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아시아의 피카소, 강제 이주의 비극을 화폭에 담다-신순남의 「레퀴엠」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CIS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러시아 연해주 출생으로 우즈베키스탄에서 활동하며 강제 이주의 비극을 다룬 「레퀴엠」을 통해 ‘아시아의 피카소’라는 호칭을 받은 고려인 화가.

개설

‘아시아의 피카소’로 불리는 신순남은 자신이 경험한 1937년 강제 이주의 비극을 화폭에 담았다. 신순남의 「레퀴엠」 연작은 고려인의 비극을 통해 고려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구하는 작품이다.

‘아시아의 피카소’ 신순남의 강제 이주 경험

‘아시아의 피카소’로 불리는 신순남(申順南)[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신(Николай Сергеевич Шин)]은 1928년 연해주 올가 지구 나홋카 인근 타우딤 마을에서 태어났다. 신순남의 부모는 함경도에서 건너왔다. 아버지는 신순남이 네 살 때 사망하였고, 이듬해 어머니마저 재가하면서 신순남은 할머니 밑에서 자라났다.

신순남이 아홉 살이 되던 해인 1937년 러시아 중심주의를 표방한 스탈린 체제는 차등적 민족 분류 작업을 통해 고려인들을 적성 민족으로 분류하고 민족 분규를 막는다는 미명하에 중앙아시아의 각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신순남도 소수 민족 탄압 정책으로 가족들과 함께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신순남의 가족들은 옷가지와 얼마 만의 식량을 챙기고 군용 트럭에 실려 타우딤에서 10㎞ 정도 떨어진 수찬[지금의 파르티잔스크]역으로 실려 갔다. 기차는 소나 말을 태우는 화물차였다. 화물칸 한편에는 어른들이 만든 2층 침대가 놓였고, 가운데는 페치카[무연탄 난로]가 있었다. 할머니, 고모, 삼촌 둘, 숙모, 조카, 여동생 등 신순남의 가족은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의 비좁은 화물차 한편에 실려 한 달 이상을 어딘가로 향해 가야만 했다. 열차는 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하바롭스크-비로비잔-치타-이르쿠츠크-크라스노야르스크-노보시비르스크-바르나울-룹초프스크-세미팔라틴스크-알마티-침켄트-타슈켄트에 이르는 엄청난 여정이었다. 이들은 열차가 어느 역에 도착하는지 알 수 없었고 기차가 가는 대로 짐승처럼 끌려가야만 했다. 동토 시베리아의 추위는 엄습했고, 기차 안의 위생 상태는 매우 불량하여 많은 사람들이 병에 걸렸다. 이 칸, 저 칸의 화물차에서 사람들이 죽어 시체를 묻지도 못하고 수집소에 쌓아 놓았다.

화물차의 모든 문은 닫혀 있어 안쪽뿐만 아니라 밖에서도 사람이 실려 있는지 모를 만큼 당국은 한인 이주를 철저하게 비밀로 위장하였고, 칸마다 KGB[소련 비밀경찰]가 삼엄하게 경비하였다. 기차는 몇날 며칠 이름 모를 허허벌판을 달렸고, 한인들은 우즈베크인들이 사는 집단 농장에 수용되었다. 대부분의 이주민들은 주로 농장 부속 건물[마구간, 외양간, 돼지우리]에서 생활을 하였는데 난로가 없고, 지붕조차 제대로 방한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추위와 참을 수 없는 굶주림, 전염병으로 어린 아이들이 죽어 나갔다. 특히 고려인 중에 토굴집을 파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활 조건과 위생 상태는 매우 불량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지역으로부터 도망을 시도했으나 경찰차가 돌며 도망치는 사람들을 잡아 들였다.

이곳에는 고려인들의 주식인 쌀은 물론 간장, 된장도 전혀 구할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우즈베키스탄 사람들이 먹는 보리빵을 구해 끼니를 때웠다. 이처럼 기후와 토양이 다른데다 갑자기 한식이 아닌 빵으로 연명하다 보니 많은 고려인들이 영양실조에 걸렸고, 위장병과 간장병에 시달렸지만 약이 없어 치료조차 받지 못했다. 신순남은 그나마 삼촌의 도움으로 쌀을 조금씩 받아다가 쿠일룩의 고려인 시장에 팔아서 번 돈으로 15일분 정도의 보리빵을 사서 연명했으며, 어떤 때는 빵으로 죽을 쑤어 가족들이 허기를 채우기도 했다.

1940년 봄, 신순남의 가족은 최씨라는 고려인 농장 책임자를 만나 세베르니 마야크[북쪽 등대] 콜호즈에 땅굴 같은 집을 짓고 살게 되었다. 할머니와 삼촌은 농사일을 했고, 신순남은 콜호즈에서 6㎞ 떨어져 있는 농민학교에 다녔다. 1940년 가을, 9월 20일경에 삼촌이 사망하였다. 낯선 곳에서 기댈 수 있는 마지막 삼촌의 죽음은 핏줄의 슬픔을 넘어 의식주를 책임지던 가장을 잃어버린 생존의 위기로 삶의 희망마저 가져가 버렸다. 1947년에는 하나뿐인 여동생이 병을 얻어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신순남은 어쩔 수 없이 학교를 그만두고 할머니와 함께 벼농사를 해야만 했다. 한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 후 3년 만에 벼농사의 성공으로 경제적 기반을 다졌다. 이처럼 근면한 대가로 신순남 가족도 농장 중심부에 조그만 아파트를 얻어 살게 되었다. 쌀농사는 1944년까지 계속했는데, 이 기간 중 신순남은 낮에는 논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니며 공부를 하였다.

화가로서 예술적 삶의 형성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던 신순남은 할머니의 보살핌으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 있는 중고등학교인 벤코프미술학교[P. P. Benkov School of Art]를 마치고 1960년까지 오스트롭스키미술대학[A. N. Ostrovsky Institute of Art]을 다니며 폭넓고 다양한 미술을 배울 수 있었다.

스탈린은 1932년 ‘문학 및 미술 단체의 재조직화 건’이란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정직, 진실성, 혁명성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표현에 있어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요구했다. 우즈베키스탄의 화단도 여기에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이념이 가미된 리얼리즘 미술을 추구하게 되었는데 이때 주목받기 시작한 화가가 벤코프이다. 사마르칸트미술학교[Samarkand Arts School]에서 교육활동을 하던 벤코프의 인상주의 화풍이 1932년 사회주의 리얼리즘 선언 이후 우즈베키스탄의 화단을 주도하게 된 것이다.

신순남이 처음으로 전문적인 미술 공부를 시작하게 된 벤코프미술학교는 벤코프가 활동하던 사마르칸트미술학교를 전신으로 하는 미술 전문학교이다. 1932년 스탈린의 선언이 있기까지 이미 모든 교육 체계가 정비되었던 벤코프미술학교는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관한 교육에서부터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까지 폭넓고 다양한 미술 발전의 길을 모색하였다. 벤코프미술학교의 다양한 교육과 여러 미술 행사 등은 신순남에게 미술의 전통과 새로운 것에 대한 이해를 넓혀나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였다. 특히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관한 교육은 신순남에게 사회적 참여와 이념의 전달을 위한 수단으로서 미술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에 대해 일깨워 주었다.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6차 세계청년학생축전[World Festival of Youth and Students]은 신순남에게 새로운 도약의 길이었다.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비록 공산주의 이념을 강조하는 성격이 강한 대회였지만 유럽 각국의 아방가르드 미술가들이 모이는 자리이기도 했다. 여기서 신순남은 ‘세계청년작가전’ 1위 입상이라는 생애 최초의 상을 수여받았을 뿐만 아니라 유럽의 아방가르드 미술을 직접 접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신순남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국한하지 않고 사실주의로부터 초현실주의까지 다양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 독창적 양식을 만들어 갔고 타슈켄트의 지식인, 소위 인텔리겐챠 중 한 명이 되었다. 신순남은 예술에 대한 믿음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지식에 대한 의무감을 바탕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60년부터 1997년까지 모교인 벤코프미술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신순남이 화가로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85년 우즈베키스탄미술관에서 개최된 즉흥전시회[그룹전]에서다. 이때 신순남은 처음으로 「기억의 길[레퀴엠-한민족 유민사]」의 일부를 발표했고, 이 작품으로 소련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리고 1990년 6월, 신순남은 평생 고대하던 첫 개인전을 모스크바의 트레차코프스카야미술관에서 가졌다. 신순남의의 나이 만 62세에 이르러 열린 전시회였다. 신순남은 첫 발표전을 통해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 화가로 소련 전역은 물론 유럽과 미국에까지 이름을 알리게 되었으며, 1991년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국립미술관에서 전시회를 가졌다.

그리고 1995년 같은 장소에서 다시 전시회를 가졌다. 이 전시회에서 신순남은 모스크바 전시회 때 선보였던 「레퀴엠-한민족유민사」의 일부와 「기도」, 「어머니와 딸」 등 1937년 비극을 주제로 한 작품을 발표했다. 「부채」 연작과 「전설」 시리즈의 부분도 공개했다. 우즈베키스탄의 산촌인 수콕을 주제로 그린 밝고 경쾌한 풍경들도 새로이 선보였다. 모스크바전[1990년]과 타슈켄트전[1991, 1995년]을 통해 신순남은 구미의 언론과 미술 전문가들로부터 ‘피카소에 버금가는 화가’[영국 BBC], ‘우리 시대의 시켈로스[르네상스 시대의 유명 화가]’, ‘금세기의 탁월한 모뉴멘털리스트[기념 화가]’라는 찬사를 모았다.

신순남은 2006년 8월 18일 타슈켄트에서 사망했다.

「사랑에 대한 전설The Legend about Love」 연작

「사랑에 대한 전설」 연작은 15세기에 우즈베키스탄에서 활동한 민족 시인 나보이(Alisher Navoi)[1441~1501]의 시들 중 다섯 편의 서사시로 구성된 『함세(Khamse)』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신순남은 나보이의 『함세』에서 모티브를 가지고 와서 1964년부터 1974년까지 습작을 포함해 200여 점이 넘는 「사랑에 대한 전설」 연작을 완성하였다.

소묘와 유화로 구성된 「사랑에 대한 전설」 연작은 정밀하고 세밀한 묘사에서 오는 생동감으로 인하여 리얼리티를 느끼게 해 준다. 독특한 기법과 섬세한 묘사로 구성되어 조형적으로 높은 완성도를 지님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의 검열로 1990년 모스크바에서 첫 개인전이 열릴 때까지 전시가 금지되었다. 「사랑에 대한 전설」은 신순남의 저항 의식이 최초로 발현된 작품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레퀴엠(Requiem)」 연작에서 보이는 신순남의 작품 세계

신순남의 작품 세계는 구 소련에서의 고려인의 이주 경험을 디아스포라 시각에서 잘 보여 주고 있다. 신순남의 작품을 디아스포라적 시각으로 구분한다면, 제1단계는 한민족의 고난의 강제 ‘이주’사의 그림이다. 제2단계 작품들은 우즈베키스탄에서 생활상의 ‘적응’을 나타난 밝고 경쾌한 색채로 담고 있다. 3단계는 민족의 ‘정체성’을 기하학적 구성으로 부채 그림이 여기에 속한다. 제 4단계는 1~3단계를 ‘통합’하는 형태의 단순화된 추상 작업들이다.

제1단계에는 「레퀴엠-한민족 유민사」[2×3m, 22점, 44m]가 포함된다. 70년 전, 고향을 떠나 강제 화물 열차를 타고 행선지도 모른 채 실려 가면서 겪었던 기억들, 즉 살을 에는 추위, 배고픔, 그리고 죽음의 공포 당시의 고통스런 체험들은 작품의 화두이자 주제가 되었다. 스탈린의 민족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쫓겨나야 했던 아픈 이주 역사의 체험을 매우 장중하고 비극적인 색채와 상징적인 기법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황폐한 늪지대에 버려진 고려인들이 척박한 땅에 정착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죽음 앞에 절규하는 인간의 처절한 슬픔은 비극적인 동시에 종교적 숭고성을 주고 있다.

「레퀴엠-한민족 유민사」는 1937년 강제 이주에 대한 하나의 거대한 역사 서사시이다. 이 연작들은 연해주 지역에서 강제로 이주된 고려인들의 삶과 죽음을 웅장한 파노라마로 펼쳐낸 기념비적 작품으로 우리 조상의 눈물, 민족의 슬픔을 나타내고 있다. 작가는 그림을 통해 망자들의 원혼을 진혼하려 하였다.

「레퀴엠-한민족 유민사」에서는 수많은 형태의 사람과 촛불들이 빼꼭히 차 있다. 촛불은 초생명[ultra-vivant]이며 내재적이고 보편적이다. 불은 실체의 내부에서 솟아 하나의 사랑처럼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며, 그것은 질료 속으로 내려가 원한이나 복수처럼 잠재하고 포함되기도 한다. 이처럼 신순남 작품의 촛불은 행복을 찾아 그리운 고향을 떠난 우리들, 불행을 안긴 저들을 저주하며 원한과 복수의 마음을 가진 우리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죽은 이를 애도하는 우리들, 살고자 몸부림치는 우리들의 염원이 남겨져 있으며, 촛불은 산자와 죽은 자의 영원을 이어 주는 매개체였다.

신순남의 제1단계 작품으로 또 하나의 대작인 「레퀴엠-하얀 새 검은 해」[2×3m, 18점, 36m]가 있다. 같은 주제가 그래픽 기법을 활용한 반추상 기법으로 다뤄져 있으며 ‘귀향의 노래’라고도 불리고 있다. 제목의 하얀 새는 죄 없고 깨끗한 한민족을, 검은 해는 자유가 없이 갇혀 살아서 해도 안 보였던 당시의 상황을 뜻하고 있다. 십자가와 총, 검은 사선과 붉고 푸른색의 원과 면들의 조형 언어로 꽉 찬 대형 화면에는 군데군데 엎드려 통곡하는 사람들, 거꾸로 매달려 고통 받고 있는 아기를 밴 여인, 부활해 하늘로 승천하는 죽은 이들의 형상이 배치돼 장중한 분위기를 나타내고 있다. 특히 검정색·빨강색·청색·흰색 등 네 가지 색채만을 사용, 상징기법으로 다양한 구성의 변주를 들려주는 작가의 역량이 단연 돋보인다.

이 밖에 제1단계에 해당하는 작품으로는 「하늘색의 고향」[1988년, 2×3m, 총 4부작), 「여신」[1982년, 2×3m, 총 12점]이 있다. 「여신」은 템페라[달걀 노른자를 섞어 만든 투명한 물감]로 그린 1937년 중앙아시아 이주 주제 연작 중 1백여 점 가운데 12점을 가려 뽑아 「여신」 시리즈로 엮은 것이다. 「울음」, 「어머니」, 「고독」, 「기도」 등 각각의 제목이 붙어 있으며 빨강·파랑·흰색·검은색 네 가지 색채로 모든 걸 빼앗긴 유민들의 처절한 운명을 강렬하게 형상화하였다.

제2단계는 「사계절」, 「하늘색의 신부」, 「수콕 아이들」, 「산새들의 춤」, 「나의 가족」, 「아내와 함께하는 자화상」, 「신부와 저녁노을」, 「수콕」 등의 많은 작품이 있다. 신순남의 작품은 동양철학적 요소와 서양의 아방가르드적 요소가 매우 잘 혼합되어 있는데, 특히 「사랑에 대한 전설」 시리즈와 「수콕」 시리즈는 나보이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으로 유명하다.이 작품들은 소수 민족 집단 성원이 정착 사회에 적응하는 초기 과정에서 문화와 정체성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으며, 우즈베키스탄의 주류 사회에 적응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적응에는 문화적 측면뿐만 아니라 다수 집단 성원들과 친분 관계를 맺는 것까지 포함된다. 주류 사회에서 경제적 적응, 정착 사회에서 차별 받지 않고 다수 집단과의 친밀한 적응, 새로운 사회에의 소속감으로 다른 사회 구성원들과 일체감을 갖는 적응을 말한다. 신순남의 작품 중 「수콕」은 주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한 밝은 미래와 낭만주의의 아름다운 인생을 주제로 하고 있다. ‘푸른 물’이라는 뜻으로 바위에서 뛰노는 어린이들, 빨래하는 여인네 등 일상의 소재들을 밝은 색채로 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적응은 우즈베키스탄의 자연과 사회에 대한 고려인들의 문화적·심리적 차원의 적응이 교차하고 있다.

제3단계의 작품은 이주자들의 민족 정체성의 현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신순남의 작품에서 민족 정체성의 코드는 ‘부채’이다. 부채는 한 맺힌 고국의 상징 부호이며 신순남 작품의 토양 역할을 한 정신으로 유민들의 삶과 운명을 기하학적 도형에 용해한 것이다. 부채를 소재로 한 작품들로는 어린 시절 원동에서 보았던 부채춤과 탈춤의 신명을 바탕으로 한 「부채춤」[1982년, 220×120㎝], 「되살린 부채」[1989년, 80×100㎝]를 비롯해 접혔던 부채가 다시 펼쳐질 때 죽은 자의 혼은 천국으로 가든지 또는 지옥으로 가는 것을 의미한 4부작 「또 다른 세계로 천국에서의 신혼」[1990년, 2×8m], 또렷한 부채의 도형들로 사계의 변화를 영롱한 색채와 리드미컬한 음률로 형상화한 「사계절」[1990년, 16부작 각 2×3m]도 부채의 형상이 뚜렷한 대작들이다.

부채는 신순남에게 고려인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징표였으며, 신순남은 사는 것이 부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펼쳐졌다 접혀졌다가 반복되는 게 인생이며 부채를 펼 때가 인간의 삶이라면 부채가 접힌 다는 건 인간의 죽음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부채 속에 유민의 한과 운명을 용해시켜 독특한 ‘부채 철학’을 만들어 냈다.

제4단계의 작품들은 제1단계에서의 이주의 역사적 아픔과 집단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고, 거주국에서의 힘든 적응, 그리고 귀향에 대한 희망이 어우러져 추상 작업 쪽으로 방향 선회하면서 화면이 한층 다이내믹하고 색채의 율동이 넘쳐흐르고 있다. 「동방의 전설」[2×3m, 총 52m]이 대표작이다. 한민족의 동질성과 소수 민족이라는 개별성, 특수성 중심을 넘어선 이질성과 동질성의 통합의 의미가 있어 보인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우울함에서 벗어나 생의 달관의 경지를 표현하고 있다.

신순남 「레퀴엠」의 의미

신순남의 「레퀴엠」은 그 화폭 자체가 하나의 재러 한인들의 거대한 슬픈 비가이다. 사랑하는 조국,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노래이다. 신순남의 작품에는 흰 두건을 쓴 여자들이 수녀같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고, 서로 부둥켜안은 사람들의 얼굴은 눈도 코도 없는 민짜의 날것이다. 살아남은 한인들은 죽은 부모를 위해 이 땅의 흙 한줌을 싸서 중앙아시아에 있는 묘에 부어 주어야 한다. 신순남의 작품은 한민족의 대지[흙과 하늘]에 대한 진혼곡이며, 대지는 조국이며 고향이며 귀향의 노래이다.

신순남의 작품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는 크다. 신순남은 고려인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탐구하였던 대표적인 디아스포라 작가였다. 외부와의 접촉이 끊긴 채 내려온 고려인들의 역사는 결코 짧지 않다. 이들은 디아스포라라는 문화적 경계 속에서 자신들의 문화를 창조하며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왔다.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독립국가연합 국가들이 대부분 자민족 중심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고려인들을 민족주의적인 관점으로만 규정하고자 하는 것은 자칫 고려인들의 사회적 통합을 저해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신순남의 작품을 통해 고려인들을 보는 시선이 민족주의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 한 단계 더 나아가야 함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이 고려인들을 포용하고 있다는 인식의 확산 속에, 고려인들은 자신들이 사는 곳에서의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타민족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 신순남, 『떠도는 자의 자화상』(문화관광부, 1997)
  • 최태만, 『수난과 영광의 유민사-신순남』(국립현대미술관, 1997)
  • 김명훈, 「고려인 작가 신순남의 탈식민성과 민족적 정체성 탐구」(『인물미술사학』9, 인물미술사학회,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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