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고려인 문학 원천으로서의 조명희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CIS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정의

CIS지역에서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명희의 작품과 삶에 관한 이야기.

개설

1928년 소련으로 망명한 『낙동강』의 작가 조명희연해주에서 교사와 작가 생활을 하며 소련에서 고려인 문학의 기틀을 쌓았다. 1937년 스탈린의 숙청으로 처형된 조명희는 1956년 복권된 이후 재조명되면서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고 있다.

조선의 작가, 소련으로 망명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 조명희는 1894년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칠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진천 성공회 설립의 신명학교에서 국민학교 과정을 수료한 후 1910년 중앙고보에 진학했다. 1914년에는 북경사관학교에 입학하려고 가출했으나 평양에서 둘째 형에게 붙잡혀 돌아왔다.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하였다가 투옥되어 몇 개월간 복역하였고, 출옥 후 일본 동경의 동양대학 동양 철학과에 입학하였다.

1920년에는 동경 극예술협회에 참여하였고, 1921년 『김영일의 사』라는 희곡을 발표하였다. 『김영일의 사』는 희곡집으로 동양서원에서 발간되었는데 한국 최초의 창작 희곡집이다. 1923년 생활난으로 인해 대학 졸업을 앞두고 귀국하였다. 이때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였다. 1924년 6월 16일 조명희는 우리나라 최초의 창작 시집인 『봄 잔디밭 위에』을 춘추각에서 발간하였다.

1925년에는 『개벽』지에 「땅속으로」란 단편 소설을 발표하였으며, 1925년 카프 결성 시 회원으로 참가하였다. 1927년엔 『조선지광(朝鮮之光)』에 「낙동강」을 발표하였다. 백악출판사에서 『낙동강』이 소설집으로 출판되었고, 청량사에서 이기영의 『민촌』 소설집과 공동 출판 기념회를 개최하였다. 조명희는 1928년 소련의 블라디보스토크[해삼위]의 신한촌으로 망명하면서 인생 역정이 달라지게 되었다.

소련에서의 조명희

1928년 8월 21일 조명희는 국경을 넘어 소련에 잠입하였다. 그러나 잠입 직후 소련군에 의해 체포되어 감금되었다. 4일이 지난 후에야 의사소통이 가능한 조선인 군인에게 자기의 사정을 글로 써서 보여 주었고, 그것을 본 조선인 군인이 소련인 장교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조명희를 그 집에서 빼내 주었다. 조명희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리 멀지 않은 요양소에 가서 한 달 정도 휴양을 취하며 「짓밟힌 고려」를 집필하였다. 곧이어 1928년 9월에 장편 소설 『붉은 깃발 아래에서』를 탈고하나 발표되지 못한 채 원고는 사라졌다. 조명희는 1929년 가을 푸칠로브카[육성촌]에 정착하여 김정열 물리학 교사의 집에 3년 동안 기거하면서 잠시 푸칠로브카 농민청년학교 교원으로 일하였다.

조명희푸칠로브카에서 황동민의 소개로 황동민의 누이 황명희를 만난다. 황명희는 조명희가 조선에 아내와 아이가 있음을 알고 청혼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조명희는 황명희에게 “국경이 꽉 막히고 다시는 조선 사람들을 볼 수 없으며 조선에서 일본놈들이 박해하는 것을 보기 싫어 조선으로 가지 않겠다.”며 설득하여 황명희와 결혼하였다. 결혼 후 황명희는 황 마리야 이바노브나로 개명하였다.

이 기간 동안 조명희는 상당히 안락하고 정신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하였다. 1931년 이른 봄 푸칠로브카를 떠난 조명희는 아내와 함께 니콜스크-우수리스크[소왕령]에 거주하게 되며 여기서 조명희는 사범전문학교, 벼 재배 전문학교, 당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2년에는 장녀 선아, 1933년에는 장남 미샤가 태어났다. 1935년 봄에는 하바롭스크로 이동하여 작가의 집에 거주하면서 조선사범대학 교수가 되었다. 1937년에는 차남 발로쟈가 태어났다.

조명희는 교편 생활 중에도 시, 수필, 동요, 평론 등의 작품 활동을 지속하였다. 이 중에 신문 『선봉』에 발표된 것은 십여 편에 불과했으나, 많은 미발표 작품들이 여러 회합, 문학 강연, 연구회, 순회 연극, 라디오 등을 경유하여 한인 독자에게 전달되었다. 사범학교 교원 시절, 친선 야회 ‘문학의 밤’ 행사에서 장인덕이란 여학생이 「짓밟힌 고려」를 낭송하자 청년들이 눈물을 흘리며 감격하여 “조명희 선생은 조선의 해방을 위하여 시문학을 무기로 삼고 투쟁하신다.”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적 감화력과 문학적 영향력에 의해 조명희는 소련의 초창기 한인 문학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 조명희

조명희는 1934년 소련 작가동맹이 결성된 때부터 맹원으로 참여, 원동지부에서 활동하면서 소련의 한인 문학을 건설하려 노력하였다. 이 시기의 한인 작가에게는 원동국립출판사의 출판물, 『선봉』의 문예란, 문학예술알마나흐[문예 작품집]인 『로력자의 조국』, 그리고 조선극장 등이 주요 활동 무대였다. 1936~1937년에는 하바롭스크에서 살면서 하바롭스크 지역의 원동작가동맹 조선분과에서 열심히 활동하였다. 조명희는 후배를 키우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후배들의 작품에 대한 엄정한 평가를 내려 수준을 고양시켰다. 특히 조명희가 책임 편집을 맡았던 『로력자의 조국』에 실린 시 비평을 보면, 조명희의 비평 기준이 볼셰비키의 언칙과 양심에 서 있으면서도 형식적 기교와 문장에도 매우 엄격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4·4·5의 창가조로 글자 수를 맞춘 「씨비리아 철도행」에 대한 평에서 “우리 고려 말에는 어음의 고저가 잘 알리지 않으며…… 다른 민족어의 시에서 많이 사용하는 정형률의 운문시를 쓸 수 없고 다만 내용률의 자유시만 쓰게 된다.”라면서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씨비리아 철도행」의 작가 최호림『선봉』지의 편집자로서 자기의 낡은 문학관에 맞지 않는 작가들의 글을 실어주지 않음으로써 전횡을 휘두른 데 반해, 조명희는 『로력자의 조국』을 중심으로 많은 우수한 신인을 배출하였다. 이러한 조명희의 노력에 의해 소련의 고려인 문학은 유명한 한 아나톨리를 비롯하여 강태수, 김중손, 유일룡, 박일 등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1936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연해주 작가대표회의에서는 조명희의 창작의 중요성과 예술적 수준을 강조하고 그 의의를 평가하였다. 조명희가 소련 내 조선인의 사회주의적 문학을 창시하고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창작을 소련 인민들의 사회주의를 위한 노력 쟁에 밀접히 결부시켰다는 것이다. 조명희는 민족 해방의 정감 못지않게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사회 체제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작품 활동을 하였다는 특징을 가진 셈이다.

1937년 조명희는 작가동맹 원동변강지부의 권유로 『두 얼굴의 조각 그림』이라는 제목의 작품집을 원동국립출판사에서 출판하고자 하였다. 자신이 직접 편집한 그 책에는 「낙동강」 등 단편 십여 편과, 미발표 장편 소설 『붉은 깃발 아래에서』, 「짓밟힌 고려」, 「10월의 노래」, 「꼼쏘몰리쓰크시」, 「흑룡강가에서」, 「위대한 중국 인민」, 「조선에 정말 태양이 빛일 때」 등 시 수십 편을 실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당시 정세로 말미암아 작품집은 결국 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1937년 봄부터 조명희는 야심적인 장편 소설을 쓰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만주 빠르찌산들』이다. 그 내용은 홍범도의 의병 투쟁으로부터 시작하여 김일성의 항일 유격대 투쟁에 이르기까지의 조선 빨치산들의 활동을 서사시적 화폭에 담는 것이었다. 이 작업은 매우 빨리 진행되어 8월경에는 원고지 2천 매 정도의 분량을 완성하여 서문만이 남아 있었으나 탈고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조명희의 신변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스탈린 숙청에 희생되다

1937년 9월 어느 날 밤 군복을 입은 세 사람이 와서 조명희를 데려갔고, 이후 조명희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조명희의 매제인 황동민은 조명희의 사망일을 1942년 2월 20일로 적고 있다. 그러나 1989년 11월 3일 하바롭스크시 당국이 발행한 조명희 사망 증명서에는 조명희가 1938년 4월 11일 총살당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조명희의 장녀 조선아는 1938년 9월 하바롭스크 감옥에서 조명희가 총살당했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따라서 조명희의 사망 연도는 1942년이 아니라 1938년이며, 두 자료가 차이를 보이는 만큼 더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그리고 조명희가 총살당한 이유로 스탈린의 정치 노선을 들 수 있겠으나, 이것 역시 추정일 뿐 더 세밀한 자료 발굴과 연구가 필요하다.

1937년도에 조명희는 소설 『만주 빠르찌산들』 집필을 거의 끝내고 있었다. 다만 서론만이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끝낼 시간은 작가에게 없었다. 조선 사람들은 모두 원동에서 떠나가라는 지령이 내렸던 것이다. 어느 날 조명희는 부인에게 말하기를 “아마 떠나가게 되면 여객차의 독실에 우리는 앉아 가게 될 거요!” 하였다. 그러나 조명희는 자기 식구와 함께 객차에도 화물칸에도 앉아 가지 못하였다. 어느 날 밤에 세 명의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조명희를 찾아왔다. 빨리 차비를 하고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마리야 이바노브나가 울기 시작하였을 때 조명희는 “한 사흘 동안 살 비용 돈과 물건을 가지라고 하였으니 사흘 후면 돌아오게 될 것이요. 쏘베트 정권 앞에 나는 아무런 죄도 지지 않았으니 마음을 푹 노시오. 잘 있소!”라고 말하였다.

만약을 생각하여 돈을 가지고 가려 하였을 때 마리야 이와노브나는 호주머니에서 돈을 다만 몇 푼이라도 얻어 보려 하였으나 별로 없어 그때 돈으로 겨우 10루블을 찾았다. 이런 광경을 본 불청객들은 “이런 큰 작가의 집에 돈이 그렇게도 없는가?” 하는 의심 끝에 몹시 놀라워하였다. 조명희는 그 후 종내 돌아오지 않았다.

조명희가 끌려간 이유는 무엇인가? 스탈린의 공포 정치가 절정에 달할 무렵, 원동 연해주에 살던 재러 한인 대부분이 1937년에 실시된 대규모 강제 이주 계획에 따라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 옮기던 시기에 조명희는 정치적 박해를 당했던 것이다. 스탈린은 레닌의 신경제 정책을 폐지하고 농업 집단화 정책을 시행하면서 쿨락 등 전통적인 부농을 없애고 대부분의 농민들을 콜호즈니끼[집단 농장원]로 만들고 당내외의 반대파를 이른바 ‘숙청’했는데, 이 와중에 재러 한인도 많은 탄압을 받았다. 재러 한인들에게 문학적 감화력이 컸던 조명희를 박해한 것은 조명희의 정치적 입지와 별도로 소수 민족 정책[특히 일본과 내통한 한인의 분리]에 따른 집행 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조명희의 유족은 강제 이주령에 따라 우즈베키스탄의 한 한인 콜호즈에 정착하였다.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라 살기가 어려웠으나 황 마리야는 재봉사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장녀 선아는 도서관대학 통신학부를 나왔고 아들 미샤도 다른 도시로 유학하였으며, 발로쟈도 가족과 타슈켄트로 이사 온 후 대학을 나왔다.

1956년 조명희가 복권됨에 따라 조명희의 유족들은 국가 보조금과 연금, 주택 등을 받고 타슈켄트에 정착하였다. 조명희의 아내 황 마리야 이바노브나는 1971년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황 마리야의 묘소는 타슈켄트주 프라우다 콜호즈 공동묘지에 있다. 1984년 10월 당시 장녀 선아는 조 발렌티나 명희노브나라는 러시아 이름으로 우스기프로보드호스 설계소도서관 표준폰드 주임으로 있었으며, 장남 조 미하일 명희예비치는 타스쿠미르 수력발전소 설계 기사장을 역임, 차남 조 블라디미르 명희예비치는 어느 사회주의 국가의 종합수력발전시설 기계화관리국 기사장으로 근무하였다.

복권과 조명희 기념사업

조명희는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의 해빙 정책에 따라 1956년 복권되었다. 1956년 극동군 관구 군법회의는 조명희에 대해 1938년의 사형 선고 판결을 파기하고 무혐의 처리 복권을 시켰다. 조명희가 사망한 지 18년 만의 일이었다.

1956년에 조명희문학유산연구회가 결성되었고, 1959년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 주관으로 소련과학원 동방도서 출판사에서 『조명희 선집』이 출간되었다. 또한 조명희기념실이 타슈켄트의 알리세르 나보이 문학박물관에 설치되었다.

또한 타슈켄트 벡제미르 지역에 조명희거리 명명을 하였으며, 1994년 9월 10일에는 조명희의 고향인 대한민국 진천에서 ‘조명희 탄생 100주년 기념 조명희 문학제’가 열렸고 생가에 표지비가 세워졌다. 또한 청주에서 발행하는 『동양일보』에서 『포석 조명희 전집』의 출간을 하였다. 이후에도 조명희 연구, 논문이나 자료 수집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조명희에 대한 평가와 기념 활동은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매우 활발하다. 이는 전적으로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를 중심으로 한 소련 내 한인 작가들의 노력의 소산이라 할 수 있다.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는 조명희의 복권에 따라 소련에서의 한인 문학을 창시한 조명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결성된 소련작가동맹 내 조직이다. 이 단체는 1956년 결성되어 자료를 모은 끝에 1959년 조명희 탄생 65주년을 기념하여 『조명희 선집』을 펴냈다. 1988년 당시 위원장은 작가 이 차이코프스키이며, 부위원장은 역사학자 황동민으로 위원회 결성 무렵 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 교수로 있었으며 『선집』의 해설을 썼다. 그러나 실제로 소련에서의 조명희의 행적을 조사하고 자료를 모은 사람은 위원회 위원인 어문학 학사 최 예카테리나 미하일로브나이다. 최 예카테리나 미하일로브나는 조명희 문학에 대한 연구와 번역, 미발표작의 발굴과 발표에 힘쓰고 가족 내력까지 조사하였다. 조명희의 소설은 1966년에 최 예카테리나 등의 노력으로 러시아어로 번역되어 『낙동강』이란 제목의 선집으로 출판되었으며, 1977년에는 『새시대 동방문학』이라는 문학 교과서에 넣을 조선 문학 관계 자료로 조명희의 작품이 들어갔다. 1984년 8월 10일에는 조명희 탄생 90주년을 기념하여 『레닌기치』 신문의 「쏘베트 조선 문학의 걸출한 작가-조명희 출생 90주년을 즈음하여」란 제하의 특집 기사에 미발표 작품, 작가 관계 자료, 회상담 등이 게재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조명희는 다음과 같이 평가되었다.

조명희는 현대 조선 문학 창시자의 한 사람으로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문학을 발전시킴에 중심적인 역할을 놀았다. …그의 작품들의 특징은 누구나 헐히 리해할 수 있는 상용어를 쓴 데 있으며 민족성이 뚜렷이 나타나는 문체로 문장을 구성한 데 있다. 이는 당대의 쏘베트 조선 문학 발생의 초기에 큰 역할을 놀았던 것이다. ...... 그의 작품들은 대중을 사회주의 사상으로 교양하는 믿음직한 무기로 되었다.” 즉, 조명희는 소련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서 문학사적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와 소련의 한인 작가들, 『레닌기치』 신문사, 조명희의 유족 등의 노력으로 1988년 12월 10일에 타슈켄트시 알리세르 나보이 국립원고연구소 문학박물관에 조명희 상설전람관이 문을 열었다. 조명희 전람관에는 조명희의 문학 유산 외에도 조명희의 제자인 박일, 강태수의 초상화와 작품,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작가인 우제국, 김두칠, 박 보리스, 김종세 등의 초상화와 작품도 전시되어 있어 소련 고려인 문학의 면모를 어느 정도 개관할 수 있다.

조명희 전람관의 개막식에는 이 지역 한인 작가와 러시아 시인들, 딸 조 발렌티나 명희예브나, 증손자 알료사 등 유족과 마경태 등 제자, 타슈켄트 사범대학 조선어과 교원과 학생 등이 참석하였다. 모임에서는 「짓밟힌 고려」, 「10월의 노래」 등이 낭송되었다.

기념관 개설과 관련하여 최 예카테리나는 『레닌기치』 1988년 10월 27일자 ‘문예페이지’에 『선집』에 수록되지 않은 조명희의 미발표 시 2편과 동요 7편을 실어 주목을 끌었다. 이는 원래 1984년 8월 10일자 『레닌기치』에 실린 황동민의 「작가 조명희의 발표되지 않은 작품들에 대하여」라는 제하의 기사에 딸린 조명희의 미발표작 「아무르를 보고서」, 「공장」, 「어린 두 나무군」, 「샘물」, 「눈싸움」, 「새들의 회의」, 「푸른 편지」에 동요 「소금쟁이」, 「별」을 추가한 것이다. 황동민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1930년에서 1932년 사이에 조명희가 푸칠로브카 농민청년학교에서 학생들에게 학습 자료로 제시한 것을 제자였던 최 예카테리나가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에 보내온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중에서 「아무르를 보고서」, 「공장」, 「어린 두 나무군」, 「샘물」 등은 조명희의 작품이 확실하다. 나머지 작품들에 대해서도 황동민은 “작품들을 주의 깊게 연구하여 보면 그 대부분은 조명희 자신의 작품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그 정확성에 대해서는 아직 의문의 여지가 있다.

2005년 8월 8일 대한민국의 ‘잃어버린 민족문학사를 찾아가는 작가모임’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대학교에 포석 조명희 문학비를 건립하였다.

참고문헌
  • 황동민, 「작가 조명희」(『포석 조명희 선집』,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 소련과학원동방도서출판사, 1959)
  • 「쏘베트 조선 문학의 걸출한 작가–조명희 출생 90주년을 즈음하여」(『레닌기치』, 1984. 8. 10)
  • 최 예카떼리나, 「선생을 회상하면서」(『레닌기치』, 1984. 8. 10)
  • 고송무, 「새로 발견된 조명희 관계 자료」(『한글새소식』210, 한글학회, 1990)
  • 김성수, 「소련에서의 조명희」(『창작과 비평』64, 창비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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