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역사

원어 항목명 История России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러시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988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240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80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613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864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1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7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1년
원어 항목명 История России
정의

키예프 대공국에서 오늘날 러시아 연방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역사 및 러시아 고려인의 역사 개관.

키예프 대공국

러시아는 슬라브족을 중심으로 다민족으로 구성된 국가이다. 러시아 역사는 류리크 왕조 시기, 로마노프 왕조 시기, 소비에트 시기, 현대 자본주의 러시아로 크게 4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고대 러시아 역사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중심으로 형성된 키예프 대공국에서 시작한다. 서기 882년 루스족의 전설적인 지도자 올레그가 키예프를 점령하여 키예프와 노브고로드, 블라디미르 등에 공국을 세우면서 러시아의 고대 역사가 시작되었다. 988년 블라디미르 대공이 동로마 정교회를 수용했다. 야로슬라프 통치기에 키릴 문자를 수용하고 발전시켜 오늘날 러시아어의 근간이 되게 했다. 키예프 대공국은 종교와 문자, 법전을 만들어 고대 국가를 이루었다.

키예프 대공국은 1237년 칭기즈칸의 손자인 킵차크한국의 바투를 지도자로 한 몽골군의 침입을 당했으며 1240년 붕괴하였다. 몽골은 1240년 이후 200년 넘게 러시아 지역을 통치했다. 몽골의 러시아 통치 방식은 초기의 직접 통치에서 후기에 간접 통치로 바뀌었다. 간접 통치 형태는 러시아의 여러 지역에 있는 공국 중에서 힘 있는 공국에 조공 징수권을 위임하여 조공을 징수하는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모스크바 대공국이 대표적인 공국으로 부상했다.

모스크바 대공국

모스크바 대공국은 1147년 유리 돌고루키가 모스크바 강변에 목축으로 된 성을 쌓으면서 시작했다. 이반 1세 때 몽골의 조세 징수권을 대행하면서 대공국으로 성장했다. 드미트리 돈스코이는 1380년 몽골군과 쿨코보 전투에서 일시적으로 승리함으로써 대공으로 인정받았다. 이반 3세는 1472년 오스만 튀르크에 의해 동로마 제국의 황녀 소피아와 결혼하고, 쌍두 독수리를 사용하면서 제3의 로마를 자처했다. 1480년 몽골의 지배를 벗어나 차르[황제]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반 4세는 카잔한국과 아스트라한한국 등을 정복하여 영토를 넓혔다. 이반 4세는 강력한 중앙 집권적인 차르의 권력을 구축하고자 황실령을 설치하고 귀족을 탄압하는 공포 정치를 실시했다. 그러나 귀족과의 대립과 폴란드 등 외부 세력의 침입으로 류리크 왕조는 몰락하고 혼란의 시대로 돌입했다.

제정 러시아

1613년 이반 4세의 처가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 직위를 계승함으로써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되었다. 17세기 말 표트르 대제는 서구화 정책을 추진하면서 유럽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 표트르 대제는 동로마 제국에서 사용하던 임페라토르라는 황제의 칭호를 사용하고, 국호를 러시아 제국으로 표기했다. 표트르 대제는 대북방 정책을 실시하면서 스웨덴과 전쟁을 통해 발트해와 주변 지역에서 지배권을 획득하고 핀란드만 부근 지역을 점령하였다. 표트르 대제는 핀란드만 부근에 자신의 이름을 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여 1713년 수도를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겼다.

1853년 크림 전쟁의 패배로 근대적 개혁의 필요성을 느낀 알렉산드르 2세는 1861년 농노제를 폐지하는 농노 해방령을 내렸다. 1870년대부터 위로부터 산업화로 제정 러시아는 자본주의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러시아의 농촌 공동체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건설을 주장하던 인민주의자들에 의해 알렉산드르 2세는 암살되었고, 알렉산드르 3세 지배하에서 제정 러시아의 전제 정치가 강화되었다.

1904~1905년 러일 전쟁의 패배와 민주적 개혁을 원하는 ‘피의 일요일 사건’이 겹쳐 1905년 혁명이 발생했다. 그 결과 니콜라이 2세는 ’10월 선언‘을 통해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설치하는 입헌 군주제를 실시했다.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러시아는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혼란, 시민의 경제적 고통으로 위기에 처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시민이 빵과 전쟁 중단, 자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농민과 시민, 군인, 자유주의자도 차르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결국 2월 혁명으로 이어져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퇴위하고 임시 정부와 소비에트라는 이중 권력이 생기면서 제정 러시아는 사라졌다.

소비에트연방

러시아 사회민주 노동당[볼셰비키] 지도자인 레닌은 4월 테제를 통해 전쟁 중단과 토지의 국유화, 모든 권력의 소비에트화를 주장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결국 1917년 10월 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하고 소비에트를 선언하면서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권력을 장악한 볼셰비키는 수도를 모스크바로 옮기고 제1차 세계 대전을 중단하고자 했으나 자본주의 국가의 지원을 받은 백군과 내전이 발발하면서 전시 공산주의를 실시했다. 1921년 내전에서 승리한 볼셰비키는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해 자본주의적 요소를 도입한 신경제 정책을 실시했다.

1924년 레닌이 사망하고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은 1928년 제15차 당대회에서 급속한 중공업화와 강제적인 농업 집단화를 핵심으로 한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이를 시행했다.

스탈린은 1939년 8월 독일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했지만, 독일은 1941년 6월 이를 파기하고 전쟁을 일으켰다. 소련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였다. 소련은 레닌그라드의 저항과 스탈린그라드[오늘날 볼고그라드] 전투, 쿠르스크 전투 등에서 많은 희생을 감내하고 승리하여 결국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함락하였다. 이를 기려 소련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을 제2차 대조국 방어 전쟁이라 부른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한 후 전 연방 소련 공산당 서기장으로 등장한 니키타 흐루쇼프는 1956년 스탈린 시기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격하 운동을 벌였다. 또한 미국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 국가와 소련을 필두로 한 사회주의 국가 간의 냉전이 발생하기도 했다.

1964년 농업 정책의 실패를 이유로 실각한 흐루쇼프에 이어 공산당 서기장이 된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사회주의 체제를 안정시키고자 했으나 관료의 노령화, 식료와 생필품의 공급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으며 반체제 운동에 직면하기도 했다.

1985년 서기장이 된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경제 위기를 해결하고, 부패를 척결하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 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동유럽 국가의 민주화 운동, 개혁과 개방 정책의 실패로 1991년 고르바초프는 대통령을 사임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소련]은 해체되었다.

러시아 공화국

1990년 6월 12일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은 러시아 공화국을 선언했다. 그러나 소련의 해체와 민족주의의 대두 등의 사회적 혼란으로 러시아 경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결국 러시아는 1998년 모라토리엄을 선언했다. 2000년에 보리스 옐친에 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블라디미르 푸틴은 ‘강력한 러시아’를 내걸고 경제 개혁과 부패 척결을 내세움으로써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 2008년에 대통령 연임을 2회까지 허용한다는 규정에 따라 푸틴은 총리였던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대통령으로, 자신은 총리가 되었다. 또한 대통령의 임기를 6년으로 헌법을 바꾸었다. 2012년에 다시 대통령이 된 푸틴은 현재까지 대통령직을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 고려인의 역사

1860년 중국과 베이징 조약을 통해 극동의 연해주 지역을 획득한 러시아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반도와 접경하면서 동아시아 영역 국가의 일원이 되었다. 1860년 블라디보스토크시를 건설하고, 1884년 코르프(Корф) 총독을 임명했다.

함경도 주민인 최운보양응범이 1863년 겨울 두만강을 넘어 연해주로 들어가면서 러시아 고려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864년 13가구로 시작한 러시아 한인은 1869년 냉해와 가뭄, 관료의 수탈을 피해 대규모로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해서 지신허를 비롯한 지역에 정착했다. 1884년 이주한 한인은 1884년 조러 수호 통상 조약에 따라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이주 역사가 시작되었다. 러시아 군대에 식량을 제공하고, 블라디보스토크와 핫산의 도로 건설, 포시예트를 비롯한 지역에서 농사로 경제적 여건을 마련한 한인의 수와 거주지가 점차 증대했다.

1905년 을사늑약과 1907년 정미7조약으로 해산된 군대의 의병 운동 등 조선의 독립을 위한 운동이 만주와 연해주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되면서 연해주 지역에 한인이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연해주가 1910년 일본의 강제 병합으로 나라를 잃은 한인의 민족 독립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가 되면서, 이 지역에서 재러 한인의 수는 더욱더 증가했다.

1917년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과 연해주 지역에서 내전 기간에 연해주 한인은 사회주의 혁명과 빨치산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들의 목적은 극동에서 사회주의 건설과 조선의 독립 획득이었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한인은 집단 농장을 건설하는 등 사회주의 건설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1937년 스탈린이 서명한 연해주 한인의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 결정에 따라 1937년 9월부터 17만 2000여 명의 한인이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당했다. 강제 이주의 명목은 일본의 첩자가 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은 1938년부터 집단 농장을 조성하고 벼 재배와 목화 재배 등을 하면서 빠르게 정착했다. 1953년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이동의 자유가 없었지만, 성실히 노력한 결과 200명이 넘는 고려인이 사회주의 최고 훈장인 노동 영웅 훈장을 받았다. 김병화, 황만금, 채정학, 김만삼 등이 노동 영웅 훈장을 받은 대표적 인물이다.

1956년 흐루쇼프 서기장의 결정에 따라 이동의 자유를 얻은 고려인은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 옴스크 등으로 학업을 목적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소련 전역에 퍼져 가기 시작했다. 러시아 남부 볼고그라드 등 흑토 지대로 고본질을 위해 이동하는 고려인도 많았다.

1991년 소련 해체로 고려인은 또 다른 고통을 당하기 시작했다.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소비에트 시민에서 소수 민족으로 전락한 한인은 러시아로 이주하거나 현지 국가에 힘들게 적응해야만 했다. 그래서 러시아 남부 지역과 연해주로 많은 고려인이 이주했다.

그 결과 현재 고려인은 러시아에 20만여 명, 우즈베키스탄 18만여 명, 카자흐스탄 11만 여명, 키르기즈스탄 2만여 명, 우크라이나 3만여 명이 살고 있으며, 그중에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한국으로 일자리를 찾아 들어온 고려인도 4만여 명에 달한다.

고려인은 소련이 해체되면서 정체성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세대가 내려가면서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이 점차 사라지고, 러시아와 우즈베키스탄 등지에서 러시아어를 구사하지만 서로 다른 국가에 살아야만 하는 어려움에 직면해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

참고문헌
  • 김 피오트르 게르노비치, 『재소 한인 이민사-스탈린의 강제 이주』(방상현 옮김, 탐구당, 1993)
  • 존 M. 톰슨, 『20세기 러시아 현대사』(김남섭 옮김, 사회평론, 2004)
  • 니콜라스 랴자놉스키·마크 스타인버그, 『러시아의 역사』(조호연 옮김, 까치, 2011)
  • 니콜라스 르제프스키, 『러시아 문화사 강의-키예프 루시부터 포스트소비에트까지』(최진석 외 옮김, 그린비, 2011)
  • 김호준,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주류성,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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