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한인들이 살았다는 토굴은 실재일까? 신화일까?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카자흐스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정의

1937년 러시아 극동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고려인들의 첫 기착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임시 주거 공간으로 만들었던 토굴의 흔적 이야기.

개설

1937년 9월 초와 10월 중순 사이 러시아 극동 지역에 거주하던 재러 한인 중 약 18만 명이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으로 전격 강제 이주되었다. 재러 한인을 싣고 극동에서 한 달을 달려 온 기차는 첫 기착지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20,170가구 96,256명을 내려놓았고 곧바로 우즈베키스탄으로 내달려 나머지 인원 16,272가구 76,525명을 이송하였다. 이주된 중앙아시아 내륙 지역은 붉은 크질쿰과 검은 카라쿰 사막 지대가 널려 있었다. 그리고 아무다리야와 스리다리야강 연안에 습지대가 분포한 척박한 지역이었다. 낯설고 전혀 생소한 지역으로 옮겨진 재러 한인들은 척박한 환경에 내동댕이쳐져 새로이 생존을 모색해야 했다.

재러 한인들이 처음 도착한 우슈토베는 당시 카자흐스탄 알마티주 카라탈 지구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우슈토베는 시베리아에서 중앙아시아를 연결하는 투르크시프(труксиб) 철도가 중간 거점 알마티로 진입하면서 일시 머무는 지리적 교통 요지로 성장하였다. 우슈토베에 부려진 한인들은 카자흐스탄 전역으로 배치되었으며 일부는 역에서 북쪽 2㎞ 떨어진 바슈토베에도 이송 배치되었다.

바슈토베에는 현재 이주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그 주변엔 이주민들이 임시 주거 공간으로 마련한 토굴 흔적이 널려 있다. 이곳이 처음으로 한인들이 이주한 곳임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재러 한인 이주민들이 이곳에 토굴을 파고 겨울을 지냈을까? 과연 그 추운 시베리아 한파를 토굴 속에서 이겨낼 수 있었는가? 혹시 신화적 허구로 설정된 이야기는 아닐까?

우슈토베의 토굴 현장

하지만 이는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었다. 바슈토베는 ‘머리 언덕’이라 불리는 낮은 평원 지대였다. 이곳에서 강제 이주 재러 한인들은 가족 단위로 자리를 정하고 언덕을 바람막이 삼아 곧 닥칠 겨울에 대비하였다. 강제 이주 재러 한인은 서둘러 이송되었기에 의식주와 관련된 물품을 거의 챙기지 못했다. 들판에 누렇게 익은 곡식은 추수하지도 못하고 떠나야 했다.

재러 한인들은 극동을 떠나기 전 반납한 농기구, 농산물, 종자를 되돌려 받지 못했다. 정착해 살던 가옥 등 건축물이나 기타 값진 재산 등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했다. 보상 비용은 차치하고서라도 반납한 물품을 되돌려 받았다면 정착을 위한 건축이나 토지 개간 등에 활용할 수 있었을 텐데 전혀 그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맨손으로 땅을 파고 토굴을 만들어 추위에 대비하였다.

현장을 살펴보자. 현재 1996년 기념비가 설치된 곳은 토굴 흔적이 있는 곳이다. 자그마한 토굴 흔적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그동안 방치되어 갈대가 무성하지만 이주 당시 열악한 환경을 극복한 역경의 현장임을 알 수 있다. 이런 곳은 이주민이 가족 단위로 거주하기 위해 판 굴이다. 그런데 그중에는 길이 약 100m의 긴 개방형 토굴도 볼 수 있다. 오히려 커다란 웅덩이라고 할 수도 있는 곳이다. 약 100명 이상이 모일 수 있는 이 공간에서, 강제 이주 한인들은 향후 대책 회의를 열거나 전체 대소사를 치루기 위한 장소로 활용하였다. 추운 바람을 막으면서 옹기종기 모여 공동 관심사를 상의하기 위한 장소로 쓰인 것이다.

강제 이주 한인은 전통적으로 함께 모여 어려운 일을 논의하고 고민을 해결하였다. 강제 이주 한인은 생면부지의 낯선 황무지에서 시베리아 추위를 겨울 내내 견디고 굶주린 배를 달래며 함께 이겨 나갔던 것이다. 희망을 버리지 않고 고단한 삶을 견뎌 냈던 한인들의 용기와 의지가 엿보이는 역사적 현장이 아닐 수 없다.

겨울이 닥쳐오자 초기 정착에 느낀 어려움이 곧 피부로 느껴졌다. 겨울을 대비하여 주거지가 마련되어야 했으나 ‘콜호즈건설용 건축자재제공법령’이 이행되지 않은 것이다. 주거지 건설도 어려운 실정에 일상 문화 시설에 대한 건설은 꿈을 꿀 수도 없었다.

새로운 낯선 환경에 처한 한인 이주민들은 정착할 주거 시설 외에도 생활용품이 없어 극도로 궁핍해졌다. 절망에 젖은 이주민들은 배정받은 정착지를 이탈해 다른 생활 현장으로 떠났다. 식료품과 의약품이 부족했으며 옷가지와 신발이 헤어져 남루해졌다.

노인과 어린이들은 강제 이주의 고역에 시달려 성인보다도 더한 굶주림과 현지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여러 지역에서 괴혈병과 홍역 등 풍토병이 창궐하여 높은 사망률이 나타났다. 특히 어린이들이 학질 등에 걸려 약도 없이 죽어 갔다. 이렇게 사망한 인원은 이동 과정에서 사망한 인원보다 훨씬 많았다.

소련 당국의 미흡한 이주 정책

카자흐스탄보다 훨씬 남쪽에 있는 우즈베키스탄의 경우에는 기후 사정이 나아 보였다. 이곳에서는 토굴까지 팔 필요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들 역시 겨울을 날 채비는 없었다. 누구는 인근 콜호즈에 가서 거처를 의탁했으나 낡은 건물과 차고, 마구간, 우리 등이 거처였고, 또 다른 누구는 오두막 같은 차이하나에서 바람을 겨우 피하며 지냈다. 영락없는 떠돌이 집시 신세였다.

이처럼 새로운 이주 지역은 이방인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다. 비록 소련 모스크바 중앙과 극동 연해주 그리고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의 지방 당국은 한인의 이주에 관한 행정 조치를 취했지만 현장에서 실행된 것은 거의 없었다. 중앙 정부가 내린 지침은 지방에서 대부분 이행되지 않았다. 지방 정부도 서로 간 업무 떠넘기기나 계류시킴으로써 필요한 조치가 이행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이주 당사자와 현지 당국이 불만에 찬 수많은 청원서와 보고서를 중앙으로 상게하였지만 자금 배정 등 행정 조치가 적시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행정적으로 퇴거된’ 한인들은 그 후 ‘특별 이주민’ 신분으로 이주된 위수 지역 내에서만 거주하였다. 극동지역 집행위원회는 반납 받은 한인의 재산과 물품을 이주민들에게 곧바로 제공하지 않고 오래 끌었다. 즉 이주민들은 새로운 거주지에서 배상금을 거의 받지 못한 셈이다. 더욱이 중앙아시아와 카자흐스탄 지방 정부는 이주민 정착 자금을 중앙 정부로부터 배정받았으면서도 집행하지 않거나 현지인의 구호 자금이나 또다른 이주민 지원 자금 등 다른 명목으로 처리하면서 한인 이주민들의 정착 사정을 더욱 어렵게 하였다.

역경을 딛고 일어선 고려인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슈토베 언덕의 토굴에서 겨울을 난 한인들은 이듬해 처음으로 맞이한 봄에 일부 가져온 종자로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손으로 경작지를 일구고 논두렁을 만들었다. 개울을 내 물을 끌어들이고 볍씨를 뿌렸다. 비록 소출은 크지 않았지만 삶의 희망을 이어 가는 상징적인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슈토베[바슈토베]는 한인이 처음으로 벼농사를 지은 곳이기도 하다.

과거 1927년 세미팔라친스크에 사는 김상덕이 벼 재배에 성공하자 카자흐스탄 토지인민위원회가 극동 지역의 한인을 초청해 벼농사를 시작했던 것이다. 1928년 7월 4일 초청된 오가이와 안병화는 한인농업협동조합[카즈리스]을 설립해 기계화 영농을 펼쳐 1㏊당 40첸트네르의 벼를 생산하였다. 1937년 강제 이주된 한인이 이듬해 손으로 직접 땅을 일궈 벼농사를 시작한 곳도 이 지역임은 역사의 장난이 아닐 수 없다.

실제 지금도 중앙아시아나 볼고그라드 등 고려인이 계절 임차농 고본질을 많이 하는 지역에서는 더위를 극복하기 위해 토굴을 파서 시원하게 지낸다. 토굴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하다. 토굴은 논농사나 야채 농사를 하는 농군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휴식처이자 저장소이다.

토굴의 역사적 의미

강제 이주된 한인은 이주 과정의 준비 미비, 강제적 실행 등으로 변변한 거주지도 없이 토굴이나 버려진 우리 등에서 지냈다. 우슈토베[바슈토베] 지역에 남아있는 토굴은 당시 이주민의 초기 정착이 지닌 비극성을 내포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사항은 이런 열악한 환경을 자립적이고 협동적으로 끈질긴 생활력으로 극복하였다는 점이다. 러시아 극동 지역을 떠나면서 의식주와 관련한 최소한의 물품도 챙기지 못하였기에 정착에 어려움을 겪었던 이들이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주 악조건과 환경 속에서 생존하였다는 그 자체는 경외롭기까지 하다. 토굴을 만들어 겨울을 난 것은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고려인의 성공 신화를 이루기 시작한 그 역사적 현장이 우슈토베다.

참고문헌
  • 보리스 박·니콜라이 부가이, 『러시아에서의 140년간-재러 한인 이주사』(김광환·이백용 옮김, 시대정신, 2004)
  • 심헌용·사타로프 마스우종, 『한국과 중앙아시아의 문명 교류. 벼 재배의 기원, 전파, 발전 그리고 문화 교류』(폴리테이아, 2015)
  • Ли У Хе, Ким Ен Ун(авт-сост.), 『Белая книга о депортации корей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России в 30-40х годах, Кн. Вторая』(М. : МККА,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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