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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이야기

블라디보스토크의 한인마을은 왜 신한촌이라고 불리게 되었을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블라디보스토크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정의

1911년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시 개척리에 살던 재러 한인들이 이전하여 새롭게 한인 마을을 조성한 과정과 마을 명칭에 대한 개관.

개설

1911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의 개척리에 살던 한인들이 러시아 당국의 조치에 따라 시외 산비탈로 이전하여 새롭게 한인 마을을 조성하였다.

1863년부터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은 수가 늘어나면서 곧 연해주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1873년 연해주의 주도 블라디보스토크에도 한인 마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장 큰 한인 마을은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Корейская слабодка)’, 즉 고려인촌으로 불리던 개척리였다. 1911년 블라디보스토크에 콜레라가 발생하자 연해주 당국은 개척리의 한인들을 시외로 이전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렇게 해서 조성된 한인 마을은 ‘새로운 한인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신한촌(新韓村)이라고 불렸으며, 이후 러시아 연해주 한인 사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리고 연해주에서 활동하였던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의 책원지가 되었을 뿐 아니라 가장 대표적인 해외 독립운동의 기지 중 하나가 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건설된 한인 마을-개척리

기록에서 확인되는 한인의 러시아 극동 연해주 최초 이주는 1863년이다. 즉 1863년 최운보(崔運寶), 양응범(梁應範) 두 사람이 두만강을 건너 훈춘(琿春)을 경유하여 지신허(地新墟)에 와서 개간을 시작함으로써 최초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러시아 자료에 따르면 1863년 한인 13세대가 노브고로드(Новгород)만 연안의 포세트 지역에 정착하고 관유지를 점유하여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후 포세트 지역으로의 한인 이주가 해마다 증가하여 1864년에는 60가구 308명이 이주했으며, 1868년에는 165가구, 1869년에는 766가구로 늘어났다.

1863년의 지신허 개척에 이어 1865년에는 수이푼[秋風] 구역에 100여 호에 이르는 한인촌이 성립되었다. 이어 1860년대 후반에는 크고 작은 한인촌들이 연해주 도처에 성립되었다. 특히 1869년 한반도 북부 지역에 밀어닥친 극심한 흉년은 농민들의 월경 이주를 더욱 촉진시키는 중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하여 1870년부터 니콜스크-우수리스크[蘇王領] 개척이 시작되었으며, 1871년에는 항카이호[興凱湖]를 돌아 하바롭스크를 거쳐 아무르강을 건너가 블라고슬로벤노예[四萬里] 마을이 개척되었다. 그리고 1874년에는 블라디보스토크 구개척리에 한인촌이 만들어졌다. 그밖에 흑정자, 녹둔도, 도비허, 남석동, 와봉, 수청 등지에도 주요 한인촌이 성립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한인들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873년 군항이 개척되면서부터였다. 즉, 군항 개척을 위해 필요한 노동자로 한인들이 블라디보스토크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1875년에 도시건설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번창하기 시작하면서 한인들도 차차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인구수를 보면 1888년에 400명, 1891년에 840명, 1897년에 1,000명, 1900년에 1,820명, 1905년에 2,400명이던 것이 1907년에는 구 한국 국적자 4,150명, 러시아 귀화인 352명으로 합계 4,505명이었다. 1913년에는 8,994명, 1915년에는 약 10,000명에 이르렀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이러한 러시아 측에 의한 공포 숫자보다 한인수는 약 2~3배에 달한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기의 블라디보스토크 한인수는 1~2만 명에 달한 것으로 보인다.

1893년 블라디보스토크시는 한인 거주지로서 한인촌 1구를 설정해 주고 이 땅 이름을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Корейская слабодка)’, 즉 고려인촌이라고 붙였다. 이것이 개척리의 시발이었다. 당시 개척리에는 700여 가구에 7,500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었다. 1907년의 조사에 의하면, 블라디보스토크에는 한인들이 크게 7개 지역에 집단 거주하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큰 곳이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 즉 개척리였다. 개척리는 1874년 당시 한국식 초가집이 있었으며, 남녀 25명이 거주하였던 곳으로 금각만[Золотой рог]의 북변에 있었다. 현재는 시내 한복판을 동서로 길게 뻗는 스베틀란스카야 거리[Улица Светланская]에서 서쪽 아무르만 방향으로 파그라니치나야 거리[Улица Пограничная]가 있는데 이 거리에서 해안 쪽으로 개척리가 있었다. 지금은 블라디보스토크 스타디움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개척리의 집들은 대개가 러시아풍의 나무로 건축한 작은 집이 보통이었다. 집마다 두세 개의 한국식 온돌방이 있었고, 한 집에 여러 가구가 모여 살아서 많으면 20여 명이 동거하기도 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개척리 말고도 규모는 훨씬 작으나 한인의 집단 거주지가 셋이나 더 있었다. 하나는 블라디보스토크 서남단 호산포대(虎山砲台) 밑에 아무르만을 내려다보는 마치와야라는 곳으로 하급 노동자들과 어업에 종사하는 노동자가 40여 호 촌락을 형성하여 살았다. 둘째는 군항 대안의 치루양이란 곳으로 주로 황무지를 개간하여 생활하는 한인들이 촌락을 형성하였다. 셋째는 시의 동쪽 끝 마르스카야 슬라보드카에 약 30여 호 쯤의 노동자촌이 형성되어 있었다.

신한촌의 형성

1911년 개척리에 콜레라가 창궐하자, 당국은 3월 29일 위생실행위원회 결의를 거쳐 개척리를 다른 지역으로 이전하라는 ‘한인촌 이전에 관한 고시’를 내렸다. 연해주 군무지사 대리 부지사인 모노마호프의 이름으로 내려진 고시는 “연해주 군무지사는 연흑룡총독 곤닷지의 명에 의하여 블라디보스토크 시내 카레이스카야 슬라보드카[개척리]에 살고 있는 중국인과 한인은 4월 15일[서력 28일]까지, 그 거주하는 가옥 기타 건물로부터 새로 선정된 거주지로 스스로 이전하고, 현 건물은 그 기간 내에 이를 철거하여 그 재료는 각자의 소유로 할 것을 이에 공고함”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여기에 “기한이 도래하여도 고시의 취지를 수행하지 않는 자가 있을 경우에는, 행정 명령에 의하여 이를 이전하고 가옥을 철거할 것”이라고 하여 주민들이 이전하지 않을 경우 개척리를 강제로 철거할 계획임을 덧붙였다.

이전 명령이 내려지자 개척리 한인들은 크게 낭패하여 백방으로 그 유예를 청원하였다. 그리하여 이전 시한을 5월 28일로 연장받았다. 그러나 한인들은 이전 예정지에 가옥을 신축할 수 있는 재력자는 3분의 1밖에 되지 않고, 아직 결빙 상태이기 때문에 시 당국에 국고 30만 루블을 무이자로 대출 융자해 줄 것을 청원하였다. 하지만 아무런 회답도 받지 못하고 이전 시한이 다가 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한인들은 남의 집을 잠시 빌리거나 친지의 집에 일시 기식하거나 신 지정지에 천막 생활을 하는 등 그 참상이 극에 달하였다. 초여름에 이르러 신 지정지에 이주한 자는 약 1,500명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개척리는 러시아 카자크 기병대의 병영으로 변하였다. 그 후부터 이를 구개척리라 부르고 새 지정지를 신개척리라 구별하여 불렀다.

이때 개척리뿐만 아니라 시내 다른 곳에 거주하던 한인들도 이전 명령을 받았다. 첫 번째로 일번천 부근 육군 병참 부속 제분소 부근의 한인 주민도 타처로의 이전 명령을 받았는데 10월까지 연기해 줄 것을 출원하였다. 두 번째로 이번천에 거주하는 한인들도 신개척리 이전 명령을 받았으나 파종된 곡물 수확 때문에 추수기까지 유예 청원을 하여 일시 연기받았다.

한편 이와 같이 한인들이 러시아 총독의 명령에 의해 한랭기에 강제 이전이 강행되던 시기에, 같은 장소에 혼재해 있던 일본인 잡화상 몇 호와 유흥 매춘업자 15호는 이전을 연기받았다. 이들은 “청인, 한인과 같이 취급하지 말라.” 또는 “러시아 매춘업자와 동일 취급해 달라.”라고 하는 주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관의 주장으로 이전을 무기 연기받았다. 그들은 우선 알가리토프 시장을 찾아 총독에게 이전 유예 건의서를 내게 하고, 회장인 연해주 의무 감독관 위노그라드스키를 찾아 위노그라드스키의 의견으로 창녀 단속 상 유예가 필요하다는 건의를 총독에게 하게 하는 한편, 일본인 공창업자 일동이 총독에게 직접 진정서를 내게 하도록 하였다. 한편, 주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가 연해주 총독을 직접 방문하여 연해주 총독의 수긍을 받았다. 이어 이를 위하여 4월 9일 시 의회의 임시회의를 소집하여 새 유곽지를 선정할 때까지 일단 이전 유예를 받아 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나라 없는 유이민은 국권과 영사관이 있는 매춘업자보다 푸대접을 받는다는 역사적 증거이다.

한이 맺힌 강제 이전이기는 하지만 개척리의 한인들은 신개척리로 많이 옮겨갔다. 다행히 신개척리는 구개척리의 북쪽 산비탈로, 높고 건조하며 아무르만에 면한 경치가 좋은 곳이었다. 이 새 보금자리는 동서 약 6정(丁), 남북 약 7정(丁)으로 광대한 지역이었다. 그리고 겨울이면 얼어붙은 아무르만 위를 걸어서 훈춘, 왕청(旺淸), 연길(延吉), 화룡(和龍) 등 북간도로 오갈 수 있는 곳이었다.

이전이 어찌나 촉박하였던지, 이전 40일 전에 시청으로부터 이 지구를 차입하기 시작하여, 동서남북으로 구획한 예정 도로에 따라 가옥 신축을 시작하였다. 그 도로는 그 폭이 4~5간이었다. 음료수는 북방 약 10정 거리의 일번천에서 물을 퍼와 마셨다. 이 지대의 토지는 자갈은 섞였으나 대체로 비옥하고 잡초가 무성하여, 연속되는 밭에는 무, 채소, 파 등을 경작하는 중국인들도 있었다. 이 지구는 160데샤치나로서, 차지료는 1년에 60루블로, 대부분은 상반기분[30루블]을 시청에 납부하였다. 가옥은 1동 짓는 데 약 400루블이 소요되는데 한인이 지불하였고, 다른 돈이나 정부의 대출금을 받은 자가 없었다. 1911년 5월 31일 당시 겨우 50호 정도의 신축 가옥[건축 완료 18호, 건축 중 30여 호]이 들어섰을 정도였다. 이 이전 시기 전후에 러시아의 다른 지역이나 금광 소재지로 옮겨 간 사람들도 약 3,000명에 달하였다.

신축 가옥은 1호의 건평이 약 12~13평[39.67㎡~42.98㎡]의 목조 건축으로 너비 3간 반, 길이 4간 정도의 서양풍 건물이었다. 한결같이 양철 지붕에 유리창을 냈고, 크기는 조금씩 다르지만 형태는 유사하였다. 옥내 한쪽은 헛간으로 이를 부엌으로 쓰며 솥과 옹기가 있으며, 온돌 없는 집은 하나도 없었다. 이 가옥 신축 공사에 동원된 목공과 석공은 한인이 70%, 중국인이 30%였다.

이전한 한인들은 이 신개척리를 ‘새로운 한인 마을’이라는 뜻으로 신한촌(新韓村)이라고 불렀으며, 이후 러시아 연해주 재러 한인 사회의 중심지가 되었다. 러시아식 양옥이 즐비한 신한촌은 한국에서 내왕하는 한인 노동자들이 일차로 모여 일터를 구해 나가거나 일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리고 연해주에서 활동하였던 애국지사들의 독립운동의 책원지가 되었다.

신한촌의 의미에 대한 또 다른 주장

한편 신한촌이라는 명칭을 해외 독립운동과 연결짓고자 하는 주장이 있다. 즉 블라디보스토크신한촌은 단순히 ‘새로운 한인 마을’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1910년을 전후하여 망명한 한국인이 해외에서 개척하고 건설한 많은 신한촌 중 하나라는 주장이다. 이때 신한촌은 단순한 촌락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에 항거한 독립운동 기지로서의 촌락이 된다. 즉 해외에 새로 개척된 신한촌은 망명 한국인의 경제적 생활 기반이 된 동시에 독립군 양성을 추진하는 독립운동의 기지가 되는데, 블라디보스토크신한촌도 그중 하나라는 것이다.

실제로 블라디보스토크신한촌이 1910년 이후 해외 독립운동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이자 배후지 중의 하나로 자리매김되었다는 점에서 곱씹어볼 필요가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신한촌을 개척한 한인들이 독립운동의 기지로 활용하기 위해 이름을 신한촌이라고 명명했다는 기록은 지금까지는 찾아볼 수 없다.

참고문헌
  • 이상근, 『한인 노령 이주사 연구』(탐구당, 1996)
  • 조동걸, 「신한촌 건설과 대한 광복회」(『나라사랑』41, 외솔회, 1981)
  • 윤병석, 「연해주에서의 민족 운동과 신한촌」(『한국민족운동사연구』3, 한국민족운동사학회, 1989)
  • 정태수, 「망국 직후의 신한촌과 한민학교 연구」(『한국교육사학』13, 한국교육사학회, 1991)
  • 박환, 「러시아 혁명 이후 블라디보스토크 조선인거류민회의 조직과 활동」(『한국민족운동사연구』90,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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