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강제이주 당시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역이 아니라 페르바야레츠카역에서 출발한 이유는?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러시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정의

1937년 가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의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역이 아닌 페르바야레츠카역에서 화물 열차를 타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이야기.

개설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역은 여객용 열차역인데 비해 페르바야레츠카역은 화물용 열차역이다. 1937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한인들은 페르바야레츠카역에서 중앙아시아로 떠났다. 수송 열차로 화물 열차가 배정되었음을 의미한다. 화물 열차를 타고 떠난 강제 이주는 고난과 고통의 길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역과 페르바야레츠카역

시베리아 횡단 철도[TSR: Trans-Siberian Railway, Транссибирская магистраль]가 있다. 유럽의 모스크바와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세계에서 가장 긴 대륙 횡단 철도이다. 종착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역에는 철도의 길이를 나타내는 9,297㎞라고 쓰인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블라디보스토크에는 또 하나 중요한 역이 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흐르는 3개의 하천 중 첫 번째 하천이라서 현지의 고려인들이 일번하(一番河) 또는 일번천(一番川)이라고 불렀던 페르바야레츠카(Первая Речка) 부근에 위치한 페르바야레츠카역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역의 바로 전 역인 페르바야레츠카역은 1937년 이전 연해주 한인들의 중심지였던 신한촌에 인접해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역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종착점으로 주로 여객용 열차들이 이용하였다. 이에 비해 페르바야레츠카역은 화물용 열차의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페르바야레츠카역에서 출발한 강제 이주 열차

고려인 이주민을 태운 첫 수송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것은 1937년 9월 9일 밤이었다. 극동에 사실상 추위가 시작된 때였다. 열차가 출발 기적을 울리자 어디로 무엇 때문에 가는지도 모른 채 고향을 떠나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슬픔과 눈물이 가득했다. “원동변강이여 잘 있거라. 슬퍼 말라. 또 올 날이 있으리라.”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차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며 울부짖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의 상황을 극동고려사범대학 학생이었던 송희연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원동에서 강제적으로 이주당한 조선인들은 어디로 무엇 때문에 가는지도 모르면서 허술한 화물 차량에 실려 갔다. (중략) 해삼시는 원동 조선 사람들의 문화 중심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로 해삼시 신한촌에 널리 알려진 스탈린구락부, 조선극장, 9년제, 7년제 학교들이 있었으며 시내에는 조선사범대학, 8호 10년제 학교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어로 발간되는 『선봉』 신문도 있었다. 조선 사람들은 조선말 방송도 자주 들었다. 이런 곳에서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주에 대한 아무런 해석 사업도 없이 이주 코미시야가 와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이주 기간을 정하고 일명 당 150루블씩 보조금을 주었을 뿐이었다.

이주 기일은 1937년 10월 3일, 5일, 7일, 11일, 13일이었다. 1935년, 1936년, 1937년에 소련의 도시들에 가서 공부하던 사람들은 친척이 어디로 간지도 알 수 없게 되었다. (중략) 나는 그때 신한촌 하바롭스카야 거리에 살았는데 3일부터 떠나가는 열차들을 다 전송하고 10월 11일에 떠났다. 나는 전송할 때마다 사람들의 얼굴에서 눈물과 슬픔만을 보았을 뿐이다. 노인들은 고향 땅 친척들의 묘지의 흙을 수건에 싸가지고 떠났다. 이처럼 사람들은 고향을 버리기 애석해 했다.

어떤 사람들은 가정 물건 전체를 다 가지고 갈 수 있었으며 위생 치료 열차에 달려갔다고 하는데 이것은 빈말 공부에 불과하다. 이주 초기에는 큰 역들에서 끓는 물, 음식물들도 살 수 있게 조직되었는데 나중에는 이런 특전도 없어졌다. 열차에 변소가 없는 관계로 정거하는 역들은 변소로 변하여 버렸다. 화물 차량마다에 40여 명씩 싣게 되었으니 특히 식사 문제가 말이 아니었다.”

송희연의 회상에 따르면 블라디보스토크 고려인을 실은 이주 열차는 10월 3일에 첫 출발을 하였다. 하지만 역시 극동고려사범대학의 학생이었던 정상진은 첫 열차가 9월 25일에 출발했다고 회상하고 있다. 1937년 9월 25일 페르바야레츠카역에서 첫 이주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사범대학, 고려사범전문학교, 사범노동학원, 사범기술학교, 4개의 고급중학교, 8개 초급중학교, 23개의 인민학교 학생들과 교직원 및 그 가족들이 첫 이주 대상자였다. 조선극장, 조선어라디오방송국, 선봉신문사 등 문화 기관 직원과 가족들도 함께였다. 이들은 열차 32량에 실려 한 달 뒤 카자흐스탄의 크질오르다에 도착했다. 정상진은 “그래도 우리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들보다 나중에 연해주를 출발한 사람들은 열차 사고와 추위 등으로 수없이 죽었는데, 그들이 탄 열차에서는 인명 피해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상진의 회고이다.

직접 열차를 타고 크질오르다로 간 정상진의 기억이 송희연의 기억보다는 정확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런데 시차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두 사람의 회고가 일치하는 것은 강제 이주 열차가 블라디보스토크역이 아닌 페르바야레츠카역에서 출발했다는 것이다. 왜 블라디보스토크역이 아니라 페르바야레츠카역이었을까? 물론 페르바야레츠카역이 신한촌에서 가장 가까운 역이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페르바야레츠카역이 주로 화물 열차가 이용하는 역이었기 때문이었다. 연해주의 고려인들은 객차가 아닌 화물 열차를 타고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었던 것이다.

화물 열차를 타고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킬 고려인들을 실은 수송 열차는 객차와 화물차 그리고 가축을 실은 가축 운반차였다. 객차에 실린 사람은 경찰과 호송 요원, 그리고 고려인으로는 신문사 직원과 극단원 그리고 극동고려사범대학 교수와 학생 등 이른바 엘리트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뿐이었다. 이들은 1,000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들을 제외한 모든 고려인은 화물차나 가축 운반차에 짐짝처럼 실렸다. 화물차 한 칸에 보통 2~3가구, 많게는 4가구가 탑승하였다.

화물차는 중앙의 출입문 좌우에 선반을 질러 2층으로 만들어 한 차를 4칸으로 나누었다. 한 가구에 한 칸씩 배정하고 가운데에 조그만 원형 난로를 설치하여 조리할 때 각 집이 순번대로 쓰도록 하였다. 매 칸의 침상 바닥에는 짚을 깐 것이 고작이었다. 한 칸을 3층으로 나눈 화물차도 있었다. 그런 열차에 실린 사람들은 차 안에서 허리를 마음대로 펼 수도 없어 큰 어려움을 겪었다.

화물차에는 유리창 하나 없이 널빤지로 막은 문만 있었다. 문이 닫히면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였다. 그래서 기차를 그냥 ‘검은 상자’라고 불렀다. 안에서 밖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밖에서도 화물차 안에 사람이 실려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당국은 그만큼 고려인 이주를 철저하게 비밀로 위장하였다.

가축 운반차는 가축 냄새가 여전했고, 열차가 달릴 때면 벽과 바닥의 널빤지 사이로 매서운 찬바람이 들이닥쳤다. 저녁이 되어 기온이 뚝 떨어지면 기차 안은 꽁꽁 얼어붙었다. 준비한 이불이며 옷가지가 변변찮았기 때문에 매우 고통스러웠다. 젖먹이가 딸린 집안은 더 심했다. 그중에는 병자들도 꽤 있었다. 그러나 위생 열차는 없었고 의사, 간호사도 동승하지 않았다. 당시 화물 열차로 가축을 수송할 때는 수의사가 꼭 따라다녔다. 고려인들은 소나 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당한 셈이었다.

화물 열차의 고난

이주민들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3~4주간을 시베리아 횡단 열차 속에서 시달렸다. 도중에 보로실로프[현재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치타, 이르쿠츠크 역에서 며칠씩 머물렀지만 경비가 삼엄해서 외출을 할 수가 없었다. 위에서 송희연이 회고한 대로 초기에 이주민들은 열차가 급수를 위해 정차한 큰 역에서 끓는 물을 공급받았지만 곧 이런 배려도 사라졌다. 열차는 사람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은 그대로 지나치면서 인적이 드문 한적한 곳에 간간히 정차하였다. 열차에는 화장실이 없었기 때문에 기차가 잠깐 서면 무엇보다 급한 것이 대소변을 보는 일이었다. 기차역마다 변소로 변하자 다음부터는 허허벌판에 열차를 세웠다.

준비해 간 며칠간의 식량이 떨어진 뒤부터는 기차가 서면 바로 물을 길러 달려가거나 당국이 내준 이주비를 움켜쥐고 먹을거리를 구하러 나서야 하였다. 식량은 스스로 해결하라는 것이 당국의 지시였다. 우선 간이 상점으로 뛰어가 빵, 우유 등 먹을 수 있는 것이면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사다 먹으면서 허기를 채웠다. 어쩌다가 흰 쌀밥을 먹게 되면 마치 명절 같은 분위기였다. 마른 음식만 계속 먹는 것이 지겨워 물과 나뭇가지를 장만해 국이라도 끓이려고 하면 열차가 기적을 울렸다. 준비하였던 걸 그냥 놔두고 승차를 서둘러야 하였다. 온종일 덜컹거리는 열차를 타고 가자니 자주 배고픔에 시달렸다. 사람들은 물과 음식을 사기 위해 다음 역에 도착하기를 목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우연히 기차가 집단 농장 부근에 정차하면 모두들 밭으로 내려가 감자를 캤다. 먹을 물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세수와 목욕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수송 열차는 한 번 달리면 며칠을 계속 달렸다. 한 곳에서 2~3시간 머무르기도 하고, 때로는 2~3일간 정차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서 가족이 여러 열차로 흩어져 다수의 이산가족이 생겨났다. 열차 안은 종종 아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극도의 혼란 속에서 출산 소동이 벌어지는가 하면 식량 약탈과 겁탈이 자행되고, ‘배신자’를 징치하는 ‘인민재판’이 열리기도 하였다. 동승한 비밀경찰 요원들에 의한 ‘불순분자’ 체포도 계속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한 한 열차에서는 카자흐스탄까지 오는 도중에 10여 명이 체포돼 소식도 없이 사라졌다. 강제 이주와 숙청이 함께 이루어진 것이다. 열차 사고도 몇 번 있었다. 11월 초 하바롭스크 부근 레비노역에서 일어난 열차 전복 사고 때에는 21명이 사망하고 50명이 부상하였다.

도착 때까지 열차 안은 소독도 않고 목욕도 할 수 없어 이주민들의 옷에는 이가 바글바글 끓었다. 열차가 잠시 정차하면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 머리나 속옷에 하얗게 낀 이를 털어내기에 바빴다. 수송 도중 전염병이 발생하여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였다. 정거장마다 물이 달라지니 배탈을 앓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병자가 생기면 즉시 들것에 실려 열차에서 내려졌다. 완쾌되면 곧 가족에게 돌려보낸다고 약속하였으나 돌아오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 대부분은 소식이 끊긴 채 사망하였다. 병자들은 앓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애썼고 이주민들은 환자가 생겨도 알리지 않고 숨겼다. 어떤 집은 난로 위에서 끓는 국솥을 엎어 화상을 입은 두 아이가 죽자 목적지에 도착하면 매장하려고 기다렸다가 시신에서 악취가 퍼지는 바람에 들통이 나 곤욕을 치렀다. 한 달 이상의 여행 끝에 열차가 타슈켄트에 일시 정차하자 더는 못가겠다고 항의하며 자의로 짐짝을 내리는 소동이 벌어졌다. 그러나 순식간에 총창을 든 군대가 나타나 “차를 타라.”고 명령하자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다시 기차에 올랐다.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먼 길에 지쳐 모두가 앓고 있었다. 앓다가 일어난 사람은 ‘여행’을 계속하였지만 명이 짧은 사람은 황천객이 되었다. 특히 연약한 어린아이가 많이 사망하였다. 열차가 서면 이름도 모르는 철길 근처에 시신을 서둘러 묻으며 통곡하는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주인 없는 시신은 밤에 열차 밖으로 내던져졌다.

드디어 화물 열차에서 내리다

고려인 이주민을 태운 열차는 9월 말 카자흐스탄의 우슈토베에 최초로 도착했다. 뒤이어 알마티, 크질오르다, 카라간다 지역에, 그리고 10월 초에는 우즈베키스탄 국경 지역에 속속 도착했다. 이주민들은 열차 탑승 기간 내내 그들의 행선지에 대한 통보를 받지 못했다. 때때로 최종 순간 행선지를 변경함으로써 가족 간에 생이별이 일어났다. 기차 여행 한 달여 만에 이주민들이 도착한 곳은 초원과 바람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지역이었다. 소련 당국자는 수용 시설이라고는 전혀 없는 황무지에 이주민들을 부려 놓고 돌아갔다. 이주민들은 결국 땅굴을 파고 살 수밖에 없었다.

강제 이주는 연해주 고려인만 당한 것이 아니다. 북사할린 지역의 고려인을 비롯하여 유대인 자치주에 살던 고려인, 콤소몰스크의 고려인, 바이칼호 부근 부랴트 공화국에 거주하는 고려인 등 3,200명도 모두 중앙아시아로 이주되었다. 북사할린 고려인 1,155명은 배를 타고 10월 18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거기서 열차 편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송되었다. 강제 이주는 9월 초에서 12월 말에 걸쳐 2차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1차는 국경 지역 거주 고려인, 2차는 내륙 거주 고려인이 그 대상이었다. 1차 강제 이주가 끝난 그해 10월 말에 소련 내무위원부 예조프는 “극동 고려인을 최단 기간 내에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송 완료하였다.”라고 발표하였다.

1937년 10월 러시아 극동 지역에는 더 이상 고려인이 남아 있지 않았다. 캄차카반도와 오호츠크 등지에 700여 명의 고려인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11월 초까지 모두 극동 지역에서 추방되었다. 1937년 12월 31일에 카자흐스탄 코스타나이에 도착한 4,000여 명의 마지막 고려인들은 인계가 지연돼, 1주일 동안 열차 안에서 추위로 고생한 후에야 하차할 수 있었다.

강제 이주의 마감

고려인들을 태운 거대한 수송 열차가 달려간 거리는 장장 6,000㎞에 이르고, 이주민 수는 총 36,442가구 171,781명에 달하였다. 그 중 16,272가구 76,525명이 우즈베키스탄에, 20,170가구 95,256명이 카자흐스탄에 각각 짐을 풀었다. 이것은 10월 말까지 열차 124대에 의해 1차로 수송이 완료된 이주민 숫자이다. 여기에 그 후 수송된 4,700명 이상의 인원을 포함하면 강제 이주된 고려인의 총수는 대략 18만 명에 달한다.

소련 인민위원회는 이주에 따른 지출 예산으로 126,000,000루블을 책정해 극동 지방에 63,000,000루블, 우즈베키스탄에 27,000,000루블, 카자흐스탄에 36,000,000루블을 각각 할당하였다. 여기에 수송 기간 중 이주민 가족 1인당 하루에 5루블씩 지불한 일당을 합치면 국가 지출액의 총액은 대략 190,000,000만 루블에 달한다.강제 이주 도중 열차 사고, 기근, 질병, 추위 등으로 수많은 고려인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집단 발병이 많았던 어린이들의 경우 홍역에 걸리면 60% 이상이 사망하였다. 이주 도중 박해를 받고 희생된 사람 역시 수백 명에 달하였다. 소련 당국은 수송 과정 내내 고려인들을 감시하였다. 수송 열차에 동승한 비밀경찰 요원들은 이른바 ‘불순분자’를 수색, 체포해 도착지 당국에 넘겼다. 기소된 고려인들은 ‘일본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형을 선고받았다. 도착지 중앙아시아도 고령인들에게는 굴락[강제 수용소]와 다르지 않았다.

한편, 극동에서는 고려인 이주 후 누락자 색출을 위한 ‘정밀 청소’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와 함께 중국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에 대한 불순분자 색출 작업도 전개되었다. 농촌에서는 노동력 부족으로 추수를 못해 농작물의 상당 부분이 그대로 들판에서 죽었다. 거리에는 굶주린 집짐승들이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위협하였다. 고려인 이주로 공동화된 지역에는 붉은 군대에서 제대한 예비역 장병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비워진 집들은 허물어지고 약탈당하였다. 빈집은 불태워 버렸다. 고려인들이 살던 600여 개의 마을은 지도에서 없어지고 쑥밭으로 변하였다.

1937년 강제 이주를 전후해 죽어 간 고려인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다. 9,500명에서 최대 25,000명까지 추산하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대략 15,000명 이상이 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아 낸 고려인들의 주장은 이보다 훨씬 많다. 그때 재소 고려인의 절반이 줄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강제 이주의 무서운 폭풍이 몰아칠 때 고려인들이 받은 충격과 피해 의식이 엄청나게 컸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고려인 강제 이주는 해외 한인이 겪은 아픔 가운데 가장 큰 상처이며, 결코 지울 수 없는 통한의 역사다. 고려인들은 그 피맺히고 억울한 사연을 어디에도 호소하지 못한 채 소비에트정권 내내 가슴속에 깊이 묻고 침묵의 삶을 살아야 하였다.

타슈켄트김병화 농장에서 일하던 한 노인이 토해 낸 회고담은 그 비극의 세월을 사실적으로 상기시켜 준다.

“잉기까지 오는데 한 달 넘어 걸렸지. 짐승이 실는 기차에 한 바곤에 네 가족씩 탔지. 춥지. 배고프지. 해서 애들은 죽고, 노인들도 마이 죽었지. 기차가 스면 부모들은 죽은 자식들을 땅에 묻고…… 또 기차 타고 갔지. 어디매 가는지는 아무도 몰랐지…… 처매 잉기는 전부 깔밭이랬지. 그래 손으로 호매로 밭을 매고 물길 내고…… 깔로 집을 지었지. 정말 짐승이처럼 살았지…… 인잔 일없소.”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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