 여기에서는 러시아의 문화 예술적 분야에 초점을 맞춰 음악, 발레, 영화, 연극 및 극장, 미술, 민속 공예품에 대하여 서술하고 마지막으로 러시아의 명절 및 축제를 첨부하겠다.

음악

1. 19세기 이전

러시아인은 고대부터 노래를 좋아했기 때문에 다양한 민요가 악기 없이 노래 위주로 구전되었다. 17세기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의 영향으로 서구 음악이 러시아에 소개되어 러시아 귀족에게 전파되었다. 특히 이탈리아의 오페라가 인기를 얻었다.

2. 19세기 국민악파

19세기 러시아 음악에서도 작곡자가 자기 민족의 의식을 갖고 민족의 고유한 특색을 음악에 담아낸 국민주의 음악 사조가 등장한다. 음악가들은 이탈리아나 독일 중심의 음악에서 벗어나 러시아의 민화나 서사를 담아내려 노력하였다. 미하일 글린카와 러시아 5인조 그룹이 대표적인 러시아 국민악파이다.

미하일 글린카는 러시아 국민 음악의 아버지라 불린다. 황제를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애국자 이반 수사닌을 소재로 한 오페라 「이반 수사닌, 혹은 황제를 위한 삶」과 푸시킨의 작품을 소재로 한 오페라 「루슬란과 루드밀라」가 미하일 글린카의 대표 작품이다.

1867년 음악 비평가 스타소프가 ‘5인조’라는 명칭을 처음 썼다. 미하일 발라키레프, 알렉산드르 보르딘, 체자리 큐이, 모데스트 무소륵스키,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가 러시아 5인조에 속하는데, 5인조의 음악 작품은 대부분 러시아 문학, 역사, 민요 등을 소재로 하였다.

3. 표트르 차이콥스키

차이콥스키는 한편으로는 국민악파의 계보를 이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 음악의 기법을 받아들여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완성했다. 특히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호두까기 인형」 같은 차이콥스키의 발레 음악은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다. 4번, 5번, 6번 교향곡은 서구적 기법의 정교함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4. 19세기 말~20세기 초

이 시기는 흔히 러시아 음악의 은 시대라 불린다. 다양한 음악가, 작곡가가 세상을 관조하며 자신의 작품 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라흐마니노프와 스트라빈스키가 널리 알려져 있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는 5인조와 차이콥스키의 영향을 받은 러시아 음악의 민족적 전통을 계승한 음악가이다.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1번」, 「피아노 협주곡 2번」, 「피아노 협주곡 3번」이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여 피아니스트, 지휘자로 활동하였다. 비록 러시아를 떠나 생을 마감했지만, 라흐마니노프 음악의 근원은 러시아적 요소를 담보하고 있다.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수제자로 초기에는 국민악파의 영향을 받았으나 곧 프랑스 인상주의파의 영향으로 모더니즘을 추구했다. 그러나 스트라빈스키 역시 곡의 소재는 가장 러시아적이었다. 잘 알려진 발레곡 「불새」와 「페트루시카」, 「봄의 제전」은 모두 러시아 민화나 민담에 기초를 두었다.

5. 현대 대중가요

1917년 혁명 이후 러시아에서는 재즈, 포크송, 클래식 등은 부르주아 음악으로 비판을 받고 사회주의 찬양, 조국애, 스탈린 찬양을 내용으로 하는 군중 가요가 전파되었다.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진 「카튜샤」가 대표적인 군중 가요이다. 스탈린 사후 소비에트 팝이 인기를 누렸는데, 「모스크바 근교의 밤」이 잘 알려져 있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에는 기타를 연주하며 시적인 느낌의 가사를 읊조리는 음유 시인의 노래가 인기를 끌었다. 오쿠드자바와 비소츠키가 특히 유명하다. 1980년대에는 록 음악이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특히 소비에트의 젊은 세대에게 록은 저항과 자유의 상징으로 다가갔다. 고려인 3세 빅토르 초이가 결성한 키노가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록그룹이었고, 「변화를 원한다」, 「혈액형」, 「담배 한 갑」 등이 대표적인 노래이다.

발레

1673년 독일 무용단의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의 발레」 공연에 러시아 황실이 감동을 받고 러시아에도 발레단을 구성하려 지원하였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화 정책과 1738년 안나 여제의 황실 무용 학교 건립에 힘입어 러시아 발레는 급격하게 발전하였다.

발레 루스는 댜길레프가 이끈 러시아 발레단으로 1909년 창립되어 해체될 때까지 세계 곳곳에서 60여 편의 작품을 공연하였다.

마린스키 발레단은 황실 발레 학교의 건립과 함께 역사를 시작하였고 루돌프 누레예프, 나탈리야 마카노바,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같은 권위 있는 러시아 안무가와 무용가를 배출하였다. 지나치게 고전적 전통만을 고수한 탓에 새로운 소재가 부족했고 또 소비에트 정권의 압력으로 많은 무용가가 해외로 망명하였다. 현재 페테르부르크에 있다.

볼쇼이 발레단은 러시아 혁명 이후 모스크바로 수도를 옮겨 빛을 보게 된 후 러시아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발레단으로 성장했다. 리얼리즘에 충실했던 알렉산드르 고르스키의 지도로 무용수 울랴노바와 폴리세츠카야는 해외 공연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964년부터 1995년까지 볼쇼이 발레단은 유리 그리고로비치라는 장인을 만나 세계 정상급 발레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파블로바[1881~1931]는 마린스키 발레단 수석 발레리나로 「백조의 호수」 오데트를 맡아 공연하였다.

나진스키[1889~1950]는 마린스키 발레단 소속이었으나 1911년 마린스키를 떠나 댜길레프 발레단에 합류하였다. 여자 무용수가 압도적으로 주목받던 당시 남성 무용수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렸다. ‘인간 새’라는 별명이 있었다.

울랴노바[1910~1998]는 바가노바의 제자로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 역으로 대중을 사로잡았다. 20세기 중반 최고의 무용수로 손꼽힌다.

영화

1. 러시아 영화의 태동과 혁명 이전 시기의 러시아 영화

1896년 러시아에 영화가 처음 소개되었고, 이후 10여 년간 프랑스 등 서구 영화를 주로 상영했다. 1908년에 이르러서 러시아 최초의 장편 영화 알렉산드르 드란코프의 「스텐카 라진과 공후의 딸」이 제작되었다. 이 시기 대부분 러시아 영화는 문학 작품을 소재로 했거나 애국심을 고취하는 선전 선동 영화였다.

2. 러시아 혁명 직후부터 1920년대의 러시아 영화

러시아 영화는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직후 잠시 침체기를 겪었으나 곧 국가 주도로 극복할 수 있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영화를 대중 계몽과 선전 선동을 위한 강력한 수단으로 규정하고 고스키노를 통해 영화를 관리하고 지원하였다. 뉴스영화부터 시작하여 신경제 정책 도입 이후 상당수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1920년대 중반부터는 러시아 영화사에 남을 신예 감독들이 등장했다. 러시아 영화의 전통을 계승한 프로타자노프는 「아엘리타」[1924]로 널리 알려졌다. 쿨레쇼프나 푸돕킨은 몽타주 기법을 영화에 도입하였다. 쿨레쇼프의 「볼셰비키 나라에서 베스트 씨의 신기한 모험」[1925], 「법대로」[1926]와 푸돕킨의 「어머니」[1926]가 몽타주 기법을 실험한 영화들이다. 러시아 영화의 세계적 거장 예이젠시테인의 「전함 포템킨」[1925], 「파업」[1925]도 몽타주 기법을 살린 영화이다. 1920년대 말에 이르러서는 무성 영화 시대가 막을 내린다.

3. 스탈린 시대의 러시아 영화

1930년대 러시아 영화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노선에 철저하게 복무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경향은 스탈린 집권이 끝나는 1953년 직후까지 계속되었는데, 이 시기는 러시아 영화의 침체기로 볼 수 있다. 아방가르드 예술인들은 탄압받았고, 대중은 학술적이거나 철학적인 영화에 관심을 잃었다.

이데올로기 제약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뮤지컬 코미디 분야의 영화가 대성공을 거두어 알렉산드로프의 「서커스」[1936], 「볼가 볼가」[1938]가 흥행에 성공했다.

군인이나 영웅들의 일화를 소재로 한 영화도 상당수 제작되었다. 바르네트의 「변방 혹은 애국자」[1933], 바실리예프 형제의 「차파예프」 [1934], 페트로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1949] 등이 있다. 예이젠시테인의 「이반 뇌제」는 1940년대에 발표된 영화 중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는 소수의 영화 중 하나이다.

4. 해빙기의 러시아 영화

스탈린 사후 영화계에도 해빙기가 도래하여 일부 검열이 사라지는 등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또한 영화 학교에서 교육받은 젊은 영화인의 등장으로 이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다양한 영화가 등장했다. 전쟁을 애국주의적 시각에서만 바라보던 이전 영화들과 달리 추흐라이의 「병사에 대한 발라드」[1959]와 본다르추크의 「인간의 운명」[1959]은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아픔과 애환을 그리고 있다. 1960년대 「이반의 어린 시절」[1962]로 데뷔한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는 소비에트 사회의 본질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며 러시아 영화사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켰다. 브레즈네프가 집권하자 다시 검열이 강화되었고 영화감독들은 문학 작품이나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아 이데올로기적 감시에서 벗어나려 노력하였다. 타르콥스키의 「안드레이 루블료프」[1964], 「솔라리스」[1973]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콘찰롭스키의 「아샤의 행복, 혹은 사랑은 하였으나 결혼은 하지 않은 아샤 클랴치나의 이야기」는 1967년에 제작되었으나 검열관으로부터 보류 처분을 받고 1987년까지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이데올로기적 억압 속에서 랴자노프와 가이다이의 코미디 영화가 흥행에 성공했다. 1956년 발표된 랴자노프의 「카니발의 밤」은 당시 5,000만 명이 관람했고, 가이다이의 「캅카스의 포로」는 1967년 7,000만의 관객을 동원했다. 가이다이의 「황금손」[1968]과 랴자노프의 「운명의 아이러니 또는 목욕 잘하셨습니까?」[1975]는 지금도 러시아 텔레비전에서 1년에 몇 번씩 방송해 줄 만큼 인기가 있다.

멘쇼프의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1979]가 러시아 영화로는 최초로 할리우드 오스카상을 받았다.

5.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러시아 영화

1982년 브레즈네프가 사망한 후 러시아는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겪으며 그동안 ‘보류’ 상태로 묶여 있던 영화들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1984년에 완성된 아불라제의 「참회」는 스탈린 체제의 숙청을 신랄하게 비판한 작품이었다. 1986년에서 1988년까지 2년 동안 개봉된 영화가 콘찰롭스키의 「아샤의 행복, 혹은 사랑은 하였으나 결혼은 하지 않은 아샤 클랴치나의 이야기」[1966], 무라토바의 「짧은 만남」[1971], 게르만의 「내 친구 이반 랍신」[1984] 등 200여 편에 이른다.

1990년대는 자본의 부족과 불법 비디오 시장의 활성화되어 러시아 영화가 암흑기를 맞는다. 1990년대 말까지 영화 제작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러시아 영화의 극장 점유율은 5~7%에 불과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암흑기에 이르러서야 영화인 내부의 반성과 변화를 위한 시도가 발생했다. 자본주의 산업으로서 영화에 대한 의식 전환과 영화 예술인으로서 사명감 촉구가 함께 맞물려 러시아 영화는 부활을 준비했다.

발라바노프의 「형제」 [1997]가 러시아 영화 산업의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을 했다. 미할코프의 「태양에 지친 사람들」[1994]과 「시베리아의 이발사」[1999]는 영화의 역할과 사명에 대한 기성 감독의 고민과 각성이 반영된 영화이다.

2000년대 이후 텔레비전 자본이 영화에 직접 투자하기 시작하였고, 베크맘베토프의 「나이트워치」[2004]와 그 후편 「데이워치」[2006], 본다르추크의 「9중대」[2005] 등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였다.

연극과 극장

1. 연극

러시아 연극의 기원은 유랑 광대나 중세 광대의 작품을 들 수 있다. 1672년 극장 예술에 관심을 보인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 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연극 공연을 위한 특별한 장소가 생겼다. 모스크바에 있는 밀로슬랍스키의 저택이 러시아 최초의 궁전 극장으로 지정되었다.

러시아 전용 극장의 역사는 서구 유럽 국가보다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다. 18세기 중반에서야 러시아 국립극장이 탄생했다. 그리보예도프, 고골, 오스트롭스키 같은 작가가 좋은 연극 작품이 썼음에도 정부의 검열과 통제는 러시아 연극의 발전을 가로막아 19세기 전반에 걸쳐 러시아 연극은 정체된 상태였다.

1898년 스타니슬랍스키가 네미로비치 단첸코와 함께 모스크바 예술 극장을 설립했다. 스타니슬랍스키는 연기 기법에 대한 연구를 발전시켜 ‘사실적 연기’ 이론으로 연출가로서 명성을 얻었다. 스타니슬랍스키는 모스크바 예술 극장에서 러시아 극작가 체홉의 작품을 연출했다.

스타니슬랍스키의 뒤를 이어 메이에르홀드는 ‘생체 역학적 연기’ 이론을 창안하였다. 메이에르홀드는 불가코프와 마야콥스키의 작품을 주로 연출하였다. 이처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러시아 연극계에는 왕성한 실험 정신으로 예술적 자유를 구가할 수 있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연극을 통해 이데올로기를 전파하려는 목적으로 러시아 연극계에는 다수의 선전 선동 집단이 등장한다. 대표적으로는 그들이 입었던 셔츠에서 기인하여 ‘푸른 셔츠’라 불렸던 집단이 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푸른 셔츠의 풍자극이 스탈린의 분노를 사 1920년대 후반 종말을 맞는다. 많은 연극 종사자가 이와 비슷한 경로를 겪는데, 마야콥스키는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메이에르홀드는 1939년 체포되어 1940년 사형을 당했다.

스탈린 시대는 러시아 연극계에게도 암흑기였다.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잠시 연극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 주바네츠키, 자도르노프 등의 반정부적 풍자가 활기를 찾는 듯하였으나 사회적 혼란과 경제적 위기 속에 러시아 연극은 잠시 길을 잃었다.

2. 극장들

모스크바에는 볼쇼이 극장, 말르이 극장, 모스크바 예술극장, 타간카, 모소베트, 렌콤, 풍자극장, 예르몰로바, 마야콥스키 극장, 소품 극장, 인형극장 등 약 35개의 극장이 존재한다. 페테르부르크에는 볼쇼이 드라마 극장[구 고리키 극장], 알렉산드린스키 극장[구 푸시킨 드라마 극장], 블라디미르스키 거리의 열린 극장[구 렌소베트 극장], 소품 극장 등이 있다.

미술

러시아는 17세기까지 ‘이콘’으로 대표되는 종교 미술이 거의 전부였고, 18세기에서야 서유럽 미술이 유입되었다. 러시아 미술은 서구 미술에 대한 모방의 시기를 걸쳐 19세기 독자적 미술 세계를 구축했다.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특징은 진보적 사실주의 화풍이 정착되었다는 점이다. 1870년 크람스코이, 페로프, 수리코프 등이 이끌었던 이동파는 미술에서 아카데미즘을 배격하고 러시아 민중의 삶을 사실 그대로 표현했다.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로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터키 술탄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는 자포르쥐예 사람들」, 「이반 뇌제와 아들 이반」 등으로 유명한 레핀이 있다. 이동파 작가들은 마몬토프와 트레티야코프의 재정적 지원을 받았다. 트레티야코프는 모스크바에 자신의 이름을 붙인 유명한 미술관을 세웠다.

20세기 초 러시아 예술계에는 젊은 세대가 주도하는 아방가르드라 불리는 모더니즘 경향이 등장한다. 이들은 과거의 사회 비판적인 사실주의에 반발 ‘예술을 위한 예술’을 옹호했다. 브루벨, 세로프 등으로 대표되는 젊은 아방가르드 화가들은 소비에트 혁명 직후까지 자신들의 실험적 예술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으나 1920년대 말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 강령에 밀려 숙청을 당하거나, 망명하거나 체제에 순응하는 길을 겪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미술 분야에서도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선전 선동해 줄 사람들이 필요했는데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이 이 목적에 부합했다. 로드첸코, 리시츠키 같은 러시아 구성주의자들은 당국의 창작 지원 속에 예술가가 사회 건설의 선동자임을 주장하여 자신들의 예술 활동을 국가에 대한 봉사로 보았다.

스탈린 사후 러시아 미술계에도 예술적 창작의 숨통이 트였다. 네이즈베스트니, 카바코프, 쉐마킨과 같은 예술가들이 조심스럽게나마 추상적, 하이퍼리얼리즘적 예술의 형식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중반 러시아 예술계에는 코마르와 멜라미드에 의해 새로운 사조가 등장한다. 사회주의 리얼리즘[Соцреализм]의 앞부분 ‘соц’와 앤디 워홀 등으로 대표되는 서구의 팝 아트(pop-art)의 뒷부분 ‘아트’를 결합하여 ‘소츠아트’라 불린 이 사조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해체를 꾀했던 듯하다. 클레바코프, 모나스트이르스키 등이 대표적 화가이고 이들의 예술적 경향은 이후 러시아의 ‘개념 예술’로 이어졌다.

민속 공예품

러시아 민속 예술은 풍부한 전통과 역사를 자랑한다.

우선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목각품 마트료시카가 있다. 마트료시카는 똑같은 모습의 인형을 점점 작게 만들어 인형 안에 인형을 집어넣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모스크바 동북쪽으로 50㎞쯤에 있는 세르게이 파사드라는 공방 마을에서 주로 제작했던 페트료시카는 머리에 러시아 전통 수건을 쓴 시골 여인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다산과 풍요를 상징한다. 현대에 들어와 인형의 겉모습은 정치인이나 역사적 인물, 민화의 줄거리 등으로 다양해졌다.

팔레흐라는 공방 마을에서 만들어져 이름도 팔레흐가 된, 검은 바탕에 여러 가지 물감과 옻칠을 한 러시아 전통 나무 상자가 있다.

17세기에 니즈니 노브고로드 지역에서 생겨난 러시아 전통 민속 공예품 호홀로마가 있다. 목제 식기나 숟가락 등에 옻칠하고 거기에 검정, 빨강, 황금색으로 칠하여 그림을 그려 넣은 목공예품들이다.

명절 및 축제

신년은 1월 1일이다. 크리스마스는 러시아 정교회가 율리우스력을 쓰기 때문에 크리스마스가 1월 7일이 된다. 신년에서 크리스마스까지 1주일간 산타클로스와 백설 공주, 크리스마스트리로 축제를 즐긴다.

마슬레니차는 부활절 시작 8주 전 1주일이다. 통상적으로 2월 말이나 3월 초에 시작된다. 축제의 이름은 이 주간에 블린과 같은 버터[마슬로]를 사용한 음식을 많이 먹는다는 점에서 유래되었다. 축제는 보통 1주일간 계속되는데 만남의 날, 유희의 날, 미식가의 날, 폭음의 날, 장모의 저녁 모임, 시누이들의 저녁 모임, 작별과 용서의 날로 이어진다.

여성의 날: 3월 8일이다.

파스하[부활절]는 러시아 정교회가 율리우스력을 쓰기 때문에 서방의 부활절과 날짜가 다르다. 부활절은 마슬레니차 이후로 2달 가까이 지속되었던 금식, 금욕, 절제의 고통이 끝나는 날이다. 이날은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식탁을 차리는 것이 러시아인의 오랜 풍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날 상에 꼭 올라가야 하는 음식으로는 부활절 달걀(красное яйцо) 외에도 쿨리치(кулич)라 불리는 원통형 모양의 빵과 부활절의 러시아식 이름을 그대로 따서 파스하라고 불리는 케이크가 있다.

세계 노동자의 날은 5월 1일이다. 노동자의 날은 마욥카라는 봄맞이 나들이 세속 명절과 겹친다.

전승 기념일은 5월 8일이다. 제2차 세계 대전 승리를 기념하는 날로 모스크바 파르크 포베다[승리 공원]에서 퇴역 군인의 행진, 붉은 광장 행진, 꺼지지 않은 불꽃 옆의 의장대 위병 같은 행사가 열린다.

러시아의 날은 6월 12일이다.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지고 러시아 연방이 설립된 1990년 6월 12일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역사가 비교적 역사가 짧은 축제일이다.

이반 쿠팔라는 7월 7일이다. 하지 축제라 불리는데 모닥불 의식과 목욕 의식을 통해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보호하려는 일종의 토속 신앙이 곁들여 있다.

평화와 화해의 날은 11월 7일이다. 소비에트 시절의 혁명 기념일이 평화와 화해의 날로 명칭을 바꾸어 하루를 쉬면서 가족, 이웃 간의 평화를 기념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김성일 외, 『러시아 문화와 예술의 이해』(형설, 2005)
  • 황영삼, 「러시아 축제 문화 속에 나타난 러시아인의 특징」(『슬라브 연구』17-1, 한국외국어대학교 러시아연구소, 2001)
  • 이문영, 「현대 러시아 영화 산업의 변화와 블록버스터」(『러시아 연구』17-2, 서울대학교 러시아연구소, 2007)
  • EURIS(http://www.euri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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