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소련 시기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을 다른 민족에 비해 부유하게 만들어준 비결-고본질

분야 정치·경제·사회/경제·산업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CIS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소비에트 사회주의 사회 최초의 반(半) 합법적 사적 기업농 형태의 임대 경영이자, 오늘날까지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지속되고 있는 특수한 형태의 농엉 경영 방식 이야기.

개설

고본질(固本質) 혹은 고본지는 소련 사회에서 고려인들이 작업반[브리가다]을 구성해 농장과 노동 공급 계약을 맺어 생산량을 공급한 특수한 형태의 농업 경영 방식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최초로 반(半)법적으로 구성된 사적 기업농 형태의 임대 경영이었다. 고려인들을 중심으로 소비에트 사회에서 처음으로 실시되었고 오늘날까지 여러 형태로 지속되고 있다.고본질은 개인적으로 고본[농기구, 자금, 종자 등]을 출자한 참여자[고본자]들이 작업반을 조직한 후 농장과 토지 임대 및 생산 계약을 맺어 실시한다. 이익은 계약에 따라 할당된 생산량을 납품하고 난 생산물을 판매하여 얻었다. 그 수입액은 자신이 투자한 할당 고본에 따라 분배되었다. 여기에 경제적 모티브 원칙이 작동되어 능력껏 이익을 가져갈 수 있다는 장점에 따라 성행하게 되었다.

고본질은 계약에 따라 생산 목표를 세운 만큼 작업반의 수확량은 일반 집단 농장이나 국영 농장 작업반보다 높았다. 그 결과는 연방 전체의 평균 수준보다 한 단계 높은 수준이었다. 고본질은 높은 채산성이 잘 알려졌기에 기업 경영의 독립 채산제를 옹호하던 페레스트로이카 시기에 농촌 경제의 발전 모델로서 연구되었다.

벼농사를 중심으로 과일, 야채 생산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온 농경 민족 한인은 독립적으로 임대차 농업으로 큰 수익을 얻어 성공한 고려인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하였다. 타민족에 비해 부유하게 만든 고본질의 비경과 특성을 알아본다.

고본질의 운영 방식

고본질은 집단 농장의 생산 조직 체계인 작업반의 생산 체계와 운영 방식을 그대로 차용하여 구성하였다. 고본질은 작업반장[브리가지르]을 중심으로 구성된다. 통상 개별 가호가 기초 단위가 되며 대략 6~50호 정도가 모여 소공동체를 이루었다. 따라서 작업반 구성원은 가장을 중심으로 가까운 친척이 모여 구성되며 여기에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지인들이 포함되기도 하였다.

작업반의 활동 시기별 규모 등은 참여 구성원의 참여 시점이나 참여 정도 등에 따라 다르다. 예를 들면 구성원 일부가 직장을 갖고 있거나 자녀 교육 혹은 집안일로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참여 시점이 달라질 수 있다. 그에 따라 참여하는 정도도 다르게 나타난다. 그러나 작업이 집중되는 농번기, 파종과 수확시기 혹은 생산물 판매 시기 등에는 최대의 결과를 얻는데 큰 영향을 주므로 전 구성원이 집중 투입되어 작업을 실시하였다.

모든 대소사는 작업반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작업반장은 토지 임차에서 판매에 이르기까지 영농의 전 과정을 지휘한다. 따라서 작업반장은 고본질 경험이 풍부하고 통솔력이 있어야 한다. 작업반장의 경영 방침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일 때 결속력은 강해진다. 따라서 작업반장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3~4개의 브리가다를 운영하기도 하므로 상당한 부를 축적할 수 있다.

작업반장은 집단 농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 유리한 토지 임차를 성사시켜야 하고 농기계나 농약, 비료를 시의 적절하게 공급받아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농작물에 급수하는 일이다. 시기를 놓칠 경우 한 해 농사를 망칠 수 있으므로 신경 써야 했다. 해당 지역의 당, 정, 경찰, 세무 등 관계 기관과의 안정적인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고본질이 합법화되기 이전에는 그들의 발언, 판단 여하에 따라 고본질의 성패가 좌우되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고본질을 실시하는 기간은 생산 작목과 판매 여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대개 1년 단위로 노동 공급 계약을 맺지만 파종기인 이른 봄에 시작하여 수확한 농산물을 판매하고 귀가할 때까지로 잡을 수 있다. 그런데 오이, 수박, 참외, 양파 등 계절별로 조기 수확한 작물은 계약된 생산량을 납품하고 일찍 판매할 수 있기에 귀가 시기가 앞당겨질 수 있다.

고본자는 주택을 바라지 않으며 그냥 들판의 움막에서 거주하였다. 모든 필요한 물자들[씨앗, 비료. 비닐 등]은 집단 농장의 사용 허가를 받았고, 만일 그렇지 못할 경우 그들 스스로 조달하였다. 모든 필요한 생활 대소사는 개인 돈으로 지불하였다. 게다가 가정생활에 꼭 해야 하는 계획도 자비로 처리하였다. 많은 집단 농장과 국영 농장에서 고본자는 정말로 귀한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고본질의 역사

고본질이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기원은 명확하지 않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 과도한 전시 물자 공출을 이겨 내려 특정 농장에서 고본질이 시도된 사례가 있다. 합법화된 영농 방식이 아니었기에 연고지 주변에서 조심스럽게 소규모로 실시되었다. 경작 작물도 주로 벼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개인 단위로 운용된 것이 아니라 브리가다, 즉 작업반을 구성하여 실시하였다. 집단 농장을 상대로 토지를 임대하고 생산한 후 판매하려면 대외적 협동체의 존재가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고본질은 전쟁 이후 스탈린이 죽고 나서 큰 변화를 맞게 된다. 특별 이주민 신분이었던 고려인들은 그동안 위수 지역에 한정되어 통제 속에 살아야 했다. 그런데 1956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개인 우상화를 금지시키며, 이주민들에게 내려진 특별 이주민 신분을 제거하고 박탈했던 권한을 회복시켜 주었다. 거주지 이전의 자유가 생기면서 고본질 하던 고려인들은 이제 원거리까지 공간을 확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때부터 고본질 활동 공간은 근거리인 중앙아시아 지역을 넘어 러시아 남서부나 우크라이나 등 곡창 지대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원거리 고본질이 활성화되면서 재배 작물도 다양해졌다. 초기의 벼 생산에서 양파, 수박, 오이, 참외 등으로 짧은 기간에 환금할 수 있는 작물이 많이 재배되었다. 고려인 작업반이 경작 작물을 선정할 때 단위 면적 당 수익성이 높은 작물을 선정하고 생산 판매에 유리한 지역으로 원거리 이동을 마다하지 않은 결과였다. 러시아 남서부와 우크라이나 곡창 지대가 주요 원거리 고본질 대상이었다.

고본질이 소비에트 사회에서 성행하게 된 데에는 다음의 두 번에 걸친 콜호즈 대형화[крупление колхозов] 조치가 큰 영향을 주었다. 콜호즈 대형화 조치는 부실 농장을 정리하여 경영효율화를 높이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고려인 농장은 부실 농장을 떠안으면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때 콜호즈 대형화 조치에 피해를 본 고려인들이 본격적으로 고본질에 나서게 되었다.

첫 번째는 1958년 MTS[기계트렉터보급소]가 폐지되어 농촌 콜호즈를 관리하던 정치부의 통제가 느슨해지자 계약에 따른 임차농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는 1969년 콜호즈에 대한 규약이 새롭게 제정되어 어떤 단일 민족 공동체가 다민족 공동체로 통합되는 일이 가능해졌다. 채산성 낮은 타민족 콜호즈가 채산성 높은 고려인 콜호즈로 통합되는 사례가 늘어났다. 빚을 떠안은 콜호즈는 타민족과 농업 경영 방식, 작물 선정 등에서 의견 불일치가 노정되는 등 문제점들이 드러났다. 이에 상당수 고려인은 힘들여 조성한 콜호즈에서 농업 주도권을 회복하거나 재건에 힘쓰느니 차라리 고본질을 떠나는 길을 택했다. 한편 소련의 농업 정책, 특히 브레즈네프 시기 농업 정책은 고본질 활성화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였다. 브레즈네프는 농축산물 매입 가격을 인상하고 상품 내지 농업 기계 가격을 낮춘 농업 정책을 펼쳤다. 고본자들은 고본으로서 농업 기계를 싸게 구입하고 농산물 판매시 이익을 높일 수 있음으로써 혜택을 입었다.

페레스트로이카가 진행되자 합법화됨으로써 고본질은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고르바초프 정부는 경제 단위 개혁을 통해 국가 조달 가격을 인상하고 토지 임대제, 집단 청부제를 합법화하였다. 이미 자본주의적 독립 채산제로 운영되던 고본질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과 부합하였다. 고본질이 합법화되자 과세 대상이 된 고본질 활동은 정부 세부 증액에 큰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고본질이 가져온 농업 생산성 증대를 가시적으로 바라보던 소비에트 사회는 이들의 독립 채산제적 영농 경험을 모범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물론 고본질 현상이 꼭 채산성 높은 고수익으로 직결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 시장 경제로의 체제 개혁에 있어 하나의 기폭제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소련이 붕괴되고 연방 구성 공화국이 독립해 나가면서 고본질 환경은 열악해졌다. 원거리 고본질을 떠나기에는 국가 간 이동에 법적 장애가 높아졌고 관세가 부과됨으로써 생산물 판매를 위한 농산물 이동이 어려워졌다. 게다가 각국이 내건 화폐 정책으로 현금 보유액이 높은 고려인은 상당한 자산상 피해를 입게 되었다. 여기에 물가 상승에 따른 인플레 현상이 극심해지자 자산으로 구입해 놓은 주택 등 물적 재산은 달러화 대비 가격 하락 현상이 심각하였다.

고려인 사회의 유명 브랜드 사업-고본질

고본질은 소비에트 시기부터 현재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다. 고려인 사회 내에서는 하나의 ‘유명 브랜드’ 사업으로 크게 번졌다. 그들 중에는 농업 관련 직업과 생활에 관계있던 사람뿐만이 아니라 엔지니어, 기술자, 조립공, 건축가, 교육자, 경제학자, 언론인, 학자, 학위 소유자 등 타 분야 직업인들도 있었다.

이 같은 현상에 대해 우즈베키스탄의 통계학자 김명길은 “일반적으로 도시와 도시 인구가 성장하는 것은 직업 분야에서 무엇보다도 농촌 인구가 다른 노동 분야로 유출되는 전체적인 움직임을 수반한다. 공화국 내의 한인 사회에서 농촌 주민수 상당수는 도시 생활로 변신한 마을 주민처럼 도시로 이주해 왔지만 기존 하던 농사일을 버리지 않았다. 이같이 생활하는 주민들은 야영지를 돌아다니면서 도시에 거주하는 농업 종사자 계층을 증가시킨다. 도시에는 우즈베키스탄 한인 중 2/3가 거주하는데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며, 그중 상당수가 공화국 외부 지역에서 농사일을 한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이런 의미에서 고본질은 다른 나라의 한인 공동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현상이다.

고본질의 독특성은 계획 경제 하에 작동되었던 자본주의적 요소에 있을 것이다. 고본질을 실시하기로 합의했을 때 임대차 계약을 맺는다는 것은 사회주의 경제 체제에서는 존속할 수 없는 경영 방식이었다. 생산 관리가 사회적, 국가적으로 진행되던 시기에 개인적 독립 경영으로 작동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작물을 언제 심고[파종하고] 언제 마쳐야[수확해야] 하는지는 작업반 스스로가 결정했다. 그 같은 방식은 역사적으로 신경제정책[NEP]이 전개되던 시기, 레닌 생전 소비에트 국가 형성기 내전 극복 일환으로 잠정 실시한 바 있다.

고려인들은 그들이 하찮은 말단이었던 중앙 집중화된 행정 시스템이 갖춰진 대(大) 공기업체에서 나와 그들 자신이 주인인 소규모 개인 사업체인 고본지로 들어갔다. 고려인들은 자유롭게 어디에다, 얼마나 어떤 방법으로 파종할지, 언제 물을 주고 제초할지, 언제 수확할지 그리고 계획량을 초과하여 수확된 농산물을 얼마의 가격으로 누구에게, 어디에서 팔지 등에 대한 결정을 그들 스스로가 내리는 기업체 쪽으로 나온 것이다.

고본질은 재배한 작물을 시장에 출하하고 판매하여 이익을 얻는 과정이 시장 경제 접근 방식과 일치하였다. 가격 책정은 시장 환경에 맡겼다. 국가가 공급 가격을 정하는 방식이 아니라 시장 내 수급 상황을 고려하여 이익 적정선에서 가격을 책정했던 것이다. 이는 자유로운 소작자인 고본자가 스스로 직접 경제 활동의 주체로 존재함을 보여 준 것이다.

고려인들이 고본질에 나선 이유

고본질을 현대적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새로운 비즈니스 형태를 연 것이나 다름없었다. 따라서 고려인들은 자신의 전유물과 같은 업종에서 다른 비즈니스 업종으로 이동함에 있어 거리낌이 없음을 관찰할 수 있다. 왜 고려인들은 고본질에서 나가기 시작했을까?

첫째, 새로운 형태의 비즈니스는 고본질의 수입보다 낮지 않았으나 다른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고본질보다 우수했다.

둘째, 다른 여러 가지 새로운 비즈니스들은 고본질과 비교하여 더 유동성이 있었다. 고본질에서 경제적 대가는 수확한 농산물을 처리한 후에만 확실시되었다. 사업의 실패나 상황을 변화시키는 것도 고본자는 일 년 후에나 아니면 다음 철에 가서야 할 수 있었다. 다른 형태의 많은 비즈니스에서 이익 증대나 비즈니스 전략을 변경시키는 것은 계절적 영향이 따르는 토지 조건에서와는 다르게 제한이 없었다.

셋째, 새로운 형태의 비즈니스들은 밭 경작처럼 일이 많지도 않았고, 항상 육체노동을 해야 하는 일도 아니었다. 그 밖에도 그 비즈니스들은 상업일 경우 해외에 나갈 기회를 주었고, 자신의 전공을 비즈니스에서 응용할 수 있었다.

넷째, 중앙아시아 같은 농업 지역에서 고본질은 농사일 노동과 같이 사회적으로 그리고 고려인들 사이에서 더 이상 위력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공기업에서 근무하는 고려인들이 그들과 같은 민족의 임차인을 “고본자”라고 부르지 않고 높임 형태의 ‘고본자슈닉[고본지 하는 분]’이나 ‘양파자슈닉[양파 고분지 하는 분]’이라고 부른 것은 그냥 우연이 아니었다. 그 응축된 의미는 농업 육체노동과 유랑 생활에 대한 멸시가 배어 있고 낮은 수준의 고본자 정신세계와 가정교육과 예의범절 등의 부재를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래서 양파나 수박 밭에서 일하는 것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제대로 돈 벌 수 있는 방법이 나타나면 고려인들은 과거의 생활과 이별하는 것을 유감으로 여기지 않았다.

소비에트 시대 고본질 허가장을 받은 고려인들은 사회적 낮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고본지에서 일하며 이 업종을 버리려 하지 않았다. 자신의 전공 영역에서보다도 더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농사일에서보다 더 많은 돈벌이를 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열리자마자 고려인들은 그 기회를 이용하려 노력했다. 그것이 본인의 전공 분야와 일치하는 경우에는 지체함이 없었다.

고본질에 대한 역사적 평가

고본질은 “리스크가 따르는 농업 분야가 아니다.”라고 알려졌다. 고본자는 집단 농장에서 버려진 토지를 임대해, 우수 집단 농장의 수확량보다 몇 배나 높은 양의 수확을 거뒀다. 고본자는 불가능하다던 농작물 재배법에 반박하며 혁신과 기술 개발로 이를 극복했다. 그럼에도 물론 고본질이 꼭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이 상당한 수입을 올리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윤을 남기지 못하고 실패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고려인들은 “불터졌다.” 내지 “불토질했다.”라고 하였다.

고본질은 국유화된 전체주의적인 소비에트 경제의 틀 안에서 경제적 자유와 독립 그리고 시장 경제 시스템을 농업 경제 분야에 내디딘 최초의 시도였다는 역사적 평가를 받는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고려인들이 소비에트 경제에서 경제 근대화의 동기를 부여해 주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 백태현·이 애리아,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고본질」(『비교문화연구』6-1, 서울대학교 비교문화연구소, 2000)
  • 심헌용·한 발레리, 『중앙아시아의 코리안 에트노스-어제와 오늘』(이매진, 2013)
  • Ли Герон, 『고본지(ГОБОНДИ). Записки наблюдателя о любви корейцев к земле』(Бишкек, 2000)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