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안중근 의사가 자신을 ‘대한의군 참모중장’이라고 지칭한 이유-연해주 의병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개항기
상세정보
정의

1908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결성된 연해주 의병의 우영장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한 안중근 이야기.

개설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 이후 재판정에서 자신이 대한의군의 참모중장이므로 형사범이 아닌 전쟁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주장하였다. 이는 안중근이 1908년 결성된 연해주 의병의 우영장으로 의병 부대를 이끌고 국내 진공 작전을 벌였던 활동에 근거를 두고 있다.

대한의군의 참모중장 안중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의거를 결행한 안중근은 재판정에서 자신의 의거가 정당함을 다음과 같이 당당하게 주장했다.

“그것은 3년 전부터 내가 국사를 위해 생각하고 있었던 일을 실행한 것이나, 나는 대한의군(大韓義軍)의 참모중장(參謀中將)으로서 독립 전쟁을 하여 이등(伊藤)을 죽였고 참모중장으로서 계획한 것으로 도대체 이 공판정에서 심문을 받는 것은 잘못되어 있다.”

곧, 자신의 의거는 단순한 ‘살인’이나 ‘보복’의 차원이 아니라 의병이 수행한 독립 전쟁의 한 과정, 혹은 결과였음을 당당히 천명한 것이다. 따라서 자신을 형사범이 아닌 전쟁 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하였다. 안중근이 재판정에서 이런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근거는 무엇일까? 바로 의거 이전 자신이 이끌고 국내 진공 작전를 벌였던 연해주 의병의 존재였다.

안중근의 연해주 망명

안중근은 1907년 8월 서울에서 군대 해산의 참경을 목도한 후 이에 충격을 받고 곧장 망명길에 올랐다. 8월 4일 기차편으로 부산에 내려갔으며, 부산에서는 선편으로 원산으로 북상한 뒤 육로를 거쳐 8월 16일 북간도 용정에 도착하였다. 안중근은 두 달 가량 주로 불동(佛洞)의 천주교인 ‘남회장(南會長)’ 집에 머물며 서전서숙(瑞甸書塾)에도 출입하는 등 용정 등지를 무대로 분주하게 활동하였다. 하지만 북간도의 현실은 여의치 않았다. 이미 이곳에는 일제의 대륙 침략 첨병인 통감부 간도 임시파출소가 설치되어 한인의 민족 운동을 탄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안중근은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갔으며, 1907년 10월 20일 연추(煙秋)[현 크라스키노]를 지나 해삼위(海蔘威)[현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갔다.

당시 연해주는 항일 민족 운동의 새로운 무대로 급격히 대두되고 있었다. 1863년 이래 형성되기 시작한 연해주 한인 사회는 1905년 을사조약 늑결 이후, 1907년 정미7조약과 군대 해산을 계기로 민족 운동가들이 대거 이곳으로 망명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아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 기지로 부상하였다. 국외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본산으로서의 연해주 한인 사회의 역할은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때까지 지속되었다. 안중근연해주로 망명한 것은 이곳에서 발흥하던 왕성한 민족 운동의 분위기와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을사조약 늑결 이후 안중근은 구국 운동의 방편으로 교육 사업을 벌여 진남포에서 삼흥학교(三興學校)와 돈의학교(敦義學校)를 운영하였다. 하지만 광무 황제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목도하고 이에 충격을 받은 안중근은 구국의 원대한 포부를 지닌 채 국내 탈출을 결행하여 당시의 시대적 추이에 따라 연해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연해주 의병의 창설

1904-1905년 러일 전쟁은 한인의 연해주 한인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굶주린 농민들의 이주뿐 아니라 정치적 망명지로서 이주도 급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망명자들의 증가는 러일 전쟁 패배에 따른 러시아 전체의 반일 움직임과 더불어 연해주를 반일 운동의 중심지로 자리 잡게 하였다. 러시아 극동 연해주의 반일 운동은 1908년부터 조직된 연해주 의병의 국내 진공 작전에서 그 절정에 이른다.

연해주 의병은 크게 보아 두 계통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는 연해주에 형성된 러시아 이주 한인 사회 내에서 조직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국내에서 의병 활동을 전개하다 북상하여 연해주로 건너간 망명자들이다. 전자의 중심에는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가장 신망이 두터웠던 최재형(崔在亨)이 있었다. 후자는 1906년 초 휘하의 충의대를 이끌고 연해주로 망명한 간도 관리사 이범윤(李範允)이 중심이었다. 이 두 세력이 서로 협력하여 연해주 의병을 형성하였다. 연해주 의병의 편성 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최재형, 이범윤 두 사람은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줄곧 무장 투쟁을 주장하는 노선의 양대 축을 형성하면서 이후 연해주 의병을 유지, 운영하는 실무에서부터 국내 진공 작전에 이르기까지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런데 이 연해주 의병은 국내에서 활동하던 단위 의병 부대들과는 달리 기본적으로 단일 부대로 편성되어 있지 않았다. 여러 의병장들의 휘하에 편성된 대소 단위 부대들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형태였다. 그 결과 일정한 편제나 엄격한 명령 계통이 상존해 있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의병을 주도한 인물들의 성향이 다양했던 점과 한인이 연해주 넓은 지역에 산재해 있었다는 점에 기인하였다. 그러므로 각기 분산된 의병 세력을 통합하여 운영하기 위한 방편으로 결사의 성격을 지닌 의병 단체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동의회(同義會)창의회(彰義會)가 결성되었다.

동의회는 1908년 5월경 연추에서 결성되었다. 동의회는 이주 한인 간의 결속 도모와 환난 구제를 표방하면서 결성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항일 의병을 추진하기 위한 결사의 성격이 강하였다. 결성 초기 임원으로는 최재형이 총장, 이범윤이 부총장을 담당했으며, 그 아래 회장에 이위종, 부회장에 엄인섭이 각각 선임되었다. 그 뒤 1909년 말 동의회이범윤이 배제되고 최재형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동의회가 결성되던 초기에는 다양한 성격의 인물들이 대거 모여들어 의병을 추진하였으므로 이범윤도 동참하였으나, 이후 이범윤최재형 사이에 갈등이 노정되면서 동의에서 이범윤 세력이 배제되고 최재형 중심으로 운영되어 간 듯하다. 한편 이범윤 역시 연추에 본부를 둔 창의회를 설치, 운영하고 있었다.

안중근동의회 결성에 처음부터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 결성 당시 선거에서 이위종이범윤을 누르고 부총장이 되는 데 큰 영향을 끼쳤으며, 평의원으로 실제 업무를 담당하는 중심 간부 중의 한 명이었다.

안중근이 이끈 연해주 의병의 국내 진공 작전

동의회창의회가 중심이 된 연해주 의병의 대규모 국내 진공 작전은 1908년 7월에 전개되었다. 즉 전제익(全濟益) 이하 안중근, 엄인섭 등이 인솔하는 200~300명의 연해주 의병이 두만강 대안에 대기해 있다가 7월 7일 강을 건너 경흥군 홍의동(洪儀洞)으로 진격해 들어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최재형이범윤은 국내 진공 작전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동의군의 우영장(右營將)으로 국내 진공 작전에 참가하여 한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동의회 의병은 최고 지휘관인 도영장(都營將)이 좌영장, 우영장 양익(兩翼)을 거느리는 체제를 기간으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양익 편제는 국내 진공 작전 때에도 그대로 준용되었다. 그러므로 도영장 전제익(全濟益)을 필두로 좌영장 엄인섭과 우영장 안중근이 동의군을 이끈 최고 지휘관들이었다. 이 편제에서 보듯이 안중근은 곧 연해주 의병의 핵심 간부로 항일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야전 지휘관이었다.

안중근은 국내 진공 작전의 일환으로 휘하 의병을 이끌고 1908년 7월 7일 포시예트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넜다. 안중근이 거느린 의병 부대는 도강 후 두만강 대안의 경흥군 홍의동(洪儀洞)에서 항일전을 개시하였다. 홍의동은 경흥읍에서 남동쪽으로 10여㎞ 떨어진 두만강 부근에 있는 마을이었다. 이들은 곧 경흥으로부터 출동한 일본군과 첫 전투를 벌여 일본군 척후보병 상등병 이하 4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홍의동을 습격한 의병은 곧 북상하였다. 경흥읍 남쪽 두만강 대안의 고읍동(古邑洞)을 경유한 부대는 두만강을 따라 북상을 계속한 끝에 9일에는 경흥읍 아래 신아산(新阿山)까지 진출한 뒤 10일 새벽에 그곳 헌병 분견대를 습격하였다. 이때 엄인섭 부대는 경흥의 두만강 상류를 도강한 뒤 홍의동에서 북상한 안중근 부대와 합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일부 경흥 방면으로 도주하였으며, 하사 이하 5명은 행방불명이 되고 1명이 전사하는 등 참패하였다.

홍의동 전투 후 두만강을 따라 일시 북상한 뒤 엄인섭 부대와 합류하여 신아산 승첩을 이룩한 것은 안중근 부대였다. 이때 행방불명으로 보고된 일본군들은 의병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안중근에 의해 인도적 차원에서 석방되었다. 안중근은 일본군 포로 석방 당시 이에 완강히 반대하던 동료들을 설득하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장교들이 불평하며 내게 말하기를 ‘어째서 사로잡은 적들을 놓아주는 것이오?’ 하므로 나는 대답하되, ‘현재 만국공법에 사로잡은 적병을 죽이는 법은 전혀 없다. 어디다가 가두어 두었다가 뒷날 배상을 받고 돌려보내 주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이 진정에서 나오는 의로운 말이라, 안 놓아주고 어쩌겠는가.’ 하였더니 여러 사람들이 말하되 ‘저 적들은 우리 의병들을 사로잡으면 남김없이 참혹하게도 죽이는 것이요, 또 우리들도 적을 죽일 목적으로 이곳에 와서 풍찬노숙해 가면서 그렇게 애써서 사로잡은 놈들을 몽땅 놓아 보낸다면 우리들이 무엇을 목적하는 것이오.’ 하므로 나는 대답하되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 적들이 그같이 폭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들이 다 함께 노하는 것인데, 이제 우리들마저 야만의 행동을 하고자 하는가. 또 일본의 4,000만 인구를 모두 다 죽인 뒤에 국권을 도로 회복하려는 계획인가. 저쪽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약하고 저들은 강하니, 악전(惡戰)할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충성된 행동과 의로운 거사로써 이토의 포악한 정략을 성토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서 열강의 동정을 얻은 다음에라야, 한을 풀고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니, 그것이 이른바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진 것으로써 악한 것을 대적한다는 그것이다. 그대들은 부디 많은 말들을 하지 말라.’ 하고 간곡하게 타일렀다.”

안중근은 만국 공법에 의거하여 인류 정의와 도덕적 견지에서 동료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일본군 포로들을 석방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불만을 품은 의병들이 대오에서 다수 이탈하게 되었고, 특히 엄인섭 부대는 의견 충돌로 인해 연해주로 귀환하고 말았다.

이처럼 안중근이 수행한 홍의동 전투와 신아산 전투는 연해주 의병이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면서 항일전을 수행한 가운데 거둔 대표적 승첩에 해당된다. 이 두 전투는 연해주 의병이 국내로 진공해 온 초기, 곧 의병의 전투력이 비교적 강력하고 사기가 고조되어 있던 시기에 거둔 승첩으로 일본군에 대한 선제 공격이 주효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해주 의병의 패배-영산 전투

연해주 의병이 홍의동과 신아산을 비롯하여 두만강에 연한 국경 지대를 장악하면서 일본군 수비대를 연이어 격파하자, 이른바 한국 주차군의 동부 수비구사령관 마루이 마사쓰구[丸井政亞] 소장은 경성(鏡城)에 있던 제49 연대장에게 의병의 퇴로를 차단하여 포위할 것을 긴급히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신아산이 습격을 받은 다음날인 11일 아침에는 청진 수비대 병력 70명이 웅기로 급파되었고, 회령으로부터 1개 중대를 신아산 방면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경성에서는 1개 중대를 회령으로 올려 보내는 등의 병력 이동과 배치를 통해 관북 변경 지방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시도하였다.

이처럼 집중적인 탄압이 가해지는 상황에서 연해주 의병은 ‘13일 동안 30여 차나 교전’을 벌여야 했을 만큼 심한 압박을 받았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불리한 상황에서 회군하기를 주장한 엄인섭의 의견에 따라 안중근 휘하 의병까지 대부분 철수하게 되었고, 이에 50명 정도 남았던 안중근 휘하의 의병과 우덕순이 거느리는 부대가 합진하게 되었다. 당시 우덕순안중근과는 계열을 달리하는 창의군의 한 부대를 인솔하고 있었다. 즉 홍의동과 신아산 승첩 이후 연해주 의병은 동의군과 창의군 양 진영이 공동으로 작전을 전개하였다.

7월 11일에는 300여 명의 의병이 경원읍 외곽 30리 지점에 위치한 융동(隆洞)까지 진출, 경원읍을 공략하려 하였다. 이에 상황이 다급해진 일제는 우편취급소 직원들을 훈융(訓戎)으로 긴급 대피시키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1일 오후에는 다시 경원읍에서 불과 4㎞ 떨어진 지점까지 진출해 경원을 위협하기에 이르렀다.

일단의 의병은 12일에도 덕명(德明)에서 출동한 일본군 척후병을 상대로 고아산(古阿山) 하면(下面)의 북방 2.5㎞ 지점에서 1차 전투를 벌인 끝에 1명을 사살하고 1명을 부상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 의병은 이어 같은 날 다시 회령에서 파견된 제9 중대 소속의 일본군 27명과 신건원(新乾原) 서쪽 수정리(水汀里)에서 격전을 벌여 상등병 1명을 사살하였다.

이상과 같이 관북 변경 지대에서 활동하던 연해주 의병은 이후 내륙 지방으로 행군을 하여 동남방에 있는 회령 방면으로 진출하였다. 이들이 회령 지경에 출현하는 것이 18일경이므로, 거의 1주일에 걸쳐 행군을 계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동안 이들은 몇 개의 부대로 나뉘어 도처에서 일제 군경과 전투를 벌이며 진격하였다. 연해주 의병은 7월 18일 회령 남방 약 2㎞ 지점까지 진격한 것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이 전투에 참가한 의병 수는 400명 규모로 짐작된다.

안중근 부대를 비롯한 연해주 의병은 회령군 영산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영산 전투는 곧 연해주 의병이 수행한 마지막 전투였다. 이 전투에서 참패한 연해주 의병은 이후 사방으로 분산되어 일부는 연해주로 귀환하고, 나머지 무산(茂山) 방면으로 남하를 계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영산 전투에 대해 안중근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일본 병정들이 습격하므로 충돌하기 4, 5시간 동안 날은 저물고 폭우가 쏟아져서 지척을 분간키 어려웠다. 장졸들이 이리 저리 분산하여 얼마나 죽고 살았는지조차 진단하기가 어려웠으나 형세가 어쩔 길이 없어 수십 명과 함께 숲속에서 밤을 지냈다. 그 이튿날 60, 70명이 서로 만나 그동안의 사연을 물었더니 각각 대를 나누어 흩어져 갔다는 것이었다.”

위 인용문을 통해서 영산 전투 당시 매우 고단했던 의병 측의 형세와 전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안중근은 영산 전투 참패를 계기로 이후 연추로 귀환하였다. 영산 전투 직후 전투 현장을 탈출하는 과정에 우덕순안중근과 갈화춘, 김영선을 만나게 되었다.

국내 진공 작전 실패로 인한 충격

안중근은 영산 전투에서 참패한 직후 자결을 결심하였을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 참패 직후 그가 지은 다음 시에 당시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

“사나이 뜻을 품고 나라 밖에 나왔다가[男兒有志出洋外]

큰일을 못 이루니 몸 두기 어려워라[事不入謀難處身]

바라건대 동포들아 죽기를 맹세하고[望須同胞誓流血]

세상에 의리 없는 귀신은 되지 말거나[莫作世間無義神]”

안중근연추로 귀환한 일시는 정확히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자서전의 귀환 과정을 기술한 대목에서 안중근이 한 달 반 동안 국내에 체류해 있었다고 밝힌 점과 국내로 진공했던 연해주 의병의 일부가 종성 간도로 8월 하순 퇴각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1908년 8월 말 혹은 9월 초 정도로 짐작된다. 안중근은 그동안 겪었던 심신의 극심한 고통과 세궁역진(勢窮力盡)한 고단한 형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기술하였다.

“(영산 전투 후 탈출한 뒤 찾았던 민가의) 노인에게 감사하고 작별한 뒤에 그의 지시대로 하여 몇 날 뒤에 세 사람이 모두 무사히 (두만)강을 건넜다. 그제사 겨우 마음을 놓고, 한 마을집에 이르러 몇 날 동안 편안히 쉰 다음에 비로소 옷을 벗어보니 거의 다 썩어서 몸을 가릴 수가 없고 이가 득실거려 셀 수조차 없었다. 출전한 뒤로 전후 날짜를 헤아려 보니 무릇 한 달 반인데, 집 안에서 자 본 일이 없이 언제나 노영(露營)으로 밤을 지냈고, 장맛비가 그침 없이 퍼부어 그동안의 백 가지 고초는 붓 한 자루로는 적을 수가 없다. 나는 노령 연추 방면에 이르렀다. 친구들이 서로 만나서도 알아보지 못하였다. 피골상접(皮骨相接)하여 전혀 옛적 모습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 번 만 번 생각해 보아도, 만일 천명(天命)이 아니었더라면 전혀 살아 돌아올 길이 없는 일이었다.”

위에서 안중근은 극심한 고초 속에서도 생환할 수 있었던 것은 ‘천명(天命)’ 때문이었다고 회고하였다. 연추 귀환 후 친구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국내 진공 한 달 반 동안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영산 전투 참패 후 안중근이 마음속에서 “옛날 미국 독립의 주인공인 워싱턴이 7, 8년 동안 풍진 속에서 그 많은 곤란과 고초를 어찌 능히 참고 견디었던고. 참으로 만고에 둘도 없는 영걸이로다. 내가 만일 뒷날에 일을 성취하면 반드시 미국으로 가서, 특히 워싱턴을 위해서 추상하고 숭배하고 기념하며 뜻을 같이 하리라.”라고 하여 모진 고통을 이겨내고 미국 독립의 영웅이 된 워싱턴을 뼈저리게 경모하였던 사실도 자신이 겪었던 엄청난 고통을 워싱턴에게 가탁(假託)한 이유라 할 것이다.

연해주 의병의 의미

국내 진공 작전의 실패 이후 1910년을 전후해서 연해주 의병 지도자들은 그동안 각기 독자적 의병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전력의 분산을 가져와 효과적인 항전을 벌일 수 없었던 점에 공감하고 연해주와 북간도 일대의 의병을 단일 군단으로 통합하여 작전과 지휘를 한 계통으로 통일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와 같은 구상과 노력은 항일 의병 전쟁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유인석(柳麟錫)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그 노력은 1910년 6월 21일 십삼도의군(十三道義軍)의 편성으로 구현되었다. 하지만 십삼도의군이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은 매우 짧았다. 의군이 편성된 지 활동을 미처 개시하기도 전인 8월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삼도의군의 편성은 을미의병 이후 십수 년간 전개되어 온 항일 의병의 국외 확대의 결정이었다. 비록 십삼도의군은 국내 진공 작전 등과 같은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못한 채 한일 합병을 맞고 말았지만, 이후 연해주 등지에서 펼쳐지는 국외 민족 운동의 한 연원으로 그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다.

즉, 연해주 의병은 연해주 지역의 한인 사회를 기반으로 국외 독립운동의 한 연원을 형성하였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 시베리아 내전기에 펼치지는 러시아 극동 지역 한인 빨치산 운동의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참고문헌
  • 『한국 독립운동사-자료 6·7·13』(국사편찬위원회, 1968~1984)
  • 박민영, 『대한제국기 의병 연구』(한울, 1998)
  • 『안중근 전기 전집』(윤병석 옮김, 국가보훈처, 1999)
  • 신운용, 「안중근의 의병 투쟁과 활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54,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8)
  • 반병률, 「러시아에서의 안중근의 항일 독립운동에 대한 재해석」(『한국독립운동사연구』34,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 박민영, 「안중근의 연해주 의병 투쟁 연구」(『한국독립운동사연구』3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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