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수이푼[秋風]에 자리잡은 원호촌-추풍사사, 그리고 여호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정의

1863년 이후 러시아 연해주 수이푼 평야 일대에 자리잡은 대표적인 재러 한인 마을들.

개설

1863년 러시아령 연해주로 처음 이주한 이후 한인들은 연해주 각지로 퍼져 나가 재러 한인 마을을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남칠사(南七社) 북사사(北四社)’라고 불린 러시아로 입적한 한인[원호인]들이 만든 마을들은 연해주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이었다. 수이푼강을 둘러싸고 광활하게 펼쳐져 있는 수이푼 평야에는 추풍4사(秋風四社)라고 불린 대표적인 4개의 원호인 마을들, 즉 푸칠로브카[육성촌], 코르사코프카[허커우], 크로우노브카[황커우], 시넬리코보[영안평, 대전자]가 있었다.

수이푼 평야에 펼쳐진 한인 마을

블라디보스토크와 함께 연해주의 대표적인 도시인 우수리스크시[과거의 니콜스크우수리스크]는 발해 15부(府)의 하나인 솔빈부(率賓府)의 소재지로 추정되고 있다. 우수리스크추풍이라고 불리는 그 서쪽 일대에 핏줄처럼 흐르고 있는 수이푼강의 명칭이 바로 ‘솔빈(率濱)’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수이푼은 이 지역에 살았던 원주민들의 말에서 비롯된 지명으로, 수분하(隋分河)의 중국식 전사(轉寫)를 반영한 것이다. 또한 우수리스크에는 발해 때 축조된 남성(南城)과 금나라 때 축조된 서성(西城) 등 두 개 성터가 있다. 이곳은 청나라 때는 쌍성자(雙城子)라고 불리기도 했고, 송나라에서는 황제가 구금됐던 곳이라는 의미로 송황령(宋皇嶺), 송왕령(宋王嶺)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이후 러시아 역사에서 현재의 우수리스크는 1866년 러시아 아스트라한주(州)로부터 이주한 농민들이 수이푼강의 지류인 라코브카(Речка Раковка)강 하구의 강변에 니콜스코예[Никольское] 마을을 형성한 때로부터 시작된다. 이후 니콜스코예는 1898년 4월 시로 승격되면서 니콜스크우수리스크로 개칭됐다. 그리고 1935년 스탈린의 측근인 국방인민위원 보로실로프(Климент Ефимоич Ворошлов)의 이름을 따서 보로실로프로 개칭됐다. 스탈린 사후인 1957년 보로실로프는 다시 현재의 우수리스크로 이름이 바뀌었다. 우수리스크는 서북쪽으로 북만주를 가로질러 통하는 중동 철도(中東鐵道)와 북쪽으로 하바롭스크로 연결되는 우수리 철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하다.

우수리스크를 지나 동남쪽으로 흐르며 부챗살처럼 뻗어 있는 수이푼강[綏芬河][현재의 라즈돌나야강]과 그 지류 유역에 과거 수많은 한인 마을들이 분포해 있었다. 이 지역은 러시아 최대의 한인 거주지였을 뿐만 아니라, 연해주의 곡창 지대라 할 만큼 근면한 한인들에 의해 농산물이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곳이다. 또 한편으로 중국과의 국경 지대 산골에 위치한 숱한 빈농 마을들은 시베리아 내전기에 항일 무장 독립군과 빨치산 부대들의 근거지가 되기도 했다.

수이푼 평야에는 이른바 추풍4사로 불렸던, 우수리스크시 서쪽 일대 강 유역에 위치했던 대표적인 4개의 한인 마을인 푸칠로브카(Пуциловка), 코르사코프카(Корсаковка), 크로우노브카(Кроуновка), 시넬리코보(Синельково)가 있었다.

푸칠로브카육성촌의 개척

추풍4사 가운데 그 형성 과정에 관해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은 푸칠로브카 마을이다.

1867년에 ‘최’라는 성을 가진 한 한인[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 지신허를 개척한 최운보(崔運寶)로 추정]이 동네 사람의 부탁으로 러시아 지방을 다녀오기로 했다. 최씨의 여행 목적은 러시아 지역에 궁핍한 농민들이 살 수 있는 곳이 없는가를 알아보는 것이었다. 최씨블라디보스토크, 포시에트, 니콜스크예 등 남부 우수리 지방의 거의 모든 지역을 둘러보았다. 최씨는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사람들에게 남부 우수리 지방의 생활과 농업상의 조건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리고 1867년 12월 경흥의 궁핍한 농민들 150가구가 당국의 허가 없이 포시에트 구역의 연추 마을로 무단 이주를 감행했는데, 이곳에는 이미 30가구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 이들이 연추 마을에 도착하기까지는 2개월, 그 과정에서 이들이 겪었을 고통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3개월이 지난 후 이들 가운데 일부는 연추 마을에 남았다. 나머지 한인들은 연추 마을을 떠나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이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868년 3월이었다. 1개월 후 몇 가구는 이곳에 남았고, 나머지는 행정 당국의 허가를 받아 기선을 타고 라즈돌노예역[하마탕역]으로 보내졌다. 이들은 정착지를 특별 할당해 줄 것을 러시아 당국에 청원했다. 이에 연해주 당국은 수이푼강의 오른쪽 분지를 할당하기로 하고 관리 푸칠로(Пуцило)를 파견했다. 다시 일부는 라즈돌노예에 정착하기 위해 남고, 나머지 가구들이 푸칠로를 따라 수이푼강의 지류인 류치헤자강[Речка Лючихеза][현재의 카자취카강(Речка Казачка)] 오른편 분지에 정착했다.

니콜스코예 마을로부터 서쪽으로 약 26㎞에 있는 최초의 한인 마을은 러시아 관리 푸칠로의 이름을 따서 ‘푸칠로브카’라고 하였다. 1869년 4월의 일이다. 재러 한인들은 푸칠로브카 마을을 육성촌(六城村)이라고 했는데, 마을 옆의 강 이름 즉, 바로 ‘6개의 지류를 가진 강’이란 뜻의 류치헤자[六岐河子]에서 따온 것이다.

이곳에 처음 정착한 한인 가구는 10가구였다. 이들은 배치되자마자, 중국식과 조선식을 모방해 거처할 집과 다른 용도의 건물들을 지었다. 그러나 원래 푸칠로브카 마을이 들어선 분지는 사람이 근접할 수 없는 잡림이 빽빽하게 들어찬 황무지였다. 이주 한인들은 매년 분지를 뒤덮고 있는 삼림들을 베어내었고, 몇 년 만에 오래된 참나무 몇 그루 외에 16~17㎞에 달하는 분지를 덮고 있던 삼림이 사라졌다.

일단 거처할 집을 마련한 뒤 정착민들에게 절박했던 것은 일용할 식량이었다. 이들은 소, 말과 같은 가축이나 주요한 농기구조차 없어 몇 안 되는 목재나 철제의 호미와 도끼를 갖고 거의 맨손으로 땅을 일궈 채소와 곡식을 파종할 밭을 마련했다.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종자를 제공받다 조, 감자, 옥수수를 심었다. 1870년 러시아 당국은 땅의 경작을 위한 경작용 소 한 쌍을 푸칠로브카 마을에 제공해 더 많은 땅을 개간할 수 있게 했다. 러시아 당국은 이와 함께 파종용 종자를 구입할 수 있도록 은화 30달러를 지원하였는데, 이 돈으로 농민들은 국경 지대의 중국 마을인 산차거우[三岔口]의 중국인들로부터 종자를 구입했다.

러시아 당국은 또한 당시 수이푼강 일대를 횡행하고 있던 홍후즈[紅鬍賊][붉은 수염을 한 중국인 마적]로부터 마을을 방어할 수 있도록 2개의 권총을 줬다. 가을이 되자 푸칠로브카 마을 한인들은 수확한 농작물 중 일부를 자급용으로 남기고 나머지는 산차거우의 중국인들에게 팔았다. 푸칠로브카 마을의 농민들은 곡식을 판 자금으로 소와 말을 사 기르고 이를 위한 축사를 마련했고, 고난의 3~4년을 거친 후에는 제법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게 됐다.

이로 인해 푸칠로브카 마을의 주민수는 늘어났다. 1869년 정착 당시 10가구에 불과했던 것이 1년 만에 70가구로 늘어났고, 이후 새로운 이주자들이 계속 증가하면서 강의 양쪽에 4개의 촌락군이 형성됐다. 류치헤자강의 가장 서쪽, 즉 상류 지역의 상소(上所)로부터 동쪽으로 중소(中所), 관소(官所), 하소(下所)로 불렸다. 1878년에는 측량 기사가 파견되어 푸칠로브카 마을과 다른 한인 마을들 간의 경계가 지어졌다.

코르사코프카허커우, 크로우노브카황커우, 시넬리코보영안평

추풍4사의 형성 과정이나 주민들의 생활 조건은 시넬리코보 마을이 다른 3개 마을보다 3년 늦은 1872년에 형성된 점을 빼놓고는 하나의 조합으로 말해도 좋을 만큼 거의 같다.

코르사코프카 마을은 한인들이 한자 표기의 중국어 발음에 따라 허커우[河口]라 불렀던 마을이다. 코르사코프카 마을은 우수리스크에서 수이푼강과 갈라지는 수이푼강의 가장 큰 지류인 쉬우판강[Речка шуфан][현재의 보리소브카강(Речка Борисовка)] 분지의 상류변에 자리하고 있었다. 니콜스코예 마을로부터 약 16㎞ 떨어진 거리이다.

크로우노브카 마을은 한인들이 한자 표기의 중국어 발음에 따라 황커우라 불렀는데 본래의 중국식 표기인 황구(黃溝) 또는 발음대로 표기해 황거우(黃巨隅)라 하기도 했다. 크로우노브카 마을은 쉬우판강의 지류인 자피거우강[夾皮溝江][현재의 크로우노브카강(Речка Кроуновка)]가에 자리하였다. 코르사코프카 마을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6㎞ 떨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시넬리코보 마을은 니콜스코예 마을로부터 약 42㎞ 떨어진 수이푼강 상류의 강 양쪽에 두 개의 마을로 나누어져 있었다. 강 이북에 있던 마을이 ‘첫 번째 시넬리코보 마을’이라는 뜻의 ‘페르보예 시넬리코보(Первое Синельниково)’, 강 이남에 있던 마을이 ‘두 번째 시넬리코보 마을’이란 뜻의 ‘후타로예 시넬리코보(Второе Синельниково)’이다. 한인들은 후타로예 시넬리코보 마을을 용산동이라고도 불렀다. 시넬리코보 마을 주변의 수이푼강 유역은 토지가 비옥하고 넓어 한인들은 영안평(永安坪), 대전자(大甸子) 또는 대지안현(大地安峴)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영안평 또는 대전자는 두 개의 시넬리코보 마을과 한인들이 ‘영안평 남숭전’이라고 불렀던 포크로브카(Покровка) 마을을 총칭하는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 정부의 관리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이 1880년대 중반 추풍 일대를 방문하고 1885년경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아국여지도(俄國輿地圖)」에서 크로우노브카 마을을 제외한 추풍3사의 형세와 규모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 추풍3사는 공통적으로 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늘어서 있고 동서로는 들을 끼고 있는 형세였다. 추풍4사의 규모를 보면, 푸칠로브카 마을 274호 2,827명, 시넬리코보 마을 237호 2,673명, 코르사코프카 마을 229호 1,569명 순이었다. 이 조선 관리들이 이보다 2, 3년 앞서 조사하고 작성한 「강좌여지기(江左輿地記)」에는 추풍3사와 함께 크로우노브카 마을을 소개하고 있는데 추풍3사의 형세와는 달리 동서 7리, 남북 4~5리이며 주민수는 90여 호였다고 한다. 이로써 1880년대 전반에 이르러 이미 추풍4사 가운데 푸칠로브카 마을과 시넬리코보 마을이 연해주의 재러 한인 마을 가운데 1, 2위를 다투는 대규모 마을로 성장해 있었고, 코르사코프카 마을 역시 앞서 형성된 지신허 마을[236호 1,665명], 연추 마을[237호 1,623명]에 이어 5번째로 큰 마을로 성장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연해주의 곡창 지대였던 원호인 마을

추풍4사는 한마디로 ‘연해주의 곡창 지대’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처럼 불과 30년도 되지 않은 세월에 함경도 국경 지방의 빈농들에 의하여 개척된 추풍4사는 연해주 지역에 식량과 채소를 공급할 정도로 풍요롭고 윤택한 농촌으로 성장해 있었다.

수이푼 지역에는 러시아 정교회가 들어섰는데 1895년경 추풍4사 가운데 푸칠로브카, 시넬리코보, 코르사코프카의 3개 마을에 교회와 선교구가 있었고, 크로우노브카에는 큰 기도소가 있어서 가까운 코르사코프카의 정교회 사제가 2주에 한 번씩 와서 예배를 주재했다. 1894년 당시 연해주 전체의 32개 한인 마을에 총 4개의 교회와 선교구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3개가 수이푼 지역에 있었던 것이다. 나머지 한 개 교회는 남부 연해주연추 마을에 있던 교회로 22개 한인 마을을 관할했다. 더욱이 연해주 동남방에 있는 스찬 지역[3개의 한인 마을]이나 내륙 지방인 북부 우수리 지역[2개 한인 마을]에는 교회가 하나도 없었다. 이처럼 러시아 정교회는 수이푼 지방에 편중되어 있었고, 교회마다 1명의 사제 겸 선교사가 있었던 관계로 수이푼 지역 한인들에 대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사업은 성공적이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분포에 비하면 정도가 약하지만 한인 소학교의 경우도 수이푼 지방에 편중되어 있었다. 1895년 당시 연해주 지방에 모두 10개의 한인 학교가 있었는데, 이 가운데 4개의 학교가 추풍4사의 각 마을에 있었고, 포시에트 지역에 6개[연추, 지신허, 크라스노 셀로, 자레치예, 노바야 데레브냐, 아지미]가 있었다. 반면 북부 우수리 지역이나 스찬 지역에는 학교가 전혀 없었다. 1895년경 추풍4사의 한인 학교 교사는 코르사코프카 학교 졸업생이 교사인 크로우노브카 마을을 제외하고 교회의 사제가 교사를 겸했고 학생들은 모두 남자들이었다. 학생들의 연령은 8세부터 17세에 걸쳐 있었으며 간혹 결혼한 이들도 있었다. 추풍4사의 학생수와 학급수는 코르사코프카 마을 4개반 39명, 크로우노브카 마을 4개반 32명, 푸칠로브카 마을 3개반 35명, 시넬리코보 마을 3개반 28명이었다.

한인들이 추풍이라고 할 때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서쪽의 광활한 농업 지대를 지칭하는 것이기도 했지만, 이 일대 즉 수이푼강과 그 지류 유역에 산재해 있던 한인 부락들을 총칭하는 이름이기도 했다. 따라서 추풍4사는 수이푼 일대의 대표적인 4개 한인 마을을 말하는 것으로 주로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이른바 원호인(原戶人)들의 마을이었다.

러시아 한인 역사에서 초기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골치 아픈 존재가 바로 홍후즈이다. 만주 지역의 마적에 해당하는 홍후즈는 동북아시아 역사에, 그리고 작게는 우리 한인 이민사의 향방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 존재였다. 수이푼 일대에 초기 한인 이주민들이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홍후즈는 어김없이 등장해 한인들의 재산과 생명을 빼앗아간 약탈자였다. 수이푼 지역의 한인들이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을 알아차린 홍후즈는 무리를 지어 한인마을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손에 걸려드는 것이면 현금, 식량, 채소, 의류, 가축에 이르기까지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약탈해 갔다. 어느 때는 남녀와 아이들 8명이 한꺼번에 몰살당한 경우도 있었다. 전광석화처럼 출현하는 홍후즈들의 공격에 한인 농민들은 무방비 상태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힘들여 모은 재산을 일시에 홍후즈에게 넘겨 주고 구차한 생명만이라도 구하고자 관목숲으로 도피해야 했다.

이에 추풍4사의 한인들은 니콜스코예 수비대가 홍후즈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하도록 군 초소를 설치해 줄 것을 러시아 관청에 청원했다. 그 결과 푸칠로브카 마을에 20명이 주둔하는 군 초소가 설치되고, 1878년에는 모든 한인 마을이 매달려 중대 규모의 부대가 체류할 수 있는 군막사를 짓기에 이르렀다. 그 덕분에 1882년경에는 절도 등 아주 사소한 범죄를 제외하고는 추풍 일대에서 홍후즈의 습격은 거의 멎어 푸칠로브카 마을에만 7명의 군인들이 잠시 동안 머물곤 했다. 1884년에는 러시아 관청의 명령으로 이전의 군 막사에 ‘추풍 한인회 사무소’가 개설되어 추풍4사의 사무를 관장토록 했다. 2년 후인 1886년에는 한인들의 요청에 따라 ‘추풍 한인회 사무소’는 코르사코프카 마을로 이전했고, 이어 1892년에 ‘추풍 한인회 사무소’는 코르사코프카 읍청으로 바뀌어 러시아 지방 행정 체계에 부속되었다.

수이푼의 또 다른 한인 마을-여호촌

원호인들이 중심이었던 추풍4사와 달리 러시아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이른바 여호인(餘戶人)들은 카자크 부대나 러시아인 지주 소유의 토지를 소작해 경작하며 살기도 했다.

전자의 카자크 부대 주둔지 마을로는 시넬리코보 마을에서 서북쪽으로 올라간 수이푼강의 최상류 지역으로 중국과의 접경 지대에 위치하고 있었던 콘스탄친놉스키이(Константинновский)나 폴탑스카야(Полтавская)를 들 수 있는데, 특히 콘스탄친놉스키이는 1906년 당시 한인 83가구 300명이 거주할 정도로 규모가 큰 마을이었다.

또 러시아인 지주의 토지에 정착해 살았던 마을로는 수이푼강과 류치헤자강 사이의 분지에 위치했던 보리소브카(Борисовка) 마을과 크로우노브카 마을 남쪽 쉬우판강 상류 지역의 야코노브카(Яконовка) 마을, 그리고 크로우노브카 서남쪽 상류 지역의 프로콥스브카(Прокопска) 등이 있었다. 크로우노브카 마을에 인접한 자피거우강[Речка Чапигоу] 마을은 전형적인 여호인촌이었다. 여호인촌들은 대부분 중국과의 접경 지대 산골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자피거우 마을 외에도 시베창[西比廠 또는 西北倉][니콜스크우수리스크 서남쪽 10리], 다쟈골[니콜스크우수리스크 서북방 4리], 솔밭관[니콜스크우수리스크 서북방 10리], 타보오프[니콜스크우수리스크 동북방 3리 반] 등이 형성되어 시베리아 내전 시기에 주요한 항일 무장 세력이나 빨치산 활동의 근거지가 됐다.

러시아 혁명과 1937년 강제 이주

추풍4사는 원호인 출신의 한인 부농들의 본거지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경제적인 힘을 배경으로 러시아 한인 사회를 주도하고자 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러시아 혁명 격동기에 반(反) 볼셰비키적인 정치적 입장을 취했고 일부는 백위파 그리고 이를 후원하는 일본 출병군에 협력하기도 했다. 반대로 수이푼 산간 지방에는 한인 무장 부대들이 결성되어 반백위파·반일적 무장 투쟁을 했다. 이에 따라 수이푼 지역의 한인 사회는 다른 지역보다 한층 격렬한 계급 투쟁의 양상을 보였다. 1928~1929년에 개시된 ‘위로부터의 사회주의화’, ‘토호 척결’, ‘당 청결’의 와중에서 추풍4사의 원호인 부호들은 척결의 대상이 되었다.

1937년의 한인 강제 이주로 수이푼 지역에서 소멸된 한인 마을은 문헌상으로만도 적어도 80여 개에 달한다. 이들은 대부분 중국과의 산악 국경 지대 산골에 위치했던 이른바 여호인촌들이었다. 이에 비해 이민 초기에 수이푼 일대를 개척하였던 원호인들이 건설한 추풍4사는 수이푼강 유역의 광활한 들판에 자리잡고 있었다. 추풍4사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로 한인들이 떠난 이후 러시아인들이 들어와 이제는 완연한 러시아 마을로 변모했다. 주인은 바뀌었으나 한인들이 살았던 추풍4사는 그만큼 관개와 교통이 편리하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인데 이를 맨손으로 개척하고 가꿨던 이들은 고려인의 조상인 억척스런 함경도 농민들이었다.

참고문헌
  • 박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부가이 니콜라이, 『러시아에서의 140년간-재러 한인 이주사』(김광환·이백용 옮김, 시대정신,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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