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우리 독립운동사 최대의 비극 ‘자유시 사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러시아 아무르주 스보보드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1년 6월 28일
정의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아무르주 자유시에서 단일한 독립군단을 창설하기 위해 결집한 한인 무장부대들이 군통수권을 두고 갈등을 빚다 고려혁명군이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의 힘을 빌어 대한의용군을 무장해제시키는 과정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한 비극적 사건.

개설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동휘는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 무장 부대들을 통합하여 단일한 대규모 독립군단으로 일본과 독립 전쟁을 치룰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1920년을 ‘독립 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소련과 비밀 협정을 체결한 후 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무장 부대들을 시베리아의 자유시[свободный]에 집결시켜 대규모 독립군단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간도에서 홍범도 부대, 최진동의 독군부, 허재욱의 의군부, 안무의 의군부 그리고 북로군정서 군대가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연해주에서는 니항(尼港) 군대와 이만 군대, 다반 군대 그리고 이전에 간도에서 연해주로 넘어갔던 독립단군대가 이동하였다. 자유시의 자유대대까지 합하면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의 수는 2,000명을 넘어섰다. 1921년 3월 중순 이들을 통합하는 ‘전한의병대회’가 개최되어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 또는 ‘대한의용군’이라고 부르는 통합 부대가 창설되었다.

그러나 전한의병대회 개최와 대한의용군의 창설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갈등이 생겨났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대한의용군의 창설을 인정하지 않고 새롭게 ‘고려혁명군’을 창설하기로 하고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였다. 이로부터 자유시에 있던 한인 무장 부대의 통수권을 둘러싸고 대한의용군고려혁명군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두 부대의 갈등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권위와 무기와 식량의 공급이라는 현실적 고려 때문에 고려혁명군측으로 기울어졌다. 1921년 6월 19일 열린 군 간부 전체회의에서 고려혁명군으로 모든 한인 무장부대를 통합한다는 결정안이 통과되었다. 그러나 결정안이 통과된 이후에도 고려혁명군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이전 자유대대 지도자들의 전력 시비와 고려혁명군 편제를 둘러싼 대한의용군의 불만이 해소되지 않아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고려혁명군정의회고려혁명군으로 넘어오지 않은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 해제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결국 1921년 6월 28일 고려혁명군은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2군 29연대의 지원을 받아 자유시 인근 수라세프카 마을에 주둔한 대한의용군에 대한 무장 해제를 단행하였다. 무장 해제 결과 공식적으로는 36명이 사망하였으며, 59명이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나 피해자 측은 400~600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하여 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 무장 부대를 하나로 통합하려던 노력은 사할린 부대를 제외한 나머지 부대만으로 이루어진 고려혁명군을 조직함으로써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게다가 이 과정에서 빚어진 큰 희생은 이후 민족 해방 운동의 과정에서 계속해서 큰 짐이 되었다.

자유시로 모여든 독립군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난 후 러시아는 내전에 휩싸였다. 러시아 혁명에 반대하던 제국주의 열강은 백군(白軍)을 지원하며 내전에 개입하여 대규모 간섭군을 파견하였다. 일본은 7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연해주로 파병하여 연해주와 시베리아 일대를 장악하였다. 이에 러시아령에 거주하던 한인들은 빨치산 부대를 조직하고 적군(赤軍)과 함께 일본군과 백군에 대항한 무장 투쟁을 벌였다. 하바롭스크에서는 한인사회당적위군이 조직되어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며, 수찬[水淸], 수이푼[秋風] 등지에서도 한인 빨치산 부대들이 조직되었다. 연해주 한인들의 무장 투쟁은 곧 중국령 간도에도 파급되어 1920년 봉오동과 청산리에서는 독립군이 일본군에 큰 승리를 거두는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경신참변(庚申慘變)을 일으키며 대규모 토벌 작전을 벌인 일본군에 밀린 독립군 부대들은 러시아령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1919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 국무총리로 취임한 이동휘는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 무장 부대들을 통합하여 단일한 대규모 독립군단으로 일본과 독립 전쟁을 치를 계획을 세웠다. 이에 따라 1920년을 ‘독립 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소련과 비밀 협정을 체결한 후 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무장 부대들을 시베리아의 자유시에 집결시켜 대규모 독립군단을 결성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 간도에서 홍범도 부대, 최진동의 독군부, 허재욱의 의군부, 안무의 의군부 그리고 북로군정서 군대가 자유시로 이동하였다. 연해주에서는 니항(尼港) 군대를 필두로 이만 군대, 다반 군대 그리고 이전에 간도에서 연해주로 넘어갔던 독립단군대가 이동하였다. 이미 자유시에 조직되어 있었던 자유대대까지 합하면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의 수는 2,000명을 넘어섰다. 1921년 3월 중순 자유시 인근 마자노보에서 이들을 통합하는 ‘전한의병대회’가 개최되어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 또는 ‘대한의용군’이라고 부르는 통합 부대가 창설되었다.

무장 부대 통합을 둘러싼 갈등

그러나 전한의병대회 개최와 대한의용군의 창설을 둘러싸고 내부에서 갈등이 생겨났다. 자유대대가 갈등의 진원지였다. 대한의용군 창설에서 배제되었던 자유대대의 지도자들은 연해주 4월 참변 이후 아무르주로 이동해 있던 대한국민의회 지도자들과 함께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설치되어 있던 이르쿠츠크로 눈길을 돌렸다. 극동 지역의 혁명 운동을 총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한 코민테른 극동비서부대한의용군의 창설을 인정하지 않고 새롭게 고려혁명군을 창설하기로 하고 고려혁명군정의회를 조직하였다. 이로부터 자유시에 있던 한인 무장부대의 통수권을 둘러싸고 대한의용군고려혁명군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1921년 3월 중순 이르쿠츠크에서 러시아인 칼란다리시빌리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김하석최고려를 위원으로, 오하묵을 부사령관으로 하는 임시고려혁명군정의회(臨時高麗革命軍政議會)가 조직되었다. 여기에는 소련의 5군단 산하 코카서스 기병 600여 명과 합동민족연대 내 한인부대 600여명이 부속되었다. 예전 자유대대의 부대장이었던 오하묵이 먼저 임시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자유시로 돌아왔다. 임시군정의회는 계속해서 대한의용군에게 자유시로 와서 통합할 것을 주장하였다. 5월 19일 이르쿠츠크를 출발한 합동민족연대의 병력 600여명이 자유시에 도착했다. 6월 6일에는 칼란다리시빌리가 카자크 기병 120명을 이끌고 도착하여 정식 고려혁명군정의회가 성립되었다.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위원장은 칼란다리시빌리였고, 두 명의 위원은 최고려와 유동렬이었다. 이제 한인 무장 부대 통합의 주도권은 명분에서나 세력에서나 고려혁명군 쪽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주도권을 쥔 고려혁명군정의회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간도에서 온 독립군 부대들은 군정의회를 중심으로 한 통합으로 그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홍범도안무, 최진동은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마자노보를 떠나 자유시로 이동했고, 이청천도 군정의회에 의해 고려혁명군 교관으로 선임되었다. 그리고 나머지 부대들도 자유시로 이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즉 간도로부터 이동해 온 독립군 부대 대부분은 이제 통합의 주체를 고려혁명군정의회로 인정하였다. 간도에서 온 무장 부대들이 고려혁명군정의회 측으로 옮겨 간 것은 ‘무장 부대 통합’이라는 명분과 ‘소련 및 코민테른의 권위’에 대한 인정, 그리고 ‘무기 및 식량의 원활한 공급’이라는 현실적 조건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 또한 군정의회가 이르쿠츠크로부터 대동하고 온 군대, 즉 합동민족연대의 한인부대 600여 명과 카자크 기병 600여 명으로 구성된 군정의회 군대의 강력한 무장력에 대한 인식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간도의 무장 부대들은 자유시로 이동해 무장 부대 통합에 대한 군정의회의 주도권을 인정했다. 또한 마자노보에 있던 사할린 부대는 군정의회의 명령에 따라 자유시에서 약 3㎞ 떨어진 소도시 수라세프카로 이동하여 주둔하였다. 그리고 6월 19일 무장 부대 통합을 위한 모든 한인 무장 부대의 군 간부 전체 회의가 소집되었다. 전체 회의에는 300여 명 정도가 참석했는데 여기에서 고려혁명군정의회 중심으로 무장 부대를 통합한다는 결정안이 통과되었다. 이 결정에 따라 무장 부대는 이제 하나로 통합되기만 하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이에 따라 6월 26일 고려혁명군정의회는 3개 연대로 이루어진 고려혁명군 편제 명령서를 발부하였다. 이 편제안의 핵심은 특립사할린빨치산부대를 축소하는 데 있었다. 그러자 이 편성안에 대해 사할린 부대 장병들은 극렬히 저항했다. 고려혁명군 편제를 둘러싼 대한의용군의 불만과 고려혁명군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는 이전 자유대대 지도자들의 전력 시비로 무장 부대 통합은 난항을 겪게 되었다. 이에 대해 군정의회의 칼란다리시빌리는 몇차례의 권고와 타협을 시도했다. 그러나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결국 사할린 부대에 대한 무장 해제를 결정하였다.

1921년 6월 28일의 사건

1921년 6월 28일 고려혁명군정의회의 요청에 따라 자유시수비대 29연대는 수라세프카에 주둔하고 있던 사할린 부대를 비롯한 한인 무장 부대에 대해 무장 해제를 단행했다.

1921년 6월 28일 새벽 6시 29연대 연대장 말라호프는 고려혁명군정의회 사령관 칼란다리시빌리로부터 수라세프카의 한인 부대들이 해산하라는 자신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무장 해제 요청이었다. 무장 해제 요청을 받은 말라호프는 한인 부대에 무기를 내놓고 항복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냄과 동시에 전투 준비에 돌입했다. 곧 29연대는 수라세프카 평원을 포위했다.하지만 무장 해제는 곧바로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29연대 사령부와 칼란다리시빌리사할린 부대에게 다시 한 번 항복할 기회를 주기로 했다. 사할린 부대 내에서 의견 일치를 볼 시간으로 7시간이 주어졌다. 이 7시간 동안 무장 충돌을 막기 위한 각종 노력이 계속되었다. 고려혁명군정의회사할린 부대는 최후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교섭과 회의를 계속했다.

오후 2시 사할린 부대 지휘관들은 자신들에게 다시 3시간의 여유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29연대 사령부는 더 이상 작전의 실행을 미룰 수가 없었다. 2시 20분 29연대 병력 1,000명과 고려혁명군정의회에 속한 한인 병사 300명은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29연대 사령관 말라호프의 지휘 아래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 개시와 동시에 장갑차 부대가 움직였다. 2시 30분 사할린 부대 측으로부터 응사가 있었다. 29연대와 고려혁명군정의회 병사들은 기관총과 대포를 쏘며 공격하였다. 30분 만인 오후 3시쯤 전선은 평정되었다. 3시 50분 29연대는 반항하는 병사들을 진압하고 수라세프카 들판으로 진입했다. 장갑차를 앞세운 기갑부대는 수라세프카역에 도착했다. 결국 4시 수라세프카 들판의 한인들은 백기를 들고 항복했다. 일부는 무기를 버리고 제방 쪽으로 달아나기도 했다. 5시 15분 수라세프카 들판의 한인들은 무장 해제되어 포로로 생포되었다. 제방 쪽에서는 전투가 계속되었다. 저녁 8시 17분 전투는 거의 정리되었다.

8시 10분 쉬사노프카역으로부터 제2 기갑부대가 도착했다. 세 곳에 한인들이 남아 있었다. 공동묘지와 섬에 일부가 남아 있었고 2개 중대 병력은 보르다고 방향으로 도망쳤다. 그중 섬에 있던 병력 약 300명은 포위되어 항복했다. 여기에는 안무(安武)의 국민회군대가 속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체포되었으나 다음날 모두 석방되었다.

공동묘지에는 사령부와 약 300명의 병사가 있었는데 그들은 백병전 끝에 포로로 잡혔다. 무장 충돌 과정에서 실제로 피해를 입은 병력은 바로 공동묘지 부근에 있던 그룹과 보르다고 방향으로 도망한 병력이었다. 공동묘지 부근에 있던 병력은 백병전 끝에 포로로 생포되었다고 하는데 이 과정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해가 진 뒤 벌어진 최후의 돌격전에서 40명 이상이 사망했다고 하는 기록은 바로 이것을 얘기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보르다고 방향으로 도망한 그룹은 제야강에 빠져 익사했거나, 도망했거나, 행방불명이 된 병력이라고 생각된다. 이들은 연해주 아누치노에서 온 독립단부대와 간도에서 건너온 허재욱의 의군부 군대였을 가능성이 크다.

마침내 상황은 종료되었다. 29연대는 피해 상황을 촬영하고 무기는 임시로 기갑부대에 인계하였다. 포로들은 고려혁명군정의회에 인도되었다.

자유시 사변의 피해

무장 해제를 둘러싼 가해자 측과 피해자 측의 입장은 시작, 경과, 결과에 대해 매우 달랐다.

군정의회 측의 문서에 따르면 자신들이 몇 차례에 걸쳐 협상을 통해 무장 해제를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저항하던 사할린 부대 측에서 먼저 발포하여” 할 수 없이 교전을 시작했으며 “피해자는 사망 36명, 포로 864명, 불참한 자 19명, 도망한 자가 34명 그리고 행방불명 59명”이라고 했다. 그러나 사할린 부대 측의 입장을 옹호하는 문서는 “칼란다리시빌리의 부대가 급작스럽게 공격을 개시하여 왔으며” “사할린 빨치산부대는 백기를 들고 저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비무장인들을 찌르고, 부수고, 사살했다.”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사망자 수를 400~600명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듯 상반된 주장에 따르면 사망자의 수가 차이가 많이 나지만,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사할린 부대 측의 커다란 희생에 비해 군정의회 측의 피해는 경미하였다는 점이다. 이로 볼 때 사할린 부대 측에서 적극적인 무력 대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정의회 측 또한 살상을 통해 무장 해제를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희생자는 거의 자유시수비대 29연대 병력들이 수행한 작전 지역에서 발생했다. 간도에서 온 독립군들이 러시아어를 이해하지 못했던 점도 피해를 키운 한 원인이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피해자의 대부분은 허재욱의 의군부 부대원들이었다.

자유시 사변의 처리

한인 무장 부대의 통합에 걸림돌이 되었던 사할린 부대를 무장 해제시킨 후 고려혁명군정의회는 포로로 생포한 864명 중 죄질이 무겁다고 인정되는 자들 500여 명을 재판에 회부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사할린 부대의 군인들이었다. 그리고 간도로부터 온 독립군 부대의 병사들 중 자유시로 옮겨 오지 않고 사할린 부대에 남아 있던 군인들 364명은 군정의회군대에 편입시켜 고려혁명군으로 재편성되었다.

재판에 회부된 500여 명 중 범죄 행위에 가담했다고 인정된 428명은 극동공화국 제2 군단에 인계되었다. 그들은 이후 ‘죄수 부대’로 편성되어 우수문(Ушумун) 벌목장에서 강제 노동에 종사했다. 강제 노동은 1년 이상 지속되었다. 벌목 작업은 매우 고된 노동이었다.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할당된 책임량을 완수해야만 하였다. 작업 중 부상자가 속출했다. 많은 사람들이 강제 노동에 지쳐 쓰러졌다.

나머지 72명은 중대 범죄자로 분류되었다. 주로 장교들이었던 이들은 7월 30일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고려혁명군정의회가 조직한 ‘임시고려군사혁명법원’에서 재판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재판은 11월까지 계속되었다. 고려혁명군의 기관지인 『붉은군사』에 이 재판의 결과가 게재되었다. 재판위원장은 채동순이었으며, 위원은 홍범도박승만이었다. 1921년 11월 27일부터 30일까지 4일 동안 자유시 사변 피고인으로 재판에 회부되어 판결을 받은 사람은 50명이었다. 이들 중 3명에게 징역 2년, 5명에게 징역 1년, 24명에게 1년간 집행 유예, 17명은 방면하여 군대에 종사케 한다는 판결이 내려졌다.

한편 자유시 사변 이후 고려혁명군은 재편성되었다. 이들은 조·중 국경 지대로 출동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7월 5일 고려혁명군에게 이르쿠츠크로 회군하라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명령이 내려졌다. 이에 따라 8월까지 1,745명에 이르는 한인 군대가 이르쿠츠크에 도착했다. 이르쿠츠크로 돌아온 후 군정의회는 취소되고 이들은 1개 여단으로 재편성되었다.

자유시 사변의 역사적 의미

간도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한인 무장 부대를 하나로 통합하려던 노력은 사할린 부대를 제외한 나머지 부대만으로 이루어진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함으로써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물론 고려혁명군 지휘부는 재러 한인 부대의 통일이 일단 이루어진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통합의 노력을 해 왔고 그 결과 통합 부대인 고려혁명군을 조직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할린 부대의 배제와 다수 군인들의 희생으로 인해 통합의 성과마저 퇴색되었다. 그리고 이 희생은 이후 민족 해방 운동의 과정에서 계속해서 큰 짐이 되었다. 예를 들어 자유시 사변에 대한 극단적인 대응이 테러로 나타났다. 한인사회당의 일원이던 조응순은 자유시 사변의 책임자들을 처벌하기 위해 1921년 9월 하얼빈에서 테러 단체 ‘결사대’를 조직했다. 이들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대한국민의회의 주요 간부들을 추적했다. 급기야 이들은 12월 18일 상해에서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의 중앙 위원이던 이성을 저격했다. 이성은 다리 두 군데에 관통상을 입었다.

그러나 자유시에서의 불상사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관련됐던 이들은 이후에도 민족 해방 운동과 무장 투쟁을 방기하지 않았다. 자유시에서 고려혁명군을 조직했던 무장 부대의 성원들은 이후 연해주와 간도의 민족 해방 운동과 공산주의 운동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연해주에 남아있던 무장 부대들과 자유시 사변을 피해 연해주로 돌아갔던 사할린 부대 일부는 이만에서 재조직된 전한군사위원회(全韓軍事委員會)의 지휘 아래 대한의용군(大韓義勇軍)으로 통합되어 연해주 해방 전쟁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극동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참고문헌
  •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 자료편』2(아세아문제연구소, 1976)
  • 김준엽·김창순, 『한국공산주의운동사』1(청계출판사, 1986)
  • 임경석, 『한국 사회주의의 기원』(역사비평사, 2003)
  • 윤상원, 「러시아 지역 한인의 항일 무장 투쟁 연구(1918~1922)」(고려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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