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강제 이주의 경로를 찾아서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CIS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정의

1937년 9월부터 12월까지 진행된 러시아 연해주 재러 한인들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경로 개관.

개설

1937년 8월 21일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비밀 전문으로 시작된 연해주 한인의 강제 이주는 18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 한인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1937년 9월 1일부터 12월까지 강제 이주를 통해 연해주의 재러 한인들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겨갔다. 재러 한인들의 강제 이주 경로는 블라디보스토크-보로실로프[현 우수리스크]-하바롭스크-치타-이르쿠츠크-크라스노야르스크-노보시비리스크의 시베리아 횡단 철도 구간을 거쳐 남쪽으로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로 이어졌다. 우슈토베에서 다시 재러 한인들은 카자흐스탄의 카라간다, 코스타나이, 크질오르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등 5개 지역으로 분리 배치되었다.

한 통의 극비 문서

1937년 8월 21일 러시아 극동 변경주 국경에 거주하는 모든 한인을 추방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인민위원회 의장인 몰로토프와 전연방볼셰비키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스탈린이 서명한 1937년 8월 21일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인민위원회와 전연방볼셰비키공산당 중앙위원회의 결의안 No.1428-326cc’은 극동 지방에 일본 정보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극동 지방의 모든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킬 것을 결의했다. 결의안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극동 지방 국경 부근 구역에서 조선인 거주민을 이주시키는 문제에 대하여〉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인민위원회와 전소련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극동 지방에 일본 정보원들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방안을 실시한다.

1. 전소련공산당(볼셰비키) 극동지방 공산당 지방집행위원회, 극동지방 내무인민위원국에 극동 지방 국경 부근 구역들, 즉 포시예트, 몰로토프, 그로제코보, 항카이, 하롤, 체르니고프, 스파스크, 슈먀코보, 포스트이셰프, 비킨, 뱌젬스키, 하바롭스크, 수이푼, 키로프스키, 칼리닌, 라조, 스바보드느이, 블라고베셴스크, 탐보프카, 미하일로프, 아르하라, 스탈리노, 블류헤르에서 모든 한인 주민들을 내보낸 후 남카자흐스탄주, 아랄해 구역, 발하쉬 구역과 우즈벡사회주의공화국으로 이주시킬 것을 지시한다.

2. 이주는 그로제코보에 인접해 있는 구역들과 포시예트부터 실시한다.

3. 빠른 시일 내에 이주 작업에 착수하여 1938년 1월 1일까지 완료한다.

4. 이주 시 이주 대상 한인들은 소유물, 농기구, 동물 등을 소지할 수 있다.

5. 이주민이 두고 간 동산, 부동산, 파종 종자 등은 가격을 계산하여 보상한다.

6. 이주 대상 한인이 원하는 경우 국외로 떠날 수 있게 하고 간청하는 경우 국경 통과 규율을 완화한 후 방해하지 않는다.

7.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인민위원회는 이주와 관련하여 한인들이 일으킬 수 있는 소요와 난폭 행위를 제압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한다.

8. 카자흐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과 우즈벡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는 정주 구역과 지점들을 빠른 시일 내에 선정하고 이주민들이 새 장소에서 경제 활동을 재개하도록 보장하고 그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할 의무를 갖는다.

9. 교통인민위원부는 한인 이주민들과 그들의 소유물을 극동 지방에서 카자흐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과 우즈벡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이송하는데 있어 극동지방 집행위원회의 신청서에 따라 제때에 객차를 공급할 의무를 갖는다.

10. 전소련공산당(볼셰비키) 극동지방 공산당과 극동지방 집행위원회는 3일 내에 이주 대상 가구와 인원의 정확한 수치를 산출하여 통지할 의무를 갖는다.

11. 이주 과정, 출발 구역에서 떠난 인원, 이주 구역으로 도착한 인원, 국외로 내보낸 인원에 대하여 10일 이내로 보고한다.

12. 한인을 이주시키는 구역들에 대한 국경 수비 강화를 위해 국경 수비 병력 3,000명을 더 증가시킨다.

13.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 내무인민위원부는 한인들이 떠난 장소에 국경 수비대원들의 배치를 허락한다.

이 한 통의 극비 문서가 18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 극동 지역 한인들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극비 문서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극비 문서에 따르면 이주민들은 자신들의 재산, 농기구, 가축 등을 소지할 수 있으며 두고 간 재산과 파종 종자에 대해 보상가로 책정된 비용을 보상받을 것이라 하였다. 게다가 이들은 본인이 원하는 경우 제 3국으로 떠날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사실상 이주 조치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그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이주에 따른 행정적 조치가 인도적이고 정책에 상응하게 그리고 상부 지시대로 꼭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재산을 소지하고 떠날 수는 있었으나 화물 차량에 짐짝처럼 실려 가는 처지에 이삿짐을 놓을 자리는 없었다. 한인 이주를 위해 책정된 6, 280만 루블은 한인에게 보상비나 이주 경비로 집행되지 않은 채 사실상 지방 및 중앙관리들에 의해서 지출이 지연되거나 전용되었다. 원하는 자는 국경을 넘어 제3국으로 갈 수 있다 하였으나 보안 당국의 검열과 허가증 발급 거절로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이주 당시의 상황 기록을 보면, 한인들은 기존에 가지고 있던 동산을 가져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다른 곳으로의 이민 또한 불가능했다. 이주 당일 군인이 마을을 포위하고,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조리 열차에 승차케 하였다. 한인들은 지고, 들고 갈 수 있는 것은 모두 열차에 실었는데, 열차 역에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은 운이 좋게 수레에 물건을 실어, 열차까지 가져간 사람도 있었다. 병원에 입원한 사람들은 바로 퇴원을 하고, 모두 열차에 실었다.

1937년 8월 21일자 명령이 내려진 후, 1937년 8월 24일자로 극동지역 인민위원회의 위원장인 류쉬코프에게 보내진 몰로토프와 스탈린의 서명이 있는 명령서에는 1937년 8월 21일의 규정서의 명령을 담고, 조속히 실행하라는 예조프의 명령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다. 이런 재러 한인 강제 이주 조치에 대한 상세한 명령과 빠른 시행 조치는 극동에서의 재러 한인 문제가 러시아 정부의 중요한 정책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이러한 명령서는 한인에 대한 탄압 정책을 구체적으로 하달하는 것이었고, 재러 한인 탄압이 실제적으로 공식화, 가시화되게 하는 것이었으며, 극동 공산당 지부의 한인 강제 이주 시행을 가속화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두 번째 문서

소비에트 인민위원회는 1937년 9월 28일 제2차 한인 이주 계획을 발표한다. 이번에는 국경 지역의 범위를 넘어 극동 지방 전역에 걸쳐 잔류된 한인을 모두 이주시킨다고 결정하였다. 이 결정에 따라 브랴트-몽골 자치공화국, 유대인자치주, 치타주 그리고 북사할린의 한인도 이주 대상에 포함되었다. 이번에는 9,284가구 44,977명이 대상자에 포함되었다. 제2차 이주 계획은 사실상 국경과 접한 지역 이외에 한인이 살고 있는 모든 지역을 포함시킨 것이었다. 적대 국가의 간첩 행위를 허용할 근거를 예방하기 위해 국경 지역의 ‘불순’ 소수 민족을 이주시킨다는 조치가 이미 정책상 필요한 기준을 초과하여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문서는 한인을 중앙아시아로 수송하기 위한 60대의 열차와 각 열차 당 한 량씩의 취사 차량 그리고 3,100개의 난방 난로를 준비하도록 하였다. 강제이주의 희생자들에게 정부의 ‘준비금’을 나누어 주고 건설 자재, 교통수단, 심지어 군대 취사 차량까지 이주자들을 위해 준비하는 등 세심한 배려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이주민들을 자급적인 체제로 이주시키려는 의도를 명문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극히 상징적인 행위는 거의 실현되지 않았다.

출발

한인 강제 이주의 총책임자였던 류쉬코프의 보고서에 따르면, 강제 이주의 첫 출발은 1937년 9월 1일이었다. 1937년 8월 21일에 재러 한인 이주 결정이 이루어지고, 불과 10일 만에 이루어진 이주는 한인들이 사실상 이주를 위한 준비 기간도 제대로 가지지 못한 상태로 이주당했음을 알 수 있다. 9월 1일에 출발할 지역과 출발역 그리고 할당된 인원과 열차는 아래와 같다.

포시예트 지역은 에게르쉘드-블라집역에서 1,000명, 열차 11개에 차량 660량.

바라바스 지역은 라즈돌노예역에서 600명, 열차 6개에 차량 360량.

나제즈진스크 지역은 나제즈진스크역에서 1,800명, 열차 2개에 차량 120량.

수이푼보로실로프[현재 우수리스크]는 보로실로프역에서 12,800명, 열차 13개에 차량 780량.

몰로토프 지역은 갈렌키역에서 3,200명, 열차 3개에 차량 180량.

한카이스크 지역은 호렐역에서 720명, 열차 1개에 차량 60량.

체르니곱스크 지역은 만조프카-무취나야역과 예브게니예프카역에서 3,200, 열차 3개에 차량 180량.

스파스크 지역은 스비야기노역과 크노린역에서 550명, 열차 6개에 차량 360량.

로제콥스크 지역은 그로제코보역과 호르바토역에서 280명, 열차 3개에 차량 180량.

모두 9개 지역에서 21,150명이 48개 열차 2,880량의 차량에 실려 이동할 계획이었다.

이후에도 9월 2일 48,916명, 9월 14일 15,400명, 9월 16일 22,832명, 9월 20일 42,000명, 9월 21일 51,299명, 10월 14일 44,977명, 10월 24일 85명 등 총 225,509명이 출발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계획한 대로 9월 1일에 첫 출발이 이루어졌는지는 의문이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강제 이주 열차의 첫 출발은 9월 9일이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강제 이주의 첫 출발로 잡고 있는 시점은 9월 12일 라즈돌리노예역이다. 아직도 1937년 강제 이주에 대해 밝혀져야 할 부분이 여전히 많음을 알 수 있다.

북사할린에 거주하던 사할린 한인 1,155명은 배를 타고 10월 18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거기서 열차 편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었다.

한편, 한인들은 강제 이주를 당하기 일주일 전 또는 지역에 따라서는 2~3일 전에 이주 준비를 통보받았다. 이주 통보 시 부동산을 그대로 두고 간다는 것과 2~3일 분량의 식사 준비를 하라고 하였다. 이주 준비를 통보한 후 여행에 필요한 증명서를 압수하고 심지어 마을과 마을 간의 왕래도 중지시키고 타 지역에 친척 방문으로 간 사람은 그곳에서 이주 열차에 승차하라고 하였다. 이주 후원금으로 각 호당 370루블과 1인당 150루블을 지불하였으나 이것을 지급받지 못한 곳도 많았다. 지역에 따라서는 가옥이나 토지를 담보로 수령증을 발급하고 새로 정착할 곳에서 토지와 가옥을 무상으로 지급한다고 약속하였으나 이것을 지킨 곳이 없었다. 이주민들에게는 행선지도 말하지 않고 다만 멀리 떠난다는 것과 출발 일자만 통보한 것이었다.

이주 출발 당일 군인이 마을을 포위하고 한 사람의 낙오자도 없이 모조리 열차에 승차케 하였다. 고려인들은 지고, 이고, 들고 갈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열차에 실었다. 다행히 기차역에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수레에 물건을 싣고 열차까지 가져간 사람도 있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병원에 입원한 사람도 퇴원시킨 후 모두 열차에 실렸다. 이주 대상자는 고려인이면 남녀노소 가릴 것도 없이 전부였고, 노약자과 임산부 심지어 병원 입원자까지 예외일 수 없었다. 또한 소련 각종 기관에 근무하는 사람이나 소련군에 복무하던 고려인까지 해임 또는 제대시킨 후 이주시켰다.

강제 이주 열차의 이동 경로

재러 한인들을 실은 열차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출발한 기차는 우수리 철도를 따라 보로실로프를 거쳐 하바롭스크에 도달하고, 다시 아무르 철도를 따라 스바보드니와 치타를 거쳐 이르쿠츠크에 이르렀다. 이르쿠츠크를 떠난 기차는 크라스노야르스크와 노보시비리스크에 도달했다. 노보시비리스크에서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에 도착하는 약 6,000㎞에 달하는 긴 여정이었다. 여정은 한 달 이상이 걸렸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몸을 실은 재러 한인들은 협소하고 비위생적인 기차 내에서 4가구가 위아래 층으로 나뉘어 지냈다. 재러 한인들은 배설 문제로 많은 고생을 했으며, 식수, 배고픔과 추위, 질병, 전염병 등으로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동 도중 잠시 쉬는 간이역에서 배변을 보다가 기차를 놓쳐 이산가족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질병으로 사망한 노약자, 병자들을 매장하지 못해 곤란을 겪기도 했다. 아픈 사람들을 색출하여 가족과 격리시키는 일도 빈번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어린아이들, 병약자, 노인들이 사망하였다. 이동하는 동안 식량은 일체 공급되지 않았다. 기차가 석탄이나 물을 보충하기 위해 역에 정차하면, 간이 상점에서 구한 빵으로 한 달을 버티면서 이동하던 것이다.

재러 한인들이 처음으로 내린 곳은 중앙아시아의 황량한 반사막 지대인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였다. 그러나 이곳이 최종 목적지는 아니었다. 여기에서 다시 재러 한인들은 기차에 올라 카자흐스탄의 카라간다, 코스타나이, 크질오르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의 타슈켄트, 사마르칸트 등 5개 지역으로 분리 배치되었다.

도착

1937년 9월부터 시작된 강제 이주는 1937년 12월 대부분 마무리되었다. 1937년 10월 25일 내무 인민 위원 예조프는 스탈린과 몰로토프에게 한인 강제이주 완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1937년 10월 25일 극동 지역에서 한인들의 이주는 완료되었습니다. 총 36,442 가구, 171,781명의 한인들을 실은 124개의 열차로 이주되었습니다. 극동 지역에는 전체적으로 700명 정도의 한인이 남아 있는데, 이들도 올해 11월 1일경에 집단 열차로 이주하게 될 것입니다.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에 배치되어 보내진 한인들은 16,272가구 76,525명이고, 카자흐스탄 공화국에는 20,170가구 95,256명입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짐을 하역한 열차가 76개이고 48개의 열차는 운행 중에 있습니다.”

모두 36,442가구 171,781명의 한인이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그런데 이 숫자는 강제 이주의 총책임자였던 류쉬코프의 앞의 보고와 차이가 난다. 류쉬코프는 이주할 한인의 총 인원수가 225,509명이라고 했다. 어느 수치가 정확한 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류쉬코프의 보고가 계획서이고, 예조프의 보고가 결과 보고라고 할 때, 두 사람의 보고에서 차이가 나는 53,643명은 모두 이주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도주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수는 너무 많다. 1937년 강제 이주와 이를 전후하여 얼마나 많은 고려인들이 죽어갔는지는 오늘날까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일설에는 9,50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하며, 최대 25,000명 사망설까지 제기되었다. 러시아 역사학자 니콜라이 부가이는 강제 이주 도중 사망자를 554명으로 기술하고 있다. 현재 학계에서는 대체로 스탈린 탄압으로 숙청된 정치적 희생자 2,500명을 포함해 대략 16,500명 가량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 캄차카와 오오츠크 등 벽지에서 출발한 700명이 뒤처졌으나 이들도 결국 11월 초까지 이주되었다.

소련 당국은 중앙아시아에 도착한 한인들에게 아무런 대책도 없이 일부 차량에게 천막을 나누어주고 돌아갔다. 초겨울의 중앙아시아 매서운 추위와 황량한 사막과 벌판에 내버려진 것이다. 이주민들은 남자들이 팔짱을 껴서 봉분과 같은 바람막이를 만들어서 여자와 어린이들을 아침까지 보호하였고, 호미로 토굴을 만들고 마구간을 개조하여 겨울을 넘겼다. 기차 이동 중 차량마다 흩어진 가족들은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강제로 하차되어서 이산가족이 발생하는 경우도 많았다. 1937년 12월 31일에 카자흐스탄 코스타나이에 도착한 4,000여 명의 마지막 고려인들은 인계가 지연돼, 1주일 동안 열차 안에서 추위로 고생한 후에야 하차하는 일도 발생하였다.

강제 이주 이후, 이주민들의 거주 이전은 불허되었고 거주 지역이 제한된 신분증이 1953년 스탈린 사망 시까지 16년간 유지되었다. 그 기간 중 민족 교육 및 문화 행사도 제한되었다. 고려인들은 목숨을 걸고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그리고 결국 소련에서 가장 성공한 소수 민족 중 하나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하였다.

참고문헌
  • 부가이, 『재소 한인들의 수난사』(최정운 옮김, 세종연구소, 1996)
  • 강만길, 『회상의 열차를 타고-고려인 강제 이주 그 통한의 길을 가다』(한길사, 1999)
  • 한 세르게이·한 발레리 저, 『고려 사람 우리는 누구인가』(김태항 옮김, 고담사, 1999)
  • 이복규,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생애담 연구』(지식과교양, 2012)
  • 김호준, 『유라시아 고려인 150년–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주류성, 2013)
  • 김연수, 「재소 한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사」(『구주논총』4, 대구대학교 동서문제연구소, 1989)
  • 심헌용, 「소련 한인과 강제 이주에 대한 연구」(『부산대민족문제논총』3,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1994)
  • 건국대학교 인문대 러시아학과, 「재소 한인사 개요」(『건대학술지』40, 건국대학교, 1996)
  • 김대희, 「1937년 중앙아시아 지역 한인 강제 이주 연구」(이화여자대학교 석사 학위 논문, 2003)
  • 윤병석, 「소비에트 건설기 고려인 수난과 강제 이주」(『중앙사론』21, 중앙대학교 중앙사학연구소, 2005)
  • 윤상원, 「소련의 민족 정책 변화와 1937년 한인 강제 이주」(『사림』46, 수선사학회, 2013)
  • Ли У Хе, Ким Ен Ун, 『Белая Книга о депортации корей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России в 30-40х годах』(Москва “Интерпракс”, 1992)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