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연해주로 이주한 한인들이 다시 멀리 아무르강까지 재이주하여 건설한 마을 사만리[블라고슬로벤노예]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러시아 아무르주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정의

1871년 러시아 아무르주에 형성된 재러 한인 정착 마을.

개설

러시아 아무르주 블라고슬로벤노예는 러시아 당국이 재러 한인들의 러시아화를 목표로 정책적으로 조성한 최초이자 유일한 모범 마을이었다. 러시아 정부가 1871년 여름 지신허 마을 70여 가구 315명을 포함한 연추 등지의 빈민 500명가량을 아무르강 지류인 사마라 강가의 마을로 이주시켰다. 이렇게 조성된 한인 마을이 블라고슬로벤노예였다.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이란?

아무르주 블라고베셴스크에서 동남쪽으로 547베르스타[1베르스타는 1.0668㎞에 해당한다] 떨어진, 사마라강 좌안에 그 하구로부터 3베르스타 떨어진 곳에 커다란 한인 마을인 블라고슬로벤노예가 있었다. 아무르 강가의 대표적인 한인 마을인 블라고베셴스크는 연해주 수이푼 지역의 추풍4사(秋風四社)로 불린 4개의 한인 마을과 함께 손꼽히는 부유한 한인 마을 중 하나였다. 또한 블라고베셴스크 출신으로 다수의 한인 민족 운동 및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 배출되기도 했다. 러시아 정교회 사제 출신으로 러시아 2월 혁명 이후 민족 운동에 투신하였다가 교육가로 활동한 ‘채 신부’로 알려진 채병욱,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활동했던 박 표도르 사제, 초기 한인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는 박애남만춘 등이 블라고베셴스크 출신이었다.

블라고슬로벤노예라는 마을 이름은 ‘축복 받은 마을’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마을 이름은 천혜의 자연환경 덕분에 붙여졌는데, 이 자연환경이야말로 농촌 경제의 전 부문에 걸쳐 마을의 성공을 보장해 주고 마을 주민들을 부유하고 안락한 존재로 만들어 주는 선물이었다. 한인들은 블라고베셴스크를 사만리(沙滿里 또는 四萬里)라고 불렀다. 이는 사마라 강가에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사마라리→사말리→사만리].

블라고슬로벤노예에 대한 우리 측의 기록은 상해 임시 정부의 기관지인 『독립신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독립신문』은 블라고슬로벤노예가 토지가 비옥하고 한국인 이주의 역사도 깊은 유족한 곳이라고 서술하였다. 한눈에 천 리가 내다보이는 옥야(沃野)인 까닭에 2,500명에 달하는 한국인이 대규모 집단 거주지를 형성하였다. 이 때문에 한인들이 사만리라고 불렀다고도 한다. 또한 한참 후인 1930년 조선 내지의 잡지 『삼천리』에도 “이주민의 생활은 가장 유족(裕足)”한 곳으로 도비허와 함께 사만리를 꼽고 있다. 일제의 정보 보고에도 이곳은 동경의 땅으로 기술되었다. 한인들 사이에서 “천여(天與)의 낙토로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을” 뿐 아니라 부자들의 밀집 지구로 알려진 곳이라고 했다. 블라고베셴스크에 거주하는 한인은 벽돌과 기와로 지은 저택에 거주했으며, 러시아인과 하등 다를 바 없이 의복, 음식과 살림살이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유럽식으로 생활했다고 기록하였다.

블라슬로벤노예 마을이 개척된 이유

블라고슬로벤노예의 개척자는 당시 동시베리아 총독이었던 Н. И. 시넬리니코프와 아무르주 지사인 И. К. 페다쉔코 그리고 아무르 카자크 보병 대대의 사령관인 체스녹 장군이었다. 즉 연해주 한인을 아무르주로 이주시키자는 생각의 최초 입안자는 시넬리니코프이고, 구체적 사업 실행의 총괄 책임자는 페다쉔코, 그리고 현장 책임자는 체스녹이었다. 다시 말하면 한인의 아무르주 이주와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 개척은 러시아 당국의 기획과 실행에 따라 이루어진 국가 사업이었다.

러시아 영토와 인접한 조선 북부 지방에서 1863년부터 시작된 한인 이주는 매년 증가하다가 1870년대 초반에 특히 격렬해져 정점에 달했다. 이미 많은 한인이 정착했던 연해주의 당국은 한인들이 물밀 듯이 밀려오자 곤경에 처했다. 연해주 당국은 매년 도착하는 유민들이 요구하는 엄청난 양의 식량을 어떻게 조달할지도 알지 못했고, 이주자들의 거주지에 대해서도 아무런 준비가 되지 않았다. 1871년 이른 봄 1,000명에 달하는 유민이 국경을 넘어 남부 우수리주로 건너오자, 이들의 일부를 아무르주로 이주시키자는 생각이 처음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생각에는 아무르주에는 일손이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곳에서 생활 방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이 생각의 주창자는 당시 동시베리아 총독이었던 시넬리니코프였다. 시넬리니코프는 아무르주를 여행하던 5월 20일 치타에서 연해주 지사에게 봄에 도착한 1,000명 중 500명을 아무르 카자크 보병 대대의 주둔지에 정착할 수 있게 아무르주로 보내라고 제안했다. 동시에 아무르주 지사인 페다쉔코에게도 이 제안에 대한 전보를 보냈다. 전보에서, 한인들이 정착하기 좋은 “생산에 적합한 토양을 가지고 아무르강에 너무 가깝지 않은” 땅을 찾아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한인들에게 양식과 거주할 주택을 마련해 주라고 요청했다. 총독의 이 전보에 의해 실제로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여 필요한 일, 무엇보다도 먼저 아무르주로 이동한 한인들을 수용하기 위해 적당한 땅을 찾는 일이 시작되었다. 적당한 땅은 풍족하여 땅을 선택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그럼에도 조금의 실수도 없기를 원했던 아무르주 지사는 이 일을 지역에 대해 잘 아는 카자크 보병 대대 사령관인 체스녹 장군에게 위임했다. 이렇게 하여 두 지역이 선정되었다. 하나는 사마라강 유역이고, 다른 하나는 비잔강 유역이었다. 이 두 지역 중에 후자를 더 많이 조사하였다. 그러나 그곳은 곧 쓸모없는 곳으로 판명되었다. 그것은 비잔강 하구가 습지이고 아무르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홍수 때문에 범람하는데, 강 하구로부터 멀리 이주하는 것은 많은 사항을 고려할 때 효용이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첫 번째 지역, 즉 사마라강 분지가 모든 사항을 고려할 때 개척에 용이한 곳으로 인정되었다. 그 후 사마라강 유역의 3개 지역이 마을 건설에 유리한 곳으로 선정되었다. 엄밀한 조사 결과 현재 마을이 있는 고원 지역이 새로운 이주지로 가장 적당하다고 결정되었다. 당시 이곳에는 하구에서 다양한 색깔의 예쁜 꽃들로 뒤덮인 녹지와 다양한 종류의 나무로 이루어진 조그마한 관목 숲이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하여 한인들의 이주에 적당한 땅이 선택되었다.

이주 준비-마을의 형성

이주 지역이 선택된 후 그 지역에 한인을 수용할 수 있는 건설 공사가 시작되었다. 아무르주 지사 페다쉔코는 가족 단위 이주자의 물질적 환경을 갖추려고 엄청난 지출을 요구했고, 동시베리아 총독 시넬리니코프는 지출을 허락했다. 이에 따라 최소로 필요한 80채의 주택을 건설하기 위해[이주할 가족은 80가족을 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하였다.] 적어도 8,000개의 통나무가 필요했다. 목재 이외에도 유리와 난방용 판금과 세공용 쇠막대를 준비하는 것이 필요했다. 목재를 벌채하고 수송하는 일을 아무르 카자크 보병 대대에 맡기고, 주택 건축 자체는 한인들에 의해 진행하면 되었다. 그래도 목재 준비와 도구 마련, 그리고 건축비로 각각 1,600루블, 720루블, 431루블로 80채의 주택을 건축하는 데 총 2,759루블의 지출이 예상되었다. 또한 이주 후 다음 해 수확이 있기 전까지 15개월 동안의 양식을 준비하는 데 7,700루블, 그리고 종자와 의복 및 각종 물품을 구입하는 비용까지 합쳐 총 15,271루블이 총독 앞으로 청원되었다. 총독은 이 금액의 지출을 허락하여 이렇게 한인에게 지출된 금액의 변제에 대해 가족이 없는 이들은 첫해에 임금에서 차감하는 방식으로, 가족이 있는 이들은 첫 수확 이후 3년 후 즉 1875년 가을부터 10년간 분할하여 3%의 이자로 아무르주의 농민들에게 갚도록 제안하였다.

최초 정착에 필요한 지출에 대한 이러한 모든 지원 외에도 한인들은 큰 특권을 부여받았다. 즉 이곳에 이주한 한인들은 러시아 이주민들과 동등하게 1861년 4월 27일 자 36928호 원로원의 명령에 기반을 둔 특권을 누릴 권리가 있었다. 즉, 그들은 영원히 인두세를 면제받고, 20년간 토지세를 면제받고, 3년간 지방세를 면제받았다. 그러나 그들에게 부여된 가장 매혹적인 특권은 그들에게 일상적인 생활에서 자신들의 민족적 풍습에 따라 자치권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단지 형사상 책임을 초래하는 죄행에 대해서만 그들은 러시아 법률에 따르면 됐다. 이는 지사에게 내린 총독의 지도 방침 5가지 중 첫 번째와 두 번째 항에서 확인된다.

정착을 위해 선택된 장소들에서는 이미 준비 작업이 진행되었다. 블라고베셴스크 아래 아무르강을 따라 펼쳐진 카자크 마을들의 카자크들은 목재를 벌채하였는데 6월 초순에 이미 1,000개 이상의 통나무가 준비되었다. 6월 말에 이르자 사마라강 하구에는 시베리아 삼나무 2,711그루와 사시나무 1,683그루가 선적되었다. 동시에 블라고베셴스크에서는 양식과 말 그리고 한인들의 거주를 위해 필요한 다른 물품들이 준비되어 그들의 정착을 위해 선택된 장소에 가까운 푸지노 마을로 가는 기선에 선적되었다.

블라고슬로벤노예로의 한인 이주

마침내 1871년 7월 27일 남자 246명, 여자 85명, 총 331명으로 이루어진 103가족의 한인 이주민들이 푸지노에 도착하였다. 한인 이주민들은 얀치헤[38가족, 남자 89명, 여자 56명]와 지신허[65가족, 남자 157명, 여자 129명]에서 온 이들이었다. 남부 우수리주로부터 랴빈코프 대위가 한인 이주민들을 호송하였다. 그런데 우수리 강가의 카자케비체바야 마을에서 정착지까지는 총독의 특별 위임으로 체르냐에프 대령이 한인 이주민들을 맡았으며 정착지에 정주시키는 것까지 위임받았다. 모든 한인은 국고로 여행하였는데, 모든 것을 국고에서 동등하게 공급받았다. 그 안에는 건빵과 전차[벽돌처럼 딱딱하게 굳힌 차]도 있었다. 여비 중에서 체르냐에프 대령이 처리할 수 있는 양식비와 예비비는 2,000루블로 산정되었다. 그중 665루블 24.5카페이카는 한인의 이동 중에 지출되었고, 나머지인 1,334루블 75.5카페이카는 카자크 보병 연대 사령관인 체스녹 중령에게 인계되어 그들을 정착시키는 데 사용되었다.

블라고슬로벤노예로 이동 과정을 보면 지신허 빈민 남녀 315명은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흥개호(興凱湖)[한카 호수]를 끼고 하바롭스크까지 도보로 가서 아무르강에 도착한 후 배를 타고 사만리에 상륙하였다. 그때 그들이 본 광경은 하늘을 찌르고 구름에 닿을 듯한 삼림이 울창한 넓은 벌판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그들 앞에 갑자기 벼락이 치면서 삼림이 불타 버려 벌판에 집들을 짓고 황무지를 개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계봉우(桂奉瑀)는 『독립신문』에 연재한 「아령실기(俄領實記)」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기원 4214년[1871년] 신미 4월에 지신허 빈민 70여 호 남녀 315인이 아관(俄官)의 지도를 따라 남부여대하고 흥개호를 연(沿)하야 끼고 화발포(花發浦)[하바롭스크]까지 도보(徒步)하고 흑수(黑水)[흑룡강, 아무르강]에 지(至)하야 승선(乘船)하고 마침내 사만리[블라고슬로벤노예]에 하륙(下陸)하매 삼천간운(參天干雲)한 삼림이 울창한 대야(大野)에 의거생활(依居生活)이 참으로 무로(無路)하야 상부하앙(上俯下仰)함에 만목(萬目)이 처연(悽然)할 뿐이었다. 그런대 상천(上天)이 권우(眷佑)하야 일야간(一夜間 ) 낙뢰(落雷)로 삼림(森林)을 대소각(大燒去)하야 가기구조(家基搆造)의 노고(勞苦)와 황무기간(荒蕪起墾)의 곤란(困難)을 얼마콤 면(免)하고 점차(漸次) 안돈(安頓)함을 득(得)하엿다. 이종겁화(異種昅化)의 수완(手腕)이 대민활(大敏活)한 아관(俄官)으로서 여간양식(如干糧食)을 공급하지만 그것뿐으론 사신곡복(絲身穀腹)이 넉넉할 수 없었다. …… 그러나 누(淚)로서 파종(播種)하고 마침내 낙(樂)의 실(實)을 추수하게 되야 지금은 인구가 번창함을 따라 가산(家産)이 다 섬유(贍裕)하고 또 그중에서 고급교육(高級敎育)을 수료한 인물이 다산(多産)하였다.” 멀리 북쪽으로 아무르 강가까지 이주해야 했던 재러 한인들의 곤궁함과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넓게 펼쳐진 광야에 대한 황홀감이 어우러진 감상이었다고 추측된다.

짧은 휴식 후에 8월 1일 이주 한인들은 정착지로 선정된 사마라강으로 이송되었다. 이곳에서 넓은 하늘 아래 각기 숙소를 정하고, 바로 다음 날 청소를 시작으로 주택을 건설하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전체 이주 한인 중에 단지 15명만이 도끼를 다룰 수 있었던 악조건 속에서도 8월 말에는 이미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20채의 목재 가옥, 2채의 조선식 오두막, 1채의 식량 저장고, 15데샤치나[1데샤치나는 1㏊]의 새로운 개간지, 700개의 건초더미. 가을에도 작업은 계속되어 11월에 다음의 것들이 건축되었다. 25채의 목재 가옥, 6채의 오두막, 학교 1채[단지 난로만 없음], 2개의 목욕탕 그리고 목재 교회의 기초가 놓였다. 이후 모든 한인이 각기 자리를 잡을 가능성이 생겼다. 비록 불편하더라도 최소한 특별히 비좁지 않고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양식은 탈곡한 부드 2,000푸드와 그만큼의 탈곡하지 않은 부드와 1,000푸드의 밀가루가 준비되었고, 이 모든 것은 이주 한인들의 희망에 따라 뽑은 지도자를 거쳐 분배되었다. 또한 신발과 따뜻한 의복이 전달되었고, 겨울 외투용으로 500아르신의 두터운 회색 양복지가 구입되었다. 이외에도 생산 활동을 위해 모두 33마리의 말이 제공되었다. 이렇게 하여 이동과 정착 과정에서 당국의 활발한 도움 덕분에, 한인들은 성공적으로 생산에 종사할 수 있는 그런 환경에 곧바로 진입할 수 있었다.

한인들의 블라고슬로벤노예 정착

정착지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울이 다가왔다. 원기를 되찾은 재러 한인들은 겨울을 나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였다. 집 내부와 울타리를 수리하였으며, 자신들도 쓰고 판매하기 위해서 목제 그릇을 제작하였다. 갈대로 바구니와 돗자리를 만들고, 자신들의 필요뿐 아니라 기선을 위해서도 장작을 준비하였다.

자유롭고, 집이 필요 없는 20여 명의 노동자가 가을에 임금 노동을 위해 블라고베셴스크로 파송되어 모케예프스키이 양조장에서 일했다. 양조장에서 한 달에 6~15루블의 임금을 받은 한인 노동자들은 9월 15일부터 1872년 4월 9일까지 총합 706루블 5.5카페이카를 벌어들였다. 다른 이들은 미하일로-세메노프스코이 마을에서 봉사 활동을 하면서 겨울을 보냈다. 또한 학령 아동들 19명도 이곳에서 겨울을 보냈는데, 아이들은 마을 학교에서 읽기와 쓰기를 배웠다.

물론 첫 번째 겨울 동안 이주 한인들에게는 수많은 곤궁과 어려움이 닥쳤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모든 상황은 만족할 만했다. 무엇보다도 양식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심지어 그들의 거주지가 눅눅하고 추웠음에도, 더구나 그들이 새로운 기후 환경에 적응할 새가 전혀 없었음에도 건강 상태조차도 만족할 만했다. 8월, 9월, 10월 환자 평균은 하루에 2와 2/9명이었고, 겨울 동안 사망자 수는 단지 3명이었다.

이후 약 2년에 걸쳐 블라고슬로벤노예의 한인들은 아무르주 당국으로부터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 이주 한인들이 생각보다 쉽게 정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당국의 지원 때문이었으며, 이주 한인들도 총독과 지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정착 이후 한인들은 총독의 명령에 따라 자치권을 가지고 자신들의 문화와 관습을 지키면서 살아왔다. 한인들에게는 아무르주의 다른 지역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과는 구분되는 특권이 부여되었다.

블라고슬라벤노예 한인 마을의 개척의 의의

아무르주 블라고슬로벤노예는 러시아 당국이 한인의 러시아화를 목표로 정책적으로 조성한 최초이자 유일한 모범 마을이었다. 즉 러시아 정부가 1871년 여름 지신허 마을 70여 가구 315명을 포함한 연추 등지의 빈민 500명가량을 아무르강 지류인 사마라 강가의 마을로 이주시켰는데, 그곳이 바로 블라고슬로벤노예였다.

1871년 7월 27일 남자 246명, 여자 85명, 총 331명으로 이루어진 103가족의 한인 이주민들이 푸지노에 도착하였다. 8월 21일 블라고슬로벤노예가 건설될 사마라강 연안으로 이동한 한인 이주민들에게는 향후 2년간 지낼 양식뿐 아니라 앞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온갖 종자 및 소와 말을 비롯한 각종 농사 도구도 제공되었다. 또한 개척민으로서 온갖 특권이 부여되어 영원히 인두세를 면제받고, 20년간 토지세를 면제받고, 3년간 지방세를 면제받았다. 이후 이러한 특권을 통해 부유한 농촌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주 한인들에게 부여된 가장 매혹적인 특권은 일상 생활에서 자신들의 민족적 풍습에 따라 자치권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블라고베셴스크로 이주한 한인들은 자신들의 언어와 풍습,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며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모국의 전통을 그대로 유지하며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러시아 당국 역시 재러 한인을 러시아로 통합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러시아 당국은 러시아 주민을 이곳으로 이주시키고 재러 한인들의 자치권을 폐지하고 모든 공적 업무에서 러시아어만을 사용하게 강제하였다.

결국 블라고슬로벤노예의 한인들은 러시아화하였다. 블라고슬로벤노예의 한인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하고, 러시아 정교를 믿으며,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러시아인이 되었다. 블라고슬로벤노예는 그곳의 러시아인과 융화한 한인의 모범 마을이자 국경 마을로서 아무르주 개척사에 한 획을 그었다.

참고문헌
  • 계봉우, 「아령실기」(『독립신문』, 1920. 2. 20~1920. 4. 12)
  • 김세용, 「서백리아의 조선인 활동」(『삼천리』9, 1930)
  • 이병조, 「러시아 아무르주의 한인사회와 정교회 선교 활동(1872~1916): 블라고슬로벤노예 마을을 중심으로」(『재외한인연구』20, 재외한인학회, 2009)
  • Ross King, 「Blagoslovennoe: Korean village om the Amyr, 1871~1937」(『The Review of Korean Studies』,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2001)
  • А. В. Кириллов, 『Корейцы села Благословеннаго(Историко-этнографический очерк)』(Приамурский Отдел Императорскаго Русскаго Географическаго Общества, 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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