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1910년대 항일 운동의 표면 단체와 비밀결사의 관계-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정의

1911년 러시아 연해주 한인 사회의 자치 기관으로 항일 운동의 표면 단체인 권업회와, 이면 단체로서 민족 운동을 지도하는 비밀결사인 대한광복군정부에 대한 개관.

개설

1911년 러시아 연해주 한인 사회의 자치 기관으로 등장한 권업회는 표면적으로는 실업 장려를 표방하고 있었지만 독립군 양성을 근본 목표로 설정한 항일 단체였다. 이러한 권업회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1914년 독립군을 주축으로 국내외의 모든 민족 독립운동을 주도할 중추 기관으로 탄생한 대한광복군정부였다.

권업회의 결성

1908년 연해주 의병이 국내 진공 작전을 펼치고, 십삼도의군을 결성하는 등 연해주 한인들은 비록 국외에서나마 조국의 국권 회복을 위해 분투 노력하였으나 국망은 현실화되었다. 조국을 잃은 연해주 한인 사회의 민족 운동 지도자들은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조국 독립운동의 방략을 구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최고의 이념을 ‘조국 독립’에 두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으로 한인의 자치 결사를 조직하게 되었다. 권업회(勸業會)의 조직이 곧 그것이다.

권업회는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新韓村)에서 창립되었다. 러시아 연해주 한인 사회에 집결한 중요 항일 민족 운동 지도자가 회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권업회의 창립 발기는 1911년 5월 19일 이종호(李鐘浩), 김익용(金翼瑢), 강택희(姜宅熙), 엄인섭(嚴仁燮)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고, 1911년 5월 20일에 57명의 찬동자가 총회를 개최하여 창립되었다. 임원으로는 회장에 최재형(崔在亨), 부회장에 홍범도(洪範圖)가 각각 선임되었고, 창립 회원은 물론 간도 지방에서까지 여러 민족 운동가가 초청되어 각 지방에 회원 권유 위원으로 파견되어 급속한 회세 확장이 시작되었다.

권업회는 대외적인 활동의 편의를 위하여 러시아 당국의 공인을 신청하여 연해주와 흑룡주에서 절대 권력을 가진 극동 총독 곤닷치의 허가를 얻었다. 1911년 12월 19일에 다시 총회를 개최하여 회칙을 정비하고 그에 따른 임원을 선출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이때 권업회를 대표하고 실질상 운영 책임자가 되는 의사부(議事部) 의장에는 이상설, 부의장에는 이종호가 선임되었다. 그리고 1911년 12월 19일을 권업회의 공식적인 창립일로 설정하였다.

권업회를 조직한 연해주 한인들은 서북파, 북도파, 기호파 등으로 불리는 파벌을 이루고 있었다. 이상설, 이범윤, 김학만, 유인석 등은 기호파였으며, 이강, 정재관, 차석보 등은 서북파, 그리고 이종호, 이동휘, 최재형, 김병학, 김익용 등은 북도파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이들 여러 계파는 조국 독립이라는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단합을 이룩하고 단일 결사인 권업회를 결성하였다.

권업회라는 명칭의 의미

권업회는 회칙에서 한인의 실업을 권장하고 한인의 직업과 일터를 알선하며 생활의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저축을 장려하고 상애 상신의 친목을 도모하여 문명의 행동을 도모하자는 것으로, 결국 한인 사회를 위한 경제주의 단체를 표방하였다. 그러나 회칙에서 제시된 활동 목표는 권업회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일부 혹은 이면에 지나지 않았다.

권업회는 처음부터 가장 효과적이고도 강력한 항일 독립운동 기관으로 결성되었다. 다만 이름을 권업회라 한 것은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공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 점은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계봉우가 쓴 「아령실기(俄領實記)」에서 “회명을 권업이라 함은 왜구의 교섭상 방해를 피하기 위함이요, 실제 내용은 광복 사업의 대기관으로 된 것이다.”라고 기술한 내용과, 1912년 권업회 발회식에서 최재형이 “우리 동포는 한갓 국권 회복을 부르짖으나 자활의 길이 서지 않으면 하등의 공을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각자 일하여 재력을 만들고 상당한 준비를 하여 일조 기회가 도래하면 일거에 한국의 독립을 회복할 것이다.”라고 갈파한 대목에서도 짐작된다. 또한, 극동 총독 곤닷치도 권업회를 인가해 줄 때 그러한 내막을 알고 있었으며 스스로 명예 회원으로 추대되었다.

결국 권업회의 목적과 이념은 연해주 한인 사회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권업[경제] 문제와 독립운동을 강력히 추진하는 항일[정치] 과제를 결부시키는 전술을 취하면서 끝내는 조국 독립을 달성하려는 데 있었다. 권업회는 종래의 항일 단체보다 진일보한 조직과 이념을 갖고 창립되어 회세를 연해주 전역은 물론 북간도와 동북만 목릉하(穆陵河) 유역의 한인 사회에까지 확대시키면서 효과적인 활동을 펼쳤다.

권업회의 조직과 임원

권업회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여러 계보의 핵심 인물들이 모여 한인 사회의 경제적 향상과 조국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조직된 결사이다. 이를 조직적인 측면에서 검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권업회는 최고 권능을 총회에 두는 일반 결사의 체제를 따르는 듯이 보였지만, 총회에서 선출한 의사원으로 구성되는 의사부가 실제 운영을 맡고 있었다.

둘째, 권업회에는 5명에 이르는 총재단을 두고 회의 중대사에 대한 교시와 의사부의 자문에 응하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1911년 12월 총회에서 추대된 5명의 총재단은 수총재 유인석을 비롯하여 이범윤, 김학만, 최재형, 최봉준 등 한인사회의 최고 원로급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셋째, 권업회는 의사부에 회의 핵심 권능을 두었다. 의사부는 총회에서 선출된 3명 내지 9명의 의사원으로 구성되고 그중에서 의장과 부의장이 선임되어 권업회를 운영하고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제도이다. 1911년 12월 총회에서 선출된 의사원은 이상설, 이종호, 김익용, 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이민복, 김성무, 윤일병, 김만송, 홍병환 등이었다.

넷째, 권업회에는 총회와 의사부의 결의로 계획 또는 의결된 사무의 집행을 담당하는 집행부를 두었다. 의장이 총람하고 총무가 사무를 총괄하는 이 집행부는 마치 국무를 분담하듯이 13부를 두고 각 부는 부장과 2명의 부원을 두어 분담업무를 집행하게 하였다. 이들 각 부에서 분담 집행하는 사항은 무엇이든지 의사부에 제출하도록 하여 의사부 우위의 운영 체제를 확립하고 있었다. 집행부 각부의 임원 역시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한 연해주 한인 사회의 인재들을 망라하면서도 그 인물들이 되도록 적절한 소임을 담당하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권업회는 두 차례에 걸친 총회에서 이와 같은 중앙 조직을 끝내고, 곧이어 한인이 많이 거주하던 러시아 연해주 전역에 걸쳐 지회와 분사무소를 설치하여 재러 한인 사회를 효과적으로 조직하였다. 현재까지 알려진 지회는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니콜라예프스크, 흑룡강, 이만 등의 시와 노보키예프스크[연추], 알렉산드로프스크, 티우제, 그로데코보 등의 지방과 아누치노 및 바라바시 지역까지 결성되었다. 지회도 중앙 조직과 유사하게 3~9인의 의사원으로 구성하는 의사부를 두고 그 의장이 지회장까지 겸임하였다. 그 밖의 부서는 총무, 재무, 서기, 검사원 등의 임원을 두었다.

권업회는 창립 후 회세 확장과 사업 진척에 따라 회원 수도 크게 증가하였다. 1913년 10월경에는 총회원이 2,600명에 달하였고, 1914년 무렵에는 정초에 6,405명이던 회원 수가 권업회 해체기가 되면 8,579명에 달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권업회의 활동

권업회 기관지인 『권업신문』은 1912년 4월 22일에 창간되었다. 권업회 창립과 함께 항일 민족 언론의 약진을 기하고, 권업회의 사업을 홍보하기 위하여 발행하였다. 권업회 신문부에서는 총무에 한형권, 주필겸 부장에 신채호, 부원에 박동원, 이근용을 선임하여 시설을 보완하고 러시아 당국의 허가를 얻어 주간으로 간행을 시작하였다. 『권업신문』권업회의 지회와 분사무소를 통하여 연해주 구석구석의 한인 촌락까지도 보급되었다. 국내는 물론 서북 간도와 미주 등지의 한인 사회까지도 보급에 힘썼다. 때로는 신문사 사원을 직접 각처의 한인 촌락으로 파견하여 동포의 애국 정신을 환기시켜 민족의식 고취에 큰 구실을 하였다.

권업회는 또한 조국 독립이라는 목표 달성을 위하여 교육 진흥에 특히 역점을 두었다. 그 내용은 철저한 민족주의 근대 교육에 있었고, 이를 통하여 조국 독립의 인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권업회『권업신문』과 강연회 등을 통하여 교육 진흥을 역설하였다. 권업회는 민족주의 교육열을 더욱 고취시키기 위해 먼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 있던 한인 학교인 계동학교를 확대 개편하여 대규모의 한민학교로 확장하고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민족주의 교육의 중추 기관으로 삼았다.

권업회는 각지의 한민회를 주도하면서 한인의 자치와 러시아 관헌과의 행정 관계를 담임하는 한편 토지 조차와 귀화 등의 사무까지 취급하였다. 이와 같은 사업도 모두 권업회가 표방한 한인의 실업 권장에 관련이 있고 나아가 한인 사회의 경제력 향상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권업회 설립 전후의 연해주 한인 사회의 경제적 기반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대체로 가난한 농민의 이주가 주류를 이룬 한인 사회였던 까닭에, 경우에 따라서는 국내보다 경제적 기반이 향상된 것이라 할 수 있으나,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 기반이 완전히 갖추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려웠다. 더구나 조국 독립운동을 추진하는 기반으로서는 실업 권장을 통하여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다지는 데 그치는 것만이 아닌, 비약적인 경제력 향상이 절실하였다. 그러므로 권업회는 이와 같은 큰 과제를 성취하기 위해 앞장섰던 것이다.

권업회의 이면 단체 대한광복군정부

권업회의 조직과 운영에서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각 지방 한민회를 비롯한 각종의 한인 결사를 효과적으로 연계한 점이다. 그중 한민회는 연해주 한인 사회 성립 이래 가장 오랜 전통을 가진 자치 기구이며 재러 한인 사회 발전의 핵심 조직이었다. 각처에 조직된 한민회의 임원은 거의 권업회의 중요 인물이 겸임하여 운영하고 있었다. 예컨대, 연해주 한인 사회의 중심인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한민회의 회장에는 권업회의 외교부장인 김병학이 권업회 창설 직후 선임되었고, 이 한민회 운영의 의결 기구인 평의원회의 평의원에는 권업회 의장인 이상설을 비롯하여 최학만, 이상운, 차석보, 김치보권업회 중요 임원이 선임되었다. 이 밖에도 각지 한인 사회에서 결성된 국민회, 청년회, 공제회, 상민회, 교육회 등의 각종 결사나 기타 6의형제, 21의형제파와 같은 결사 동맹에 이르기까지 그 중요 임원은 거의 권업회의 임원 혹은 회원으로 선임하였다.

이러한 권업회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 주는 것이 이면 단체로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수립한 것이다. 연해주 한인 사회의 자치 기관으로 등장한 권업회는 독립군 양성을 근본 목표로 설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독립 전쟁론’ 구현에는 독립군 양성이 전제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의 나라에서 공공연히 군대를 양성하기란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권업회에서는 독립군 양성의 기반이 되는 민족주의 교육 진흥과 농상공업 등 실업 권장을 전면에 내세우고, 독립군 양성은 가능한 한 비밀리에 추진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의 결실은 1914년 독립군을 주축으로 국내외의 모든 민족 독립운동을 주도할 중추 기관으로 탄생한 대한광복군정부였다. 대한광복군정부의 건립 과정이나 내용을 소상히 알려 주는 자료는 극히 드물지만, 권업회에서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추진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실로 미루어 상당히 조직적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사관 학교를 설치하여 독립군의 중견 간부를 양성하려 하였다. 1913년부터 동북만 수분대전자 나자구에 권업회 중요 임원들인 이종호, 이동휘, 김립, 장기영, 김하석, 오영석, 김규면, 전일 등이 대전학교라 부르는 사관 학교를 세워 운영하고 있었다. 재학 생도의 정확한 수는 밝힐 수 없지만 상당수에 달했으며, 독립운동사상 최초의 사관 학교였다.

둘째는 독립군의 군영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러시아 극동 총독과 교섭을 벌여 적당한 토지의 조차를 여러 곳에 추진하였다. 겉으로는 한인의 집단 이주 개척을 추진하는 듯했지만, 실질상 군영지 마련과 독립군의 훈련을 목적으로 추진한 사업이었다. 권업회에서 추진하던 독립운동 기지 건설 구상은 중국과 러시아의 접경지를 대상으로 하여 한인들을 집단 이주시킴으로써 연해주와 남북 만주 일대에 널리 형성된 한인 사회를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추진하려 하였다.

셋째는 양군호와 해도호라고 불리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비밀결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양군호와 해도호는 겉으로는 잡화점 같은 상점에 불과하나 속으로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비밀결사였다. 양군호는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의 조창호 집에 러시아어로 양군호라는 간판을 단 잡화상을 차리고 이춘식과 전의근 등이 점원이 되어 상행위를 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독립군 양성을 위한 비밀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물론 잡화상의 수입도 군자금으로 전용되었다. 또한, 해도호는 연해주와 인접한 북간도 훈춘(琿春)에 있던 상회로 그 명칭도 연해주의 ‘해’와 간도의 ‘도’에서 연유하였다. 객주가를 차리고 황중현이란 주인을 두어 북간도와 연해주 간에 중개 무역을 하였다. 그러나 그 회원은 권업회의 중진들인 이종호, 김익용 등이 포함된 비밀결사였다.

이와 같이 권업회가 주관하여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양성된 독립군의 인원이나 그들의 무장 상태를 명백히 알려 주는 자료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자료를 통해서 그 대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다. 일제 군경에 의해 압수된 신한청년단의 문서 속에 포함된 「각처 군용 정세 상세(各處軍容情勢詳細)」에 의하면, 블라디보스토크의 사범학교 공지에서 총기를 소지하고 훈련받는 병력이 29,365명이었고, 무기는 총기 13,000정에 총탄 50만 발을 수장하고 있었으며, 이 병력과 군비를 이상설이 주관하고 있었다.

대한광복군정부의 역사적 의미

대한광복군정부권업회의 최고 이념인 독립 전쟁론의 구현을 주도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건립 시기는 한인의 ‘연해주 이민 50주년이 되는 해’에 맞추었다. 권업회에서는 이 시기를 이용하여 민족의식을 높이고 독립군의 군자금도 마련하고자 하였다. 1914년은 러일 전쟁 10주년에 해당되어 연초부터 새로운 러일 전쟁이 임박했다는 여러 풍설이 팽배하여 있었다. 이 시기를 이용하여 권업회에서는 이상설을 비롯하여 이동휘, 이동녕, 이종호, 정재관 등이 중심이 되어 블라디보스토크대한광복군정부를 건립하였다. 그리하여 이상설을 정도령(正都領)으로 선출하고 국내외 모든 독립운동을 주도하면서 독립군 항전을 준비하였다. 「아령실기」에는 이러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기원 4247년[1914] 갑인에 지(至)하여 아국(俄國) 경성(京城)으로부터 각 지방을 통하여 아일 전쟁(俄日戰爭) 십 년 기념회 된 결과로 복수열이 극정(極頂)에 달하여 다시 개선될 조짐이 비조즉석(非朝卽夕)에 재(在)함에 이상설, 이동휘, 이동녕, 이종호, 정재관 제씨의 주모로 아중(俄中) 양령에 산재한 동지를 대망라하여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정도령을 선거하여써 군무를 통할케하니 첫째는 이상설 씨요 그 다음은 이동휘 씨가 되었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곧 일제에 의한 민족 수난기에 각지에서 설립되는 망명 정부 가운데 최초로 건립되는 망명 정부의 효시가 되었다. 그리고 ‘광복군정부’라 이름한 이유는 민족의 군대가 되는 독립군[광복군]을 주도하여 일제와의 독립 전쟁을 총괄하는 군사 정부의 성격을 지녔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것은 또한 청일 전쟁 이후 근 20여 년 동안 집요하게 전개되어 온 의병의 항일전이 독립군의 항전으로 전환, 계승되는 의미를 가진다.

권업회와 대한광복군정부의 해산

대한광복군정부는 1914년 9월 모체가 된 권업회와 더불어 러시아의 전시 체제 확립으로 탄압을 받아 활동을 하지 못하고 그 이름만 유전하는 임시 정부가 되고 말았다. 제국주의 실리에 밝은 러시아와 일본이 대전 발발과 함께 동맹국으로 제휴하여 한인의 정치, 사회 활동을 탄압하였기 때문이다. 즉, 러시아는 일본과 공동 방위 체제를 확립하면서 자국 내에서의 한인의 모든 정치, 사회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에 따라 권업회도 해체되고 『권업신문』도 정간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인의 정치, 사회 활동에서 중요한 인물은 가차 없이 투옥되고 추방당하였다. 군정부도 치명적 타격을 받아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역사에 그 이름만 유전하고 말았다.

볼셰비키 혁명 이전 제정 러시아 시기에 연해주 한인의 민족 운동은 러시아와 일본의 외교 관계 추이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 매우 불안정한 형세에 놓여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이후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수년간 연해주 한인의 모든 활동이 극도로 위축되는 것도 결국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차 대전 발발 직후, 러시아 당국은 권업회 등 한인 단체 해산 조치와 함께 이강, 정재관, 이상설, 이동휘, 이종호 등 저명한 한인 지도자들을 비롯한 비귀화 한인들에 대한 체포 추방령을 내림으로써 일시에 한인들의 활동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연해주 한인 지도자들 가운데 이상설, 이갑 등 일부는 이때 사망하였으며, 일부는 피체 투옥당하고, 혹은 만주로 이동하거나 잠적하여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뒤 1917년 2월 혁명이 발발하면서 그동안 억눌려 있던 연해주 한인의 활동은 새로운 국면을 맞아 활발히 움직이게 되었다. 그 결과 러시아 혁명 후 제일 먼저 한인의 자치 기구를 결성하려는 움직임이 1917년 6월 2일 러시아 전역의 한인 대표 96명이 참석한 가운데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개최된 전로한족대표자회로 결실을 보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이후 공산주의라는 신이념이 개재되는 상황에서 러시아 한인 사회는 새로운 활동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러시아 지역의 한인 사회와 민족 운동사』(교문사, 1994)
  •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조국 광복만을 위해 살다 간 민족의 거인』(범우사, 1998)
  • 계봉우, 「아령실기」(『독립신문』, 1920. 2. 20~1920.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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