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선봉』과 『레닌기치』, 『고려일보』 속 작가들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CIS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고려인 신문 『선봉』, 『레닌기치』, 『고려일보』를 통해 작품 활동을 한 고려인 작가들.

개설

1923년부터 현재까지 간행되고 있는 고려인 신문 『선봉』, 『레닌기치』, 『고려일보』는 고려인의 삶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고려인 신문들을 통해 많은 고려인 작가들이 소설, 시, 평론 등의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고려인 문학을 계승, 발전시켰다.

고려인 신문의 역사

러시아혁명 이후 러시아 전역을 휩쓸던 내전이 끝나자 연해주의 한인들은 1923년 3월 1일 『삼월일일』이라는 제호의 한글 신문을 발간했다. 『삼월일일』은 3호까지 발간되고 4호부터는 『선봉』으로 제호를 바꾸었다. 『선봉』연해주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한글 신문으로서 한민족 공동체 의식을 형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고려인에 의해 한글로 만들어진 신문이지만 당시 소비에트 공화국이 건설되는 상황에서 한민족의 공동체 의식을 표면적으로 내세우기란 어려웠다. 신문 내용에 있어서도 대부분 사회주의 혁명을 선도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인의 생활과 소식에 대한 내용도 신문 한 면을 차지하고 있어, 고국을 떠나 이국 멀리 살고 있는 고려인의 디아스포라의 아픔을 달래 주었다. 1937년 연해주의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이후 신문도 잠시 정간되었다. 1938년 5월 15일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레닌기치』라는 이름으로 다시 발간되었다.

『레닌기치』연해주에서 이주해 온 고려인들에 의해 한글로 발간되었으며, 처음에는 구역 신문으로 출발하였으나 1955년 공화국 신문이 되었고, 1961년부터는 ‘공화국 간 공동 신문’으로 격상되었다. 『선봉』 신문과 마찬가지로 고려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신문이지만 고려인의 민족 공동체 의식을 표방할 수가 없었다. ‘조국’, ‘고향’, ‘고국’이라는 단어의 뜻은 반드시 소비에트나 콜호즈를 가리켜야 하며, ‘강제 이주’라는 단어나 어려운 생활상을 이야기하여서도 안 되었다. 그러던 것이 1990년대 들어서면서 소련 전역에 불어닥친 개방화, 민주화 바람에 의해 고려인들이 자신의 고향과 조국을 표면적으로 얘기할 수 있게 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해 구시대의 유물이 된 ‘레닌’을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꿀 필요가 생겼다. 신문사 지도부는 1991년 1월 1일부터 신문 제호를 『고려일보』로 바꾸면서 고려인을 위한 신문임을 공식적으로 표방하였다.

『고려일보』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현재도 발행되고 있는 CIS 지역의 대표적인 고려인 신문이다. 1991년 『고려일보』라고 제호가 바뀐 이후 실제로 연해주 콜호즈에서 참혹한 생활상과 강제 이주의 뼈아픈 경험과 같은 그동안 금지되었던 이야기를 다양한 장르를 통해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공화국 신문에서 독립하면서 국가로부터 재정 도움을 받지 못하여 신문사 운영의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소비에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고취시키고 찬양하던 논조에서 벗어나 고려인의 실제 생활을 취재하여 고려인의 삶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게 됨으로써 고려인의 역사적 지위와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고려인 신문의 문예 페이지

『선봉』, 『레닌기치』, 『고려일보』에는 문예 페이지가 독립 섹션으로 되어 있어 당시 작가들의 문학 작품 발표 무대가 되었다. 고려인의 역사가 문예 페이지를 통해 실감나게 독자에게 전달되었다. 독자인 고려인 역시 시나 소설을 통해 이방인의 외로움과 서러움을 달래곤 하였다. 신문 문예 페이지를 통해 상상의 민족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여기를 통해 많은 시인, 소설가, 평론가 등과 같은 문학인이 탄생하였다. 잡지와 같은 다른 출판 매체가 거의 없는 상태에서 이들 신문의 문예 페이지가 고려인 문학인의 유일한 활동 무대였다.

『선봉』의 문예 페이지는 1933년 10월 3일 이후부터 생겨났다. 당시 기사를 보면 “연해주 쏘베트 문사동맹 고려쎅치야회에서 『선봉』 신문에 문예 페-지를 두어 달라는 요구의 결정에 따라 매월 2회 문예 페-지를 발간하기로 한다.”라고 하였다. 이후 문예 페이지는 연해주 고려인들의 작품 활동 무대가 되었다. 문예 페이지 뿐만 아니라 그 이전 신문에 실린 작품의 편수를 보면, 시가 48편, 소설이 2편, 평론이 19편이었다. 시가 압도적으로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평론이 많다. 『선봉』의 문예 페이지는 짧은 역사만큼 그렇게 많은 작품을 싣지 못하였지만 고려인들에게 나라 없는 국민의 서러움을 같이 나눌 수 있는 장(場)을 제공하였다. 『선봉』 신문에서 활동하던 작가가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후에도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계속하여 고려인 문학의 전통성과 연속성을 보증받을 수 있게 되었다.

『레닌기치』는 1958년부터 전체 4면 중 제4면에 ‘문예 페이지’가 개설되었다. 문예 페이지는 아동 문예 페지, 문예란, 토요 문예 등의 이름으로 1면 전체를 차지했다. 이들 중 문예 페지가 압도적으로 가장 많이 발행되었으며, 두 번째가 아동 문예 페지, 그 다음으로 문예란이었다. 간헐적으로 토요 문예가 발행되기도 하였다. 한 달에 한번 정도 문예 페지가 발행되고, 발행 요일은 토요일이 가장 많으며, 그 다음으로 목요일, 금요일 순이다. 문학 장르는 시와 소설이 가장 많다. 상단부에 시가 실리고, 그 옆에 노래 악보와 가사, 하단부에는 소설이 실렸다. 시는 시, 동시, 서사시라는 명칭 순으로 실려 있으며, 산문은 단편, 단편소설, 소품, 중편소설, 실화, 단막극, 동화, 풍자 소설, 이야기라는 명칭 순으로 실렸다. 소품은 1회에 끝날 정도의 분량이고, 단편이나 단편 소설의 경우는 몇 회씩 연재되었다. 장편 소설은 몇 편 되지 않으며, 실화가 1년 정도 연재되기도 하였다. 1962년부터 1990년까지 신문에 실린 소설 총 편수는 250여 편이고, 시는 978편이며, 평론은 120편이었다.

『고려일보』는 1991년부터 『레닌기치』를 이어 문예 페이지가 계속적으로 발행되었으나 작품 편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1990년대 초반에는 시보다 소설이 실린 경우가 드물었으나 후반부터는 그 양상이 달라졌다. 전반적으로 문예 페이지 발행 일수가 줄어들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한글을 해독할 줄 모르는 세대가 점차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신문도 러시아와 한글어가 동시에 발간되었고 러시아어로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표적인 작가로는 양원식, 이정희, 박 미하일, 라브렌티 송 등이 있었다. 1991년부터 2002년까지 신문에 실린 소설 총 편수는 30여 편이고, 시는 200여 편이며, 평론 60여 편이었다.

고려인 신문의 소설가들

『선봉』에서부터 『레닌기치』를 거쳐 『고려일보』에 이르기까지 신문에 발표된 소설 편수는 총 280여 편이었다. 이들 중 번역 소설, 한국 소설, 고전 소설 등을 제외한 현지 고려인에 의해 쓰인 소설 편수는 250여 편이었다. 『선봉』에 실린 소설은 정활의 「광부의 가정」[1935년 4월 18일, 21일, 24일, 29일]과 강태수의 「공청회 조직원」[1937년 5월 12일, 24일] 2편 밖에 없다. 『레닌기치』에 실린 소설은 215편이고 『고려일보』에 실린 소설은 18편이다. 시대별로 다시 살펴보면, 1960년대 79편 중 번역 소설을 제외한 소설은 34편, 1970년대 103편 중 번역 소설을 제외하고 작자 불명인 작품을 제외하고 46편, 1980년대는 35편 중 번역 소설, 작자 불명 작품 제외하고 20편, 1990년대는 29편 중 13편이고 2000년대는 5편이었다. 대부분 몇 회 연재된 단편 소설이나 1회에 끝나는 소품이었지만 1년 이상 연재된 대하 소설도 있었다. 대표적 대하 소설로 김세일『홍범도』와 백한이의 『텐산 산맥』[1995년 4월 15일부터 1996년 2월 24일까지]이 있다. 『레닌기치』 시절 문예 페이지에 실린 소설은 순수 창작과 러시아 문학 작품 번역이 주를 이루었다. 『고려일보』 시절에 와서는 한국 문학 작품을 소개하고, 해외 문학 작품상에 수상된 작품에 대한 지면을 할애하고, 한국 고전 소설을 연재하는 것이 늘어났다. 그리고 실화 소설이라는 논픽션 서사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1920년대 『선봉』 신문부터 시작하여 『레닌기치』, 『고려일보』에 이르기까지 작품 활동을 한 작가들 중 조명희와 전동혁, 김세일, 김중, 조기천, 한 아나톨리 등은 『선봉』 신문 시절 시만 썼고, 『레닌기치』 시절에 와서 소설과 평론을 같이 하였다. 태장춘연성용『선봉』 시절부터 희곡을 중심으로 평론과 시를 같이 하였다. 『선봉』 시절부터 소설을 주로 쓴 작가는 강태수밖에 없었다.

신문 전체를 봤을 때 소설을 가장 많이 쓴 작가는 한진, 김기철, 리정희 등이고, 그 다음으로 한상욱, 전동혁, 조정봉, 강태수, 김광현, 명철, 김준, 성정모, 김빠웰, 남석, 김세일, 김 보리쓰, 강 알렉싼드르, 기운, 아나톨리 김, 김두칠, 김상철, 리 와씰리, 리동수, 미하일 박, 장윤기 등이다. 이들 중 시나 평론이 아닌 소설만 창작한 작가로 한상욱, 리정희, 성정모, 김 보리쓰 등을 들 수 있다.

192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소설 창작 활동을 한 작가는 강태수가 유일하다. 1960년대에만 작품을 발표한 작가는 한상욱이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작품 활동을 한 작가로 리정희, 김광현, 김준, 김남석 등이 있다. 1960년대에서 1980년대를 걸쳐 1990년대까지 작품 활동을 한 작가로 한진, 김기철, 조정봉 등이 있는데, 이들 중 한진은 1960년대에 주로 작품 활동을 하였으며 1990년대 들어서는 1편만 발표 하였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작품 활동을 한 작가는 전동혁, 김두칠, 김세일 등이 있다.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작품 활동을 한 작가는 명철, 김보리쓰 등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작품 활동을 한 작가는 양원식, 박 미하일, 장윤기, 남철 등이다. 이들 중 양원식과 박 미하일, 장윤기 등은 아직 생존해 있으며 2000년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고려인 신문의 시인들

『선봉』에 발표된 시 작품 수는 48편, 『레닌기치』에는 978편, 『고려일보』에는 200여 편이었다. 년도 별로 보면, 1920~1930년대 48편, 1960년대 111편, 1970년대 543편, 1980년대 324편, 1990년대 200편 등 총 1,226편이다. 1970년대에 가장 많이 발표되었으며, 그 다음이 1980년대이다.

1920~30년대 『선봉』 시절 활동한 작가는 김승인, 서재운, 김춘우, 박달분, 자강, 김병욱, 옥평, 김동길, 조동규, 계봉우, 김단, 리평산, 허길헌, 김상선, 심약연, 리재인, 황일 등이 있으며, 『레닌기치』에까지 활동한 작가로는 조명희, 전동혁, 김세일, 김준, 한 아나똘리, 태장춘, 허성록, 김기철, 연성용, 강태수 등이 있다.조명희『선봉』 신문에 조생이라는 필명으로 시를 발표하였다. 이 신문에 있는 조생의 시는 「짓밟힌 고려」[1928. 11. 7], 「볼셰비크의 봄」[1913. 3], 「여자공격대」[1931. 4. 4], 「10월의 노래」[1931. 9], 「맹서하고 나아서자」[1934. 6. 3], 「‘오일’ 시위 운동장에서」[1934. 6. 3]와 산문시 「아우 채옥에게」[1935. 3. 8]와 「까드르여 너의 짐이 크다-조선인사범대학 제1회 졸업생들 앞에」[1935. 6. 30]가 있다. 평론으로는 「아동 문예를 낳자」[1935. 3. 18, 1935. 3. 21]와 「조선의 노래를 개혁하자」[1935. 7. 30]가 있다. 『고려일보』에는 조명희의 시와 소설이 재수록되어 있다. 시 작품으로는 「봄 잔디밭 위에」[1991. 1. 30]와 「인간 초상찬」[1991. 1. 30], 「감격의 회상」[1991. 1. 30] 등이 있고, 소설로 「낙동강」[1994. 8. 20부터]이 있다.

1960년대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시인은 강태수로서 11편, 그 다음 리진 7편, 김종세 5편, 김세일, 김남석, 김창옥, 리은영 등의 4편 등이다.

1970년대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시인은 주영윤으로 38편, 그 다음 강태수 25편, 박현 24편, 로사 17편, 허성록 15편, 리진 15편, 우제국 10편 등이다. 강태수가 여전히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고, 주영윤이 1970년대 새롭게 등장하여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다음으로 박현, 로사, 허성록 등이다. 허성록은 『선봉』 시절부터 활동한 작가인데, 1960년대에는 한 편도 발표하지 않다가 1970년대 들어서면서 작품 활동을 재개하였다. 김세일, 김남석, 리은영 등은 2편, 1편, 4편 정도 발표하는 것에 그치고, 이후 전혀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

1980년대에도 주영윤이 가장 많은 33편의 작품, 강태수 15편, 남철 27편, 리동언 15편, 리진 17편, 무산 17편, 연성용 12편, 우제국 12편, 원일 10편 등이 발표되었다. 1960년대부터 작품 활동을 한 강태수는 여전히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고, 1970년대부터 등장한 주영윤 역시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 밖에 연성용, 우제국, 리동언 등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1980년대에만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한 작가로 남철, 무산을 들 수 있다. 남철은 1970년대 들어와 1편을 발표하면서 작품을 쓰기 시작하다가 1980년대에 와서 가장 많은 작품을 쓰고, 1990년대에는 4편만 발표하고 말아 1980년대 시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무산 역시 남철과 마찬가지여서 1980년대 시인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시인은 박현으로 15편이고, 그 다음이 강태수 12편, 박희진 10편 등이다. 박현은 1970년대 왕성하게 작품을 쓰다가 1980년대에는 6편 정도 쓰는데 그쳤는데 1990년대 들어 다시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3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거의 70여 년을 작품 활동을 한 작가는 강태수가 유일하다. 2002년까지 가장 많은 작품을 발표한 시인은 주영윤으로서 전부 78편을 발표하였다. 그 다음으로 강태수 63편, 리진 48편, 박현 45편, 남철 32편, 우제국 28편 허성록 19편 등이다.

고려인 신문의 평론가들

『선봉』 신문에서부터 『레닌기치』, 『고려일보』에 이르기까지 문학 평론 편수는 200여 편에 이른다. 『선봉』에 19편, 『레닌기치』에 120여 편, 『고려일보』에 60여 편이 실렸다. 연도별로 보면, 1920~1930년대 19편, 1960년대 80여 편, 1970년대 20여 편, 1990년대 60여 편, 2000년에서 2002년까지 2편 실렸다. 1990년대 들어 평론 게재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음을 알 수 있다.

연도별 발표된 평론의 양상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20~1930년대 『선봉』에는 소설평 4편, 시평 1편, 연극평 2편, 문학론 3, 문학 시론(時論) 9편 등 총 19편이 실렸다. 1960년대에는 소설평 19편, 시평 7편, 연극평 25편, 작가론 8편, 문학론 12편, 문학 시론 7편, 기타 3편 등 총 80편이 실렸다. 가장 많이 실린 것이 연극평이었으며, 그 다음 소설평, 문학론 순이었다. 1970년대에는 소설평 4편, 작가론 5편, 문학 시론 2편이 실렸고, 시평과 연극평, 문학론은 없었으며, 기타 9편으로 총 20편이 실렸다. 작가론과 소설평이 주를 이뤘다. 1980년대에는 시평 3편, 작가론 3편, 문학론 6편, 문학 시론 2편이 실렸고, 소설평은 없으며, 기타 6편으로 총 20편이 실렸다. 문학론과 작가론이 주를 이뤘고, 소설평이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소설 창작이 많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1990년대에는 소설평 4편, 시평 8편, 연극평 7편, 작가론 13편, 문학론 2편, 문학 시론 20편, 영화평 및 음악평 6편 등 총 60편이 실렸다. 문학 시론이 가장 많이 실렸다는 것은 고려인 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검토 작업이 이뤄지기 시작하였음을 입증하며, 작가론에 대한 평론이 많아진 사실 또한 고려인 문학이 그 만큼 토대를 이뤘음을 나타낸다. 1990년대 특이할 사항은 영화평 및 음악평이 새롭게 실렸다는 점이다.

장르별 문학 평론 편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소설평 27편, 시평 18편, 연극평 32편, 작가론 29편, 문학론 20편, 문학 시론 31편, 영화평 및 음악평 6편, 기타 18편이었다. 문학 시론과 연극평이 가장 많고, 작가론과 소설평이 그 다음이며, 문학론, 시평 등의 순서로 신문에 실렸다. 희곡이 신문에 발표된 것이 아주 드문데도 연극평이 많다는 것은 당시 고려인 사회에서 연극 공연이 많이 이뤄졌음을 반증하여 준다. 시가 신문에 1,170여편 발표될 정도로 문예 페이지의 주를 이뤘는데도 시에 대한 평론이 적다는 것은 문학적 가치와 의미가 그만큼 많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준다. 문학 시론은 당시 고려인 문학 공동체의 상황을 보여 주는 중요한 준거점이 된다. 문학론은 소비에트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문학 예술 창작 방법론과 고려인 문학 예술의 방향 지침이 되었다. 작가론은 조명희, 이기영, 조기천을 비롯하여 고려인 작가인 강태수, 연성용, 태장춘 등을 대상으로 하였다.

가장 많이 활동한 평론가는 정상진과 정석이다.

정상진은 20여 편, 정석은 19여 편, 리진과 양원식이 12편, 전동혁과 우 블라지미르가 각각 5편씩 발표하였다.

시대별 2편 이상 발표한 평론가의 활동 시기는 다음과 같다.

1960년대에는 정석, 한진, 림하, 강태수, 한 예브게니 등이 있었다. 1960~1970년대는 김세일, 리동언, 김기철, 전동혁 등이 있었다. 1960~1980년대는 김광현, 리상희 등이고, 1960년대에서 1970년대를 거쳐 1990년대까지 이어지는 평론가로 정상진과 우 블라지미르가 있었다. 1980~1990년대는 리진이 있었고, 1990년대는 최 예까쩨리나, 남해연, 강상호, 양원식 등이 있었다.

고려인 신문 속 작가들의 의미

『선봉』, 『레닌기치』, 『고려일보』 문예 페이지의 문학 작품은 고려인 문학의 원형과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이 신문들을 통해 성장한 고려인 작가들은 고려인 문학을 발전시키는 데 큰 기여를 하였으며, 이들에 의해 오늘날 CIS 고려인 문학이 형성되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문헌
  • 이명재 외, 『억압과 망각, 그리고 디아스포라 -구소련권 고려인 문학』(한국문화사, 2004)
  • 장사선·우정권, 『고려인 디아스포라 문학 연구』(월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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