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은 어떤 경로를 거쳐 정착하게 되었나?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러시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상세정보
정의

일제 강점기 이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사회와는 다른 역사적 경험을 통해 성장한 러시아 시베리아의 고려인 사회 이야기.

개설

1910년대부터 시작되어 작지만 꾸준한 성장을 보여오던 시베리아의 한인 사회는 1930년대 말 스탈린 숙청의 광풍으로 거의 소멸되었다. 스탈린이 사망한 1950년대 이후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유학을 왔던 고려인들이 학업을 마치고 현지에 정착하면서부터 새롭게 형성된 시베리아의 고려인 디아스포라는 주로 철도 연선의 도시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시베리아와 고려인

시베리아[러시아어로 시비리(Сиби́рь)]는 우랄 산맥에서 태평양에 이르는 러시아 영토를 말한다. 남쪽으로는 카자흐스탄·중국·몽골의 국경으로부터 북쪽으로는 북극해에 이른다. 시베리아는 크게 서시베리아, 동시베리아, 극동[Дальный Восток] 등 세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시베리아는 우랄에서 바이칼호수에 이르는 동시베리아와 서시베리아이다. 러시아는 16세기에 카자크를 앞세워 시베리아로 진출하였으며,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시베리아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시베리아에서 가장 큰 도시는 노보시비르스크이며 이 외에 토볼스크, 톰스크, 옴스크, 크라스노야르스크, 이르쿠츠크와 같은 도시가 있다.

러시아 시베리아 일대에는 이미 1910년대부터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지역에 본격적인 고려인 디아스포라가 형성되는 것은 1950년대 이후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유학을 왔던 고려인들이 학업을 마치고 현지에 정착하면서부터였다. 이 때문에 시베리아 일대의 고려인 사회는 주로 철도 연선의 도시들에 집중되어 있다. 노보시비르스크를 중심으로 종으로는 북쪽의 톰스크에서 남쪽의 바르나울까지, 횡으로는 동쪽의 이르쿠츠크에서 서쪽의 옴스크와 예카테린부르크까지 철도 연선의 주요 도시들마다 지역 고려인협회가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다른 지역 고려인들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데 비해 시베리아 일대의 고려인들은 주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시베리아에 출현한 한인

바이칼호 서쪽의 시베리아에는 한인들이 많이 살지 않았다. 하지만 철도 연선 지대의 도시들에는 작지만 한인 집단 거주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각종 한인 단체가 조직되어 있었다. 1910년에 시베리아 지역의 대도시 중 하나인 옴스크에 도시와 그 외곽 지역에 살고 있던 한인의 이익을 대변하고 보호하려는 취지의 국민회가 생겨났다. 사회 지위를 막론하고 모든 한인들은 국민회의 회원이 될 수 있었다. 옴스크 외에 펠름, 쿨간, 튜멘, 노보니콜라예프스크[현재 노보시비리스크], 톰스크, 크라스노야르크스, 칸스루크, 이르쿠츠크 등지에도 국민회가 설립되었다. 1917년 가을 옴스크에서 이인섭이 한인 청년회를 창설했다. 청년회 지도자들은 국민회와 긴밀하게 협조를 했다. 1919년 11월에 콜차크가 이끄는 백군들에게서 옴스크가 해방된 직후 한인 청년회원들은 공산주의 단체를 조직하였다.

1920년 여름 내내 옴스크 한인 공산당원들은 같은 계열의 쿠르간, 베르흐네우딘스크, 이르쿠츠크의 조직들과 관계를 가졌다. 또 이들이 조국으로 돌아가서 공산당을 조직하고 전파할 수 있도록 시베리아 한인 노동자를 대규모로 양성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활동의 기본적인 방향 중 하나는 한글로 된 신문과 정치 선동 자료를 발간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 그들은 급히 러시아 공산당 옴스크현위원회에 물질적 지원을 요청했고 당시 토볼스크에 살았던 고려인 동포인 이성과 최아기를 신문 편집을 위해 초청하기로 결정했다. 이인섭이 임시 편집자의 직위를 맡았다. 이렇게 하여 옴스크 한인공산당의 기관지인 한글 신문 『새벽북』이 석판 인쇄로 700부가 발행되었다. 또한 유명한 볼셰비키 이론가들의 작품이 옴스크 한인의 힘으로 러시아어에서 한글로 번역되었다. 그 작품들은 오신스키의 『민주 소비에트 공화국』, 부하린의 『볼셰비키 공산주의자 프로그램』, 부하린과 프레오브라젠스키의 『공산주의의 ABC』 등이다. 그들의 야망은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선동용 간행물의 출간 계획까지 뻗어 나갔다. 그러나 출판 활동은 한인이 자체 인쇄 기반을 가지지 못해서 제한되었다. 그들은 매주 지방 행정 정치 기관의 도움을 기다려야 했다.

옴스크와 함께 시베리아 한인들의 중심지 중의 하나였던 이르쿠츠크에도 콜차크 정부가 붕괴된 후인 1920년 한인공산당이 설립되었다. 이르쿠츠크 한인공산당고려특립중대를 설립하여 내전에 참가하였다. 또한 이르쿠츠크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총망라하여 이르쿠츠크 한인노동회를 조직했다. 노동회 조직은 1920년 9월 중순 회원 총수 83명이 출석한 자리에서 이루어졌다.

1920년 7월 이르쿠츠크에서 전로한인공산당 제1차 대표자회의가 개최되고,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가 조직되자 시베리아 한인의 중심지는 옴스크에서 이르쿠츠크로 이동되었다. 전로한인공산당 중앙총회는 1921년에 조직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모태가 되었다.

1920~1930년대 시베리아 한인 사회

1920년대 초 내전의 종결로 러시아 내의 사태가 안정되면서 재러 한인의 대부분은 시베리아를 떠났다. 옴스크와 인접 지역 한인의 수는 줄어들었다. 1920년 인구 조사에서는 한인이 약 300명[그들 중 여성은 5명뿐]이었는데, 1920년대 중반에는 200명 미만이었다. 일정한 위상을 지니지 못한 그들 대부분은 일본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했고 한인 신분증도 없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법률적, 사회적 불편함을 겪었다. 그들의 합법화는 고려공산당 지부와 노동자연맹을 통해서 임시 신분증 발급이라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이런 범주에 속하는 인물들은 외국인의 권리와 특권을 가지지 못하였다. 그렇게 해서 1925년 4~6월에 거의 500명에 이르는 옴스크현 한인 대다수가 공식적으로 효력을 갖춘 외국 국민 또는 소련 국민이 되지 못하였고 정기적으로 재등록을 해야 했다.

1926년 시베리아 지역의 인구 조사에 따르면, 약 900명의 한인이 공식적으로 등록되어 있었다.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 해에 많은 수의 한인이 소련 국적을 획득했지만 일부는 국적이 없는 상태로 남길 원했다. 그런 상황에서 한인들은 부득이하게 또는 자발적으로 점차 러시아인에 동화되었다.

1923년 1월 21일 한인노동자연맹 제2차 대회가 개최되었다. 한인노동자연맹의 규정에 따르면 한인노동자연맹은 합법적 사회·정치 조직으로 소련에 살고 있으며 조선에서 일본 식민 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노동자 농민을 포함한 한인 망명자들의 조직이었다. 한인노동자연맹의 지부는 지방 한인 공동체의 발기로 10명 이상의 한인 ‘망명자 프롤레타리아’가 살고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나 창설될 수 있었다. 이미 한인노동자연맹의 중요 문서에는 소련 내 소수 한인이 자체 조직을 갖는 기간을 단기간으로 정해 놓은 러시아 노동조합과의 긴밀한 연합에 관한 테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1920년대 한인 이주 지도가 변하기 시작했다. 시베리아에서 러시아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시베리아지부와 지방 정치 행정 시설들이 이전된 이후 시베리아 지역의 정식 수도가 된 노보시비르스크가 옴스크와 경쟁하기 시작했다. 노보시비르스크에 살고 있는 한인, 중국인들의 여가를 위한 특별 클럽이 만들어졌다. 1935년 당시 모두 20여 명의 한인이 클럽에서 활동했는데, 클럽에서는 중국인이 우세했고 중국인 대표인 한린도 클럽의 책임자로 있었다. 노보시비르스크 한중 클럽은 1937년에 문을 닫았고 이 클럽에 모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체포된 뒤 스탈린 숙청의 피바람 속에서 사라졌다.

시베리아 내 한인들의 중심이 옴스크와 노보시비리스크였지만 한인 이민자들은 톰스크는 물론 알타이현의 아주 먼 오지에도 있었다. 공식 통계 자료에 따르면 1920년대 초 러시아 알타이[알타이현] 지역 내 거주하는 한인은 그리 많지 않았다. 바르나울 군에 7명, 루브초프스크에 12명, 비스크에 8명 등이었다. 실제 그들의 수는 훨씬 많았고 거주 지역은 더 넓었지만 그 시기 외국인을 포함해서 주민 수를 정확히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알타이 지역으로의 한인 유입은 러시아 내전이 종료된 이후 더 늘어났다. 그들의 일부는 동쪽으로부터 이주 경로를 따라 내려왔고 다른 일부는 성공과 일을 찾기 위해 이곳으로 왔으며 또 다른 일부는 알타이에 정착한 동포들과 합류하였다.

시베리아의 한인 콜호즈 새고려[Новая Корея]는 그다지 많지 않은 시베리아 한인의 집결 장소 중 하나이며 생산 단위였다. 동시에 자신들이 세운 한인학교를 포함해서 상대적 자치권을 갖춘 민족 거주지였다. 1936~1937년 학기에 한인학교에서 32명의 학생이 공부를 했고 그들 중 2학년은 16명, 3학년은 8명, 4학년은 8명이었다. 같은 해에 25명이 공부를 마쳤고 나머지 7명은 가족의 상황과 기타 상황으로 학업을 중단하였다.

모든 한인들이 새고려에서 살았던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친지들의 편지를 받은 뒤 길을 떠났고 누군가는 러시아 서쪽 저 멀리 또는 더 따뜻한 남쪽 지역으로 떠났다. 공식적으로 협동조합 새고려는 1950년까지 존속했지만, 실제로는 1930년대 후반부터는 규모가 커진 협동조합 ‘공산주의로 가는 길[Путь к Коммунизму]’의 일부가 되었다. 모든 한인 남성들이 체포된 후 새고려의 모든 경제 업무는 지역 주민들이 맡아 했다. 예를 들면 집단 농장의 대표에 러시아인 바실리 흐로모프가 임명되었다. 가장을 잃은 가정들은 점차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고 지역 주민들이 마을을 관리하겠지만 마을은 비어 갔다.

시베리아와 남쪽 지역, 즉 알타이 고려인들 중 성공한 많지 않은 고려인들의 이야기는 1930년대 말에 중단되었다. 스탈린 체제의 탄압적 성격과 독특한 ‘러시아화된’ 민족주의는 대부분의 민족 그룹, 무엇보다도 국경 밖의 아시아에서 온 이주민의 문화 발전을 위한 기회를 거의 남겨 놓지 않았다. 평범한 재러 한인들도, 문화 지식 엘리트 집단을 이루었고 동시에 소련 엘리트 대열에 들어갔던 한인들의 운명도 그렇게 끝이 났다. 러시아 국경 밖 아시아에서 온 이주민들에는 중 정치적 지향성이 없는 한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경제적,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고 1910년 일본에 점령당한 나라에서 어쩔 수 없이 탈출한 이들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숙청은 그러한 역사적 부당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1950년대 이후 시베리아의 고려인 사회

스탈린 사망 이후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이주가 자유로워지면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목적을 가진 고려인들이 시베리아로 이주해 오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 대도시에는 1990년대 중반까지 긴 기간 동안 조직적 기반이 단단하지 않은 많지 않은 수의 고려인 공동체[1,000명에서 2,000명에 달하는]가 형성되었다. 2002년과 2010년 인구 조사 자료에 따르면, 알타이 지역에 약 1,500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알타이의 고려인 공동체는 비교적 소수이지만 전반적으로 뛰어난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고려인 공동체의 대표들은 이 지역 사회 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다. 고려인 공동체 대표들의 대표적인 예를 살펴보면 시베리아와 알타이 고려인 사회의 특징을 짐작할 수 있다.

레오니드 바실리예비치 정 교수는 지역 내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학 중 하나인 알타이경제법률아카데미를 창설한 뒤 최근까지도 이끌어 오고 있다. 그의 가족은 다른 많은 고려인들처럼 1930년대 말 극동에서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되었다. 1957년에 레오니드 정은 톰스크 대학의 법학과에 입학했고 학업을 마친 후 몇 년간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일하였지만 바르나울에 정착하기로 결정하였다. 여기에서 레오니드 정은 법률가, 교사, 학자로 일하였고 1990년대에는 알타이경제법률아카데미를 이끌었다.

바르나울국립교육대학의 학장인 겐나지 알렉산드로비치 박[1930~2004]은 연해주 그로데코보 마을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1948년에 중학교를 뛰어난 성적으로 졸업한 후 알렉산드로비치 박은 레닌그라드국립대학교 동방학부에 입학했다. 1965년까지 레닌그라드국립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며 언어학 분야에서 빼어난 성과를 올렸으며 가족의 사정으로 바르나울로 이사했다. 바르나울국립교육대학에 직장을 잡게 된 후 학장이 된 알렉산드로비치 박은 러시아연방 교육부의 지시에 따라 유일한 ‘한국어잠재학문연구소[virtual sicence laboratory on Korean language]’를 맡았다. 알렉산드로비치 박은 연구소에서 외국인을 위한 새로운 러시아어 교수법을 만들려고 시도하였으며 다른 어문학적 실험을 하였다. 말년에 겐나지 알렉산드로비치는 러한 사전과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과서를 만드는 작업에 전념하였다.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나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성장한 스베틀라나 페트로브나 채는 모스크바문화대학을 졸업한 뒤 바르나울을 생활 터전으로 선택하였다. 바르나울문화전문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중 1990년 바르나울에 고려인문화센터를 만들었다. 고려인문화센터는 그 당시 알타이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유일한 자립적 조직이었다.

이렇듯 1950년대 이후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으로부터 유학을 왔던 고려인들이 학업을 마치고 현지에 정착하면서부터 시베리아의 고려인 디아스포라는 새롭게 형성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때문에 다른 지역 고려인들이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데 비해 시베리아 일대의 고려인들은 주로 전문직에 종사하는 특징을 나타낸다.

시베리아 고려인의 현재

시베리아의 고려인들은 1990년대 ‘구 소련 해체’로 인한 격변기를 겪으면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 유럽 지역에 거주하는 고려인들과는 사뭇 다른 삶의 모습을 보여왔다. 그들은 ‘소련의 붕괴’로 사회·정치·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생활상의 기득권을 잃거나 훼손당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과는 달리, 대체로 기존의 사회·정치적 기반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또한 소시민으로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는 러시아 유럽 지역의 고려인들과는 달리, 시베리아 고려인들은 지역 사회의 엘리트로 성장해 있다. 시베리아의 고려인들은 시대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고, 자부심도 매우 크다.

현재 노보시비르스크주 고려인 사회는 1950년대 거주 제한 해제 이후 꾸준히 이주해 온 중앙아시아와 극동 지방 출신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노보시비르스크주 통계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1989년 노보시비르스크주의 고려인 총수는 1,264명이었고 2002년에는 2,154명으로 대폭 증가하였다. 노보시비르스크주의 고려인들은 주와 시정부, 산업계, 과학계, 문화계, 교육계, 의학계 등 주류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농업에 종사하는 고려인의 수는 상대적으로 적다.

노보시비르스크주의 행정 수도인 노보시비르스크시에는 주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극동 지방의 하바롭스크, 연해주, 사할린 등에서 온 2,000여 명의 고려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대체로 학업과 취업 등의 이유로 이주하였다. 노보시비르스크시 고려인 인구는 다른 지역과 비교할 때 적지 않다. 이곳 고려인들은 1998년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를 결성했고, 사할린 출신의 정봉영 회장을 초대 회장으로 위촉, 소수 민족 자치 단체로서의 기능을 잘 수행하고 있다. 2002년 5월부터는 노보시비르스크기술대학 출신의 박 벤자민 알렉산드로비치가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를 이끌고 있다.

2004년 12월에는 노보시비르스크 시정부 내 조정협의 소비에트와 노보시비르스크 민족문화자치구 협회, 각 민족 조직들에 대한 고려인 민족문화자치구 전권대표 직제가 신설되었고, 전임 회장이었던 정봉영이 그 직책을 맡았다.

노보시비리스크 고려인민족문화자치회의 기본 목표는 민족어와 전통 문화의 재건이다. 이에 따라 시립체홉도서관에 위치한 민족문학센터에 민족적인 문학 작품과 전통 악기, 의상, 생활용품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특히 고려인 청년무용단의 공연을 물심양면 지원하고 있다. 또한 주 및 시정부가 주최하는 각종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서 고려인의 지위 향상과 권익에 힘쓰고 있으며, 노보시비르스크 지역 단체들과 한국 관련 기관들 간의 문화, 교육, 실무 등 다각적인 협력 관계의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참고문헌
  •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 2003)
  • 배은경, 「시베리아 과학자 김 파벨 가족의 구술 생애사 연구」(『역사문화연구』30,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8)
  • 황영삼, 「고려인 학자 박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 교수의 구술 생애사-중앙아시아 및 시베리아 생활 시기를 중심으로」(『역사문화연구』30,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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