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원동 해방 전쟁의 빛나는 한 페이지-한운용 중대의 ‘이만 전투’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정의

1921년 12월 4일 러시아 연해주에서 한운용이 이끄는 대한의용군 2중대가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에 맞서 이만역을 사수하기 위해 벌인 전투.

개설

1921년 12월 4일 러시아 극동 연해주에서 러시아 혁명으로 촉발된 내전의 마지막 국면인 연해주 해방 전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연해주 이만에는 3개 중대로 구성된 대한의용군이 조직되어 있었다. 한운용이 이끄는 대한의용군 2중대는 이만역을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던 백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치르고 중대장 한운용을 비롯한 50여 명의 부대원이 영웅적인 죽음을 맞았다. 비록 한운용 중대는 전멸했지만 백군에게 심각한 타격을 입혀 이후 대한의용군과 연합한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이 반격을 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대인들은 이 전투를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기 위한 극동 지역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투쟁의 역사에서 위대하고 잊을 수 없는 한 페이지”로 기억하고 있다.

연해주 해방 전쟁의 시작

러시아 혁명 이후 내전이 계속되던 시베리아에서 1920년 4월 6일 완충국인 극동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부르주아 민주 공화국을 표방한 극동공화국은 가능한 한 일본군과의 대결을 피하면서 백군과의 전투에만 몰입하고자 하였다. 일단 극동공화국은 영내의 백군을 격파하는 데 중심을 두었다. 이렇게 하여 1920년 11월 이후 극동 러시아 지역에는 중앙의 소비에트 정부와 연결된 극동공화국과 일본의 지원을 받는 연해주의 메르쿨로프의 임시 프리아무르 정부가 대치하게 되었다. 두 정부는 시베리아 철도를 두고 연결되어 있는 두 도시인 이만[현재 달네레첸스크(Дальнереченск)]과 스파스크 사이에 중립지대를 설치하였다.

극동공화국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도부는 임시 프리아무르 정부를 구성한 메르쿨로프 백군을 하루빨리 제압하고 내전을 끝내고 싶어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일본군의 철수가 필수적이었다. 극동공화국은 일본군을 연해주에서 철병시키기 위해 온갖 외교적 노력을 시도했다. 중국 대련(大連)에서 극동공화국과 일본 사이에 회담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회담에서 양측은 결론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회담에서 주도권을 쥐고 싶었던 일본은 급기야 백군을 지원하여 극동공화국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도록 했다. 대련회담에서 극동공화국을 압박하려는 의도였다.

1921년 11월 30일 일본군의 지원을 받은 백군은 시베리아 철도를 따라 진격을 시작했다. 쉬마코프구와 우수리역에 장갑 열차와 볼자닌 직속 보병 및 기병 2,500명으로 구성된 카벨네프군이 집결하였다. 이들은 곧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과 한인 빨치산 부대들이 주둔하고 있던 이만을 향해 공격을 시작하였다. 시베리아 내전의 최후 단계인 연해주 해방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만의 대한의용군

카벨네프 백군이 이만으로 진격하던 당시 이만에는 대한의용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대한의용군은 서간도에서 조직된 군비단의 군사부가 연해주로 건너와서 재조직한 부대였다. 정식 명칭이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군비단은 1919년 중국 장백현(長白縣) 지역에서 조직된 단체였다. 군비단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를 구매하던 중 연해주 일대에서 한인 빨치산 통합 부대를 결성하려는 계획을 알게 되고 여기에 참가하기 위해 군사부를 연해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1921년 3월부터 9차례에 걸쳐 부대를 나누어 연해주 이만으로 이동하였다. 연해주 이만에 도착한 군비단은 새롭게 대한의용군사의회를 조직하고 군사의회 산하에 사관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3개 중대로 이루어진 대한의용군의 사령관은 헤이그밀사 이준의 아들인 이용이었다. 이용대한의용군의 사령관일 뿐만 아니라 그 산하에 사관 양성을 위해 설립된 사관학교의 교장을 맡고 있었다. 한운용김홍일이 교관으로 있던 사관학교는 6개월 과정으로 약 50명의 생도가 교육을 받았다. 이를 기반으로 편성된 대한의용군의 사령관에는 이용, 1중대장 겸 참모로 임표, 2중대장에 한운용, 3중대장에 김홍일이 임명되었다. 소대장은 김동명, 이빈, 강신우, 박흥, 마춘걸, 마건, 이성춘, 오동명 등이었으며 병력은 357명이었다.

카벨네프 백군이 북쪽으로 대대적인 공격을 시작하자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제6연대장 С. 세리세프는 전군에 동원령을 발포함과 동시에 대한의용군에게도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대한의용군사의회는 회의를 열어 전투에 참가할 것을 결정하고 1921년 12월 2일 사령관 이용 명의의 동원령을 내렸다. 곧 대한의용군 전 부대가 집합하여 사령관으로부터 출전 명령을 받고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과 함께 전선으로 이동하였다.

이후 “원동 해방전의 첫 희생자”이자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기 위한 극동 지역 노동자들의 영웅적인 투쟁의 역사에서 위대하고 잊을 수 없는 한 페이지를 차지한” 한운용 중대의 이만 방어 전투가 벌어졌다. 뛰어난 전과를 거둔 이만 전투는 희생으로 인해 살아남은 많은 빨치산들의 회고에 거의 빠지지 않고 남겨졌다.

대한의용군의 철수

1921년 12월 2일 이만으로 진격하고 있던 백군에 대항해 출동하라는 동원령에 따라 대한의용군의 모든 부대는 이만으로 집결했다. 대한의용군은 이곳에서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사령부로부터 무기를 지급받았다. 이전까지 제대로 된 무장을 하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12월 3일 밤 3개 중대로 이루어진 대한의용군은 전열을 갖추어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과 함께 백군을 공격하기 위해 출동하였다. 이들은 강행군을 거듭하여 무라비예프-아무르스키(Муравьев-Амурский)역을 지나 우수리강에 도착했다. 정찰대가 와서 백군이 이미 우수리역에 나타났다는 보고를 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의용군 부대와 인민혁명군은 즉각 전투태세에 돌입하였다. 그런데 사령부로부터 전투를 미루고 일단 그라프(Граф) 마을까지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왔다. 부대들은 곧 철수하였다. 인민혁명군은 철도를 따라, 대한의용군은 우수리강을 따라 질서정연하게 퇴각하였다.

인민혁명군의 퇴각을 알아차린 백군은 즉각 공격을 시작했다. 그들은 정면 공격과 함께 철도 연선의 오른쪽으로부터 인민혁명군을 포위하며 이만으로 접근했다. 인민혁명군과 대한의용군이만과 그라프 사이에서 포위당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백군에게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인민혁명군은 빠르게 그라프를 지나 이만까지 퇴각하기로 결정했다. 대한의용군 1중대, 3중대와 인민혁명군은 급히 이만으로 향했다. 대한의용군 2중대만이 그라프에 남겨졌다.

12월 4일 어둠이 걷히지 않은 새벽 5시 대포의 포격과 기관총 사격을 앞세운 백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포연이 이만 시가지를 뒤덮었다. 백군의 강력한 공격에 밀린 인민혁명군은 이만으로 진입하는 요충지인 이만 철교를 버리고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혁명군 사령부는 즉각 이만 북쪽 비킨(Бикин)역으로 퇴각했으며, 부대들도 사령부의 뒤를 따랐다. 대한의용군 1, 3중대는 퇴각하는 인민혁명군의 후미에서 철수 부대를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사령관 이용의 명령에 따라 이만 철교를 지키기 위해 1중대 1소대가 남았다. 아침 7시 백군의 전초 부대가 이만 철교에 나타났다. 주위가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1소대는 그들이 백군인지 인민혁명군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백군은 기습적으로 사격을 가했다. 소대장 윤동선과 소대 군정 위원 주병록, 그리고 2명의 병사가 적탄에 쓰러졌다. 남은 소대원들은 급히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은 곧 비킨으로 퇴각하는 본대에 합류했다. 이만은 별다른 저항없이 백군의 수중에 떨어지고 말았다.

한운용 중대의 이만 전투

문제는 그라프에 남겨졌던 대한의용군 2중대였다. 한운용이 지휘하는 2중대는 본대와의 연락이 끊어진 채 백군의 포위망 속에 남겨졌던 것이다. 그라프에서 밤을 지새운 한운용 중대는 본대를 쫒아 이만으로 퇴각했다. 이들은 이만이 이미 백군에게 점령당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한운용 중대는 어떤 의심도 품지 않고 대열을 갖추어 이만역으로 접근했다. 때는 정오 무렵이었다. 이만을 점령하고 역 근처에 보병과 기병을 배치해 두고 있던 백군 역시 역으로 접근하는 부대를 적이라고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들도 자신들이 이미 반나절 전에 점령한 이만 부근에 인민혁명군이 남아있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이다.

상대를 먼저 알아본 것은 한운용 중대였다. 둘 사이의 거리가 약 200m 가량 남았을 때 한운용은 이만역에 주둔한 부대가 자신들의 본대가 아니고 백군 부대임을 알아차렸다. 한운용은 즉각 산개하여 사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운용 중대는 백군을 향해 강력한 공격을 퍼부었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던 백군은 이 뜻밖의 공격에 당황하여 30분 만에 백기를 올렸다. 한운용 중대는 백군을 포로로 잡고 부상자들을 정돈하면서 전투 정리에 들어갔다.

그러나 승리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한운용 중대의 뒤를 이어 무라비예프-아무르스키역으로부터 약 1,500명에 이르는 백군 부대가 도착한 것이다. 항복하던 백군들은 자신들의 본대를 알아보고서는 들었던 백기를 부러뜨리고 다시 사격을 가했다. 한운용 중대는 곧 자신들보다 수십 배 많은 적들에게 포위되었다. 전투를 해서는 승산이 없었다. 항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운용 중대는 항복하기를 거부하고 최후의 한사람까지 싸우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곧 적들을 향해 맹사격을 가했다. 백군 측으로부터 총탄이 비 오듯이 쏟아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격소리가 끊어졌다. 탄약이 떨어진 것이다. 한운용 중대와 함께 전투에 참가했던 약 30여 명의 인민혁명군들 중 절반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죽더라도 결코 항복하고자 하지 않았던 대한의용군 병사들은 곧 백병전에 돌입했다. 불행히 그들의 총에는 총검이 장착되어 있지 않았다. 개머리판으로, 맨몸으로 백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던 그들은 하나둘씩 쓰러져갔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던 전투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대한의용군 2중대원들은 모두 쓰러졌다. 그러나 아직 전투가 끝나지 않았다. 중상을 입고 동지들의 시체들 속에 파묻혀 있던 중대장 한운용과 소대장 강신우, 분대장 엄관호, 윤상원, 한익현은 전투가 끝났다고 생각하고 시체를 정리하던 백군을 향해 마지막 권총 사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18명의 백군이 더 죽었다. 50여 명의 한운용 중대는 전멸했지만 백군의 피해는 이보다 훨씬 컸다. 백군은 사망자 약 600명에 부상자가 200여 명에 달하는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만 전투의 영웅들

전투가 끝난 후 18군데에 칼을 찔린 채 시체더미 속에 누워 있던 마춘걸은 밤이 되자 기어서 이만의 한인 농가들 중 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응급 처치를 받은 마춘걸은 곧 이만을 탈출하였다. 김치율과 김덕현은 부상당한 상태로 적십자에 의해 발견되었다. 그들은 병원에서 도망하는 데 성공하였다. 전투 후 3일이 지나고 이만의 한인 주민들은 시체를 거두어 눈 속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한운용 중대는 마춘걸, 김치율, 김덕현 3명의 생존자를 제외하고 전원 전사했다. 이들의 희생 덕분에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과 대한의용군 1중대, 3중대는 안전하게 후방으로 퇴각할 수 있었다. 이날 전사한 대한의용군 군인들의 신원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행히 각종 기록들에서 이름은 확인할 수 있다. 각종 기록들에 나타나는 전사자 명단은 다음과 같다.

중대장 한운용, 소대장 강신우[강위], 윤동선, 강성도, 분대장 주병록, 윤상원, 이종설, 한익현, 양만혁, 리룡문, 강학서, 포병대장 한진천, 사령부 주계 김춘호, 군인 이봉조, 김봉수, 김정욱, 김천선, 한병훈, 엄관호, 김학호, 박규문, 박배근, 박경림, 박용석, 박춘심, 박경천, 김윤원, 서창락, 정치주, 엄주순, 김명선, 김영순, 심대현, 최봉춘, 김용문, 이형극, 김형곤, 김만규, 최진팔, 최진봉, 최흥용, 엄길수, 이재근, 이춘영, 심해운, 지순서, 조봉옥, 장원준, 김대현, 헌병 김관덕, 최영민, 통역 강표도르, 교원 박홍.

이들은 옛 군비단원과 자유시로부터 이동해 온 병력, 그리고 이만 현지에서 모집된 인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1922년 4월 6일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이 이만을 탈환한 후 눈 속에 임시로 매장되어 있던 대한의용군 2중대원들의 시체가 동지들과 한인 주민들에 의해 이만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1956년 이들이 안장된 합동묘지 부근에 추도비가 건립되었다. 추도비에는 “연해주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위한 전투(1921~1922)에서 죽어간 러시아와 조선 빨치산들에게 바친다”라고 적혀 있다.

이만 전투의 영향

이만 전투에서 한운용 중대의 불굴의 투쟁으로 인해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과 대한의용군의 1중대, 3중대는 후방 비킨 지역으로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운용 중대의 저항이 이만 지역 한인들에게 남긴 대가는 컸다. 이 전투에서 600명 이상이 전사하는 큰 피해를 입은 백군은 재러 한인들에 대해 극히 가혹한 태도를 취하였다. 백군은 이만 점령 후 종래 소비에트 적군과 관계하던 한인민회를 해산하고 친일적인 한인들로 구성된 새로운 민회를 조직하여 이만 지방 한인에 관한 사무를 총괄하게 하였다. 그리고 소비에트 적군과 관계한 한인을 체포하여 구금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른 일반 한인들에 대해서도 엄격한 조사를 취했다. 예를 들어 가택 수사를 할 때 만약 청년이 신을 신고 있는 것을 보면 누구를 막론하고 구금, 투옥하여 한인들은 아예 외출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백군의 태도로 인하여 이만의 한인들은 백군에 대해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하고 있었다.

한편 이만 전투에서 한운용 중대의 희생은 백군으로 하여금 이만의 한인들에게 가혹한 태도를 취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지만 이후 전투에서 백군이 한인 부대와 정면으로 맞서는 것을 꺼리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했다. 한인 부대의 용기를 두려워한 백군은 계속되는 전투에서 대한의용군의 방어선 쪽은 회피하곤 했다. 그래서 소비에트 적군 장교들도 “이르보! 페료드![여보! 앞으로!]”라는 대한의용군의 구령을 배워 사용하곤 했다고 한다. 즉 맞서는 부대가 한인 부대인 것처럼 속여 백군의 사기를 꺾어 놓고자 했던 것이다. 실제로도 대한의용군한운용 중대의 희생을 발판삼아 이후 백군 및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가장 용감하게 싸웠다. 그리하여 연해주 해방 전쟁사의 첫머리에 대한의용군의 이름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이만역 방어 전투의 역사적 의미-항일 전투

대한의용군 한운용 중대의 이만전투는 러시아 지역의 한인 부대가 러시아 내전 과정에서 백군에 맞서 싸운 전투였다. 그러나 시베리아에 출병한 일본군이 백군을 지원하고 있었고, 대한의용군이 백군에 맞선 전투를 조국의 해방을 한 과정으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이만 전투는 해외에서 전개된 우리 민족 해방 운동의 한 과정인 항일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십월 혁명 십주년과 쏘베트 고려 민족』(십월혁명십주년 원동기념준비위원회 편찬, 해삼위도서주식회사, 1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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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독립운동사 자료집-홍범도편』(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 『해외의 한국 독립운동사료 12-독립군의 수기』(국가보훈처, 1995)
  • 윤상원,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1918~1922)」(고려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0)
  • Ким Сын-Хва, 『Очерки по истории советских корейцев』(Алма-Ата: Наука, 1965)
  • Ким Сын Бин, 『Очерк партизанского движения Корейцев на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1918~1922)』(1981)
  • В. Д. Ким, 『Туманган пограчная река』(Изд. Узбекистон,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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