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사할린 한인들은 왜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할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러시아 사할린주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러시아 사회에 정착한 상이한 역사의 두 한인 집단을 구분하지 못하고 러시아에서 고려인으로 통칭하면서 생겨난 현상.

개설

150년의 이주 역사를 지닌 고려인과 70년의 역사인 사할린 한인은 그 정착 과정에서도 역사가 다르다. 특히 사할린 한인들이 소련 사회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고려인들은 이들을 통제하고, 교육하고, 감시하는 위치에 있었다. 이러한 경험들로 인하여 사할린 한인은 고려인이라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

러시아어 ‘카레이츠’를 고려인으로 주로 번역한다. 이는 150년의 러시아 이주 역사를 지닌 사람들이 스스로 “고려 사람”으로 부르는 데서 기인한다. 하지만 사할린 한인의 경우 과거 일본령이었던 남사할린에 이주 또는 강제 동원되었다가 소련 사회로 편입된 사람들이다. 따라서 대부분 남한 출신인 사할린 한인들은 한반도로부터 분리된 소련 사회에 정착한 동포로서의 정체성보다는 고향인 남한으로의 귀환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그리고 사할린 한인들이 소련 사회에 편입되는 과정에서 고려인은 사할린 한인들의 귀환 요구를 누르고 정착시키려는 입장이었다. 이런 과정에서 형성된 의식들은 스스로를 한인으로 표현하며 이미 한 세대 이상을 거쳐 소련 사회에 정착한 고려인과는 구분되는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경향을 나타냈다. 러시아 사회로 정착의 역사가 상이한 두 집단을 구분하여 이해하는 것은 필요하다. 두 집단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그 집단들에 대한 존중의 첫 걸음이다. 그렇지만 1세대 혹은 2세대까지 경험했던 이 구분은 대부분 러시아어를 사용하게 되는 3세가 되면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다 같은 카레이츠들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다 같은 재외 동포들이다.

카레이츠 번역하기

사할린 한인들은 왜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할까?

답은 이미 질문에 있다. 사할린 ‘한인’들은 스스로를 ‘고려인’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인’이란 누구인가? 우리는 흔히 구 소련 지역의 동포들을 부를 때 “카레이스키(корейский)”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는 형용사이며, 정확하게는 ‘카레이츠(корейцы)’, 여성은 ‘카레얀카(Кореянка)’이다. 이 카레이츠를 한국에서는 일반적으로 고려인으로 번역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서는 주로 ‘고려 사람(Корё-сарам)’이라는 용어를 더 많이 쓰고 있다.

카레이츠를 고려인, 고려 사람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914년 한인의 러시아 이주 50년 기념행사 등을 즈음한 시기였지만, 1988년 6월 전소 고려인 협회가 결성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카레이츠는 북조선 사람도 아니고 남한 사람도 아닌 소련 사람이고 러시아어가 주 언어이며, 문화 역시 소련, 중앙아시아와 혼합된 독자적인 성격이 있으니 ‘고려인’ 또는 ‘고려 사람’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조선인, 혹은 한인이란 단어를 선택할 경우 남과 북 어느 한쪽을 지지한다는 오해를 피하고자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결국 고려인, 고려 사람이라는 호칭은 한반도의 분단이 낳은 특수한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사할린 지역의 카레이츠는 스스로를 ‘한인’으로 부르고 있다. 즉, 사할린의 카레이츠는 스스로 고려인들과 구분하기를 선호한다. 단적으로 고려인은 러시아 이주 역사가 150년에 이르고 있지만, 사할린 한인의 러시아 편입은 이제 70년 정도에 불과하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구 소련으로 편입되는 역사적 경로와 편입 이후의 경험들, 그리고 양 집단이 서로 다른 입장에서 사할린에서 만나게 된 것에 있다. 그리고 함경도 출신이 많은 고려인과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출신이 압도적인 사할린 한인 간의 문화적 차이와 특정 지방에 대한 선입견 등으로 고려인이라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이주 과정

1860년 제정 러시아는 청나라와 베이징 조약을 통해 우수리강 동쪽인 연해주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조선과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1864년 함경도 지방 무산의 최운보와 경흥의 양응범이 이끄는 14가구 65명의 조선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령 남우수리스크 지역에 거주를 목적으로 촌락[지신허]을 만들었다. 이때를 고려인 이주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동시에 이 사건이 바로 한인 동포들의 해외 이주 기원이 되었다. 이후 연해주 지역으로 이주는 꾸준히 증가하였고, 러일 전쟁 직후에 극동 지역에는 약 3만 명이 거주하였다. 그리고 강제 이주 전까지 ‘조선인 사범 대학’, 고려극장 등으로 이주 사회가 안정적으로 형성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1937년의 강제 이주 조치는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을 구분짓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스탈린 집권 시기의 소련에서는 국경 지역에서 소수 민족들의 강제 이주가 빈번히 진행되었다. 1935년 소련 서북부 국경 지방의 핀란드인들이 핀란드와의 전쟁 때문에 강제 이주되었다.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의 폴란드와 독일인도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었고, 그다음 고려인에 대한 강제 이주가 실행되었다.

1937년 9월부터 1938년 1월까지 36,442가구 171,781명의 고려인들이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집단 이주되었고, 우즈베크 공화국으로 이주된 고려인들 중 일부는 키르기스 및 타지크 공화국으로 이주되었다. 이때 북사할린에서는 총인원수 1,155명 295세대가 강제 이주당했다. 이로써 대다수 소련 고려인들의 생활 거주지는 더 이상 극동 지역이 아니라 중앙아시아, 특히 카자흐 공화국과 우즈베크 공화국 지역이 되었다. 이후 극동 지역에서 한반도 출신자들이 다시 등장한 건 1945년 8월 일본령이었던 남사할린을 소련이 점령, 봉쇄하면서부터이다.

한편, 초기 사할린으로 조선인들의 유입은 고려인들의 경로와 유사하다. 즉, 연해주 지역을 거쳐 섬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러일 전쟁 이후 남사할린은 일본령이 되었고, 일본은 러시아 혁명기의 혼란을 틈타 1920년 북사할린까지 진출하였다가 1925년 철수를 한다. 이시기에 북사할린에는 기존의 조선인들뿐만 아니라 일본 진출 시 함께 왔던 조선인들도 있었는가 하면, 남사할린에는 일본의 사할린 개발과 탄광 모집 등에 일자리를 찾아온 이주가 혼재되어 있었다.

남사할린에서는 1940년대부터 폭발적으로 조선인의 수가 증가했다. 전시 강제 동원에 따른 것이다. 1937년 6,000명이었던 조선인들이 1940년이 되면 16,000여 명으로 배 이상 증가했다. 1930년대의 꾸준한 증가는 일본의 정책에 따른 결과이다. 일본은 독신 노동자의 가족을 불러 정주율을 높이고, 친지나 동향의 친구들을 유인하는 연고 모집을 장려했다. 이렇듯 사할린 한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과 전시 강제 동원의 계획적 이주로 고려인들이 가난과 기근을 피해 땅을 일구고 정착하기 시작한 이주와는 성격이 달랐다. 이는 이후 소련 사회로의 편입보다는 귀환을 희망하는 원인이었고, 소련 사회로 편입을 위해 사할린으로 왔던 고려인들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는 이유이다.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정착과 소련 사회로의 동화

어떻게 보면 1937년 강제 이주를 통해 새로운 정착지에 도착한 고려인과 1946년 소련이라는 국가로 편입된 한인들은 낮선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공통점을 지녔다. 그리고 스탈린 사망까지 적성 민족으로서 거주 이전이 자유롭지 못했던 신분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두 집단은 정착의 과정에서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인다.

1941년 독일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고려인들은 참전과 후방 지원으로 승전에 기여를 했다. 일본의 스파이 혐의로 적성민족이라는 꼬리표가 붙은 고려인들은 원칙적으로는 현역 군입대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나 성을 바꾸거나 문서 위조를 하는 등 편법으로 입대하여 전선으로 향했다. 여성들도 의사, 간호사, 문화 활동가, 노동자 신분으로 전쟁에 참여했다.

참전을 못하는 고려인들은 후방 지원에 적극적으로 응했다. 카자흐스탄에서는 3일 만에 35만 루블 이상의 현금과 10만 5000루블 상당의 채권이 기부됐고, 쌀 약 98톤과 18,000가지의 생필품이 지원됐다. 우즈베키스탄 및 다른 공화국에서는 담요, 재킷, 코트, 모자, 스카프, 장갑, 양말 등을 전장에 보냈다. 농장 트랙터 기사 파벨 임은 자신의 사비 30만 3000루블을 전투기 생산을 위한 국방 기금으로 기부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정치적 신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참여로 1,000명 이상의 고려인이 ‘1941~1945년 대조국 수호 전쟁 용감한 노동’ 메달을 받았다.

한편, 고려인들은 강제 이주 이후 대부분 집단 농장과 국영 농장에 배치되었는데, 항상 생산량을 초과 달성하여 점차적으로 소련 내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간주되었다. 주로 벼농사와 면화 농사에 치중한 고려인들의 집단 농장은 전국적인 명성을 얻기도 하였으며 ‘사회주의 노동 영웅’으로 훈장을 받은 고려인들도 209명에 이른다.

이들의 농업 실력은 중앙아시아에 머물지 않고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지역에까지 확대되었다. ‘고분질’은 고려인의 농사일을 일컫는 말인데, 친지 등으로 구성된 농사팀이 집단 농장을 임차하여 집단 농장에 할당된 생산량의 초과분을 시장에 내다팔아 수익을 내는 구조이다. 대체로 국가 계획량 보다 2~3배 많았다[아주 예외적인 경우, 한 작업조가 계획량을 700~800% 달성하는 일도 있었다]. 고려인들은 (임차, 생산, 유통을 포함하는) ‘고본지’ 방식으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일만 열심히 한다면 한여름 동안 5,000루블을 벌 수 있었다[5,000루블은 당시 대학 교수의 1년 연봉에 맞먹는 액수였다].

이와 같이 고려인들은 새로운 정착지에서 적극적으로 소련 사회에 적응한다. 초기 이주로부터 이미 한 세대가 지났고, 러시아어를 주로 사용하게 되었다. 고려인들은 스탈린 사후 거주 이전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일부 정치적 복권도 실행되었다. 즉, 소련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 확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탁월한 농업 기술과 시스템으로 러시아 곳곳을 누비며 인정받는 집단이 되었다.

사할린 한인의 소련 사회 편입

사할린 한인은 달랐다. 고려인들이 소련의 대조국 수호 전쟁에 참전과 후방 지원에 적극적으로 임할 그 시기에 한인들은 대거 남사할린으로 동원되었다. 전쟁에 동원되어 노동력을 제공한 것은 같았지만 고려인은 소련의 승리를 위한 능동적인 참여였고, 사할린 한인은 일제의 강제 동원에 이끌려 온 이들이었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강제 동원으로 사할린에 왔던 것도 모자라 자신의 의사와는 무관한 소련이라는 또다른 사회를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남사할린은 소련과 일본이 직접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일본 천황의 항복 라디오 방송에도 불구하고 남사할린에서는 진격하는 소련군과 퇴각하는 일본군, 그리고 피난 가는 민간인들 사이에서 끔직한 전쟁 범죄들이 벌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인들은 봇짐을 풀지 못한 채 귀환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해방 직후 사할린 한인들에게 사할린이란 떠나야할 곳이었다.

사할린의 상황은 사할린 한인들이 원하는 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1946년 소련은 남사할린을 접수할 체계를 갖추었고, 거주 등록을 받기 시작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1945년 겨울과 1946년 초에 일부 한인들은 개별적으로 귀환을 요청하는 청원과 편지를 지방과 중앙에 과감하게 발송했다. 임시직 노동 현장에 머물며 하루하루 버티는 이들을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관심을 귀향에 집중하고 있었다. 여기에 머물지 않고 한인들 가운데 일부는 집회를 열어 귀환요구를 하기도 했고, 1946년 일본인들의 귀환이 시작되자 이 틈에 섞여 사할린을 빠져나가려 했다.

한편, 일본인들의 귀환으로 노동력의 공백이 생기자 이를 메우기 위해 북한에서 1946~1949년 38선 이북 지역 파견 노동자 26,065명[동반 가족 5,174명 포함]을 고용하였다. 이렇게 형성된 4만여 명의 한인들은 러시아 말을 몰랐다. 사할린 한인들을 소련 사회에 적응시키고, 관리하기 위한 인력이 필요했다. 소련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을 파견했다.

1946~52년 사이에 소련 교육을 받고 엘리트층에 속한 공산당원 약 2,000명이 선발되어 ‘지역 한민족 그룹의 보강 작업’이란 명목 하에 사할린으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소련 본토로부터 45만 명이나 되는 공장 노동자, 탄광 노동자, 전문 기술자 등이 이주했는데, 그들 가운데 중앙아시아 고려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따라 고려인들은 사할린 사회 전반에 퍼져 있었다. 1946년부터 개교한 조선 학교에는 선생님으로 근무하였고, 집단 농장이나 협동조합에서 정치·문화 교육 담당자로 일했다. 2,000명 이상의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는 선전 당원이 있었고, 한인들의 동향을 감시하기 위한 비밀경찰들도 있었다. 그리고 사할린 주정부 내 소수 민족 담당자도 고려인이었다.

소련의 사할린 점령 초기 정책은 강압적이었다. 새로 온 러시아인 관리들은 한인의 점령자였다. 즉, 일본인 대신 새 주인이 된 러시아인 관리들은 급여 지급 보류를 일삼았고 농업 기구 및 재산을 몰수하기도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부 러시아인은 일본인 및 한인을 조롱하거나 매질하였다. 그리고 떠나려는 자와 붙잡는 자,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만나게 된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 간에는 감정의 골이 생기게 되었다. 특히 1946년 거주 등록과 함께 무국적자 신분이 되자 신분 격차에 따른 반감은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무국적자들은 허가 없이는 등록된 거주지 외로 이동할 수 없었다. 집단 농장 등에 가입하거나 직업을 갖는 데도 제한이 따랐고, 은행 대출도 불가능했다.

더욱이 어렵게 구한 직장에서도 사할린 한인들은 차별을 당했다. 보통 직장인들의 급여에 절반밖에 못 받았고, 휴가 또한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다. 예컨대 5년의 노동 경력을 가진 북한 파견 노동자와 고려인들은 월 2,000루블을 받았는데 사할린 한인은 월 1,000루블밖에 못 받았다. 파견 노동자와 고려인들의 유급 휴가 기간은 연 24~36일이었던 반해 사할린 한인의 휴가 기간은 연 12~18일, 지도급 인사 휴가 기간은 각각 48~60일과 24~30일이었다.

“우리가 불순분자. 우리는 교양 대상이에요.”

고려인이 어떻게 사할린 한인을 취급했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할린 한인들의 최대 관심사인 귀환은 정치적인 것과는 무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소련의 입장에서는 정치적으로 해석하였다. 대부분 남한 출신인 사할린 한인들의 귀환은 1948년 이후부터는 남한으로의 귀국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회주의 조국을 등지고 그 이유야 어떻든 간에 남한으로의 귀환을 희망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상당한 의심을 받게 되었고, 이들을 관리하는 고려인들과의 긴장 관계는 불가피했다. 왜냐하면 고려인들도 적성 민족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의 세계관은 상당히 친공산주의적이고 대체로 친소비에트적인 경향을 보였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함경도 사투리와 이북식 말투가 갖는 언어 등 문화의 차이도 이질감을 갖게 하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일제 식민 지배의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한인들의 일본어 사용에 대해 비판하고 조롱받게 되자 고려인들에 대한 서운한 감정이 커졌을 것이다. 사할린 한인들은 고려인을 ‘큰땅배기’로 불렀다. 사할린에서는 적어도 자신들이 선주민이었는데 나중에 들어온 ‘큰땅배기’들이 오히려 자신들을 억압하는 경험을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소련의 남사할린 점령 초기에 겪은 경험들로 인하여 사할린 한인들은 러시아어를 쓰고 있다는 이유로 똑같이 자신들을 고려인이라 부르거나 고려인과 동일시하는 것에 찬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고려인에 대한 사할린 한인의 감정은 과거의 일이 되고 있다. 즉, 1세들이 겪었던 일에서 생긴 감정이 특정 집단에 대한 고정 관념일지언정, 혐오의 대상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러시아어를 쓰고 있는 3세부터는 이런 감정은 찾기 힘들다.

고려인이든 사할린 한인이든 러시아에서는 다 같이 카레이츠일 뿐이다. 한국에서는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역사적 정체성이 다르다는 이유로 구분지어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러시아 사회로 정착한 두 개의 동포 집단에 대한 상이한 역사에 따른 구분일 뿐이다. 우리에게 이들은 모두 일제 식민지의 경험과 남북 분단의 아픔을 함께 해온 재외 동포들이기 때문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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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동현, 「1945~1950년 재북 소련계 조선인의 활동과 성격」(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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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드레이 란코프, 「소련 한인들은 어떻게 ‘양파 밭의 제왕’이 되었나」(『RUSSIA 포커스』, 2013. 10. 11)
  • 안드레이 란코프, 「바람직한 아시아인들…… 한인들은 어떻게 러시아 극동에 정착했나」(『RUSSIA 포커스』, 2017. 5. 1)
  • 안드레이 란코프, 「사할린과 중앙아시아 한인들은 왜 서로 싫어할까?」(『RUSSIA 포커스』, 2017.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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