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S (독립국가연합)
특별한 이야기

러시아에 이주한 한인들이 개척한 최초의 한인 마을 지신허

원어 항목명 Тизинхе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러시아 연해주지방  
시대 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원어 항목명 Тизинхе
정의

1863년 러시아 연해주 남쪽 지역에 형성된 러시아 최초의 재러 한인 마을.

개설

지신허는 1863년경 생겨나 1937년을 전후해 사라진 러시아 연해주 남쪽 지역에 있던 러시아 최초의 재러 한인 마을 이름이다. 지신허는 구 소련에 머물던 50만 고려인의 연원지이다.

최초의 러시아 이주

현재 한국과 러시아 학계에서는 함경북도 무산(茂山)의 최운보(崔運寶)와 경흥(慶興)의 양응범(梁應範), 두 사람이 이끄는 함경도 농민 13가구가 1863년 월경(越境)을 엄금했던 국법을 어기고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에 정착한 것을 최초의 한인 이주로 간주하고 있다. 이보다 앞서 연해주 지역이 청나라 영토에 속해 있었을 때는 물론, 1860년 베이징조약[北京條約]으로 연해주가 러시아 영토가 된 이후에도 조선 농민들이 두만강을 건너간 일이 있었다. 그러나 사냥이나 채취 또는 여름에 파종하고 가을에 추수해 돌아오는 이른바 계절형 이주에 불과했을 뿐, 영구 거주와 정착을 위한 이민은 아니었다. 이 점에서 1863년의 지신허 마을 개척은 현재 구 소련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50만 고려인들의 첫 출발을 알리는 역사적 사건임에 틀림없다.

지신허의 명칭 유래

지신허는 원래 중국식 명칭으로 계심하(鷄心河)[발음은 지신허]라고 표기했던 강의 이름이다. 한자 뜻 그대로 해석하면 ‘닭의 심장 부분에 해당하는 강’인데 어원이 분명치 않은 이 강 이름을 따 최초의 한인 마을 이름을 지신허라 하였고, 이후 한인들이 우리식 한자 발음을 빌려서 ‘地信墟’, ‘地新墟’, ‘池新河’로 표기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지신허강은 현재 비노그라드나야강[Речка Виноградная]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비노그라드나야강은 탐험대만[Бухата Експидиций][과거 노보고로드만]으로 들어가는 그라드코이강[Речка Гладкой]의 지류로 북쪽 중국 국경 지대에서 발원해 남쪽으로 흘러 그라드코이강으로 이어진다. 지신허 마을은 러시아 수비대 초소가 있던 탐험대만으로부터 19㎞ 정도 떨어져 있고, 북쪽으로 중국령인 훈춘과는 14㎞ 정도 거리에 있었다.

러시아 기록 속의 지신허

최초의 한인 이주에 관한 기록들은 이주 시기는 물론, 이주한 가구와 인원에서도 다양한 편차가 있다. 먼저 러시아 쪽의 기록들을 살펴본다.

1867~1869년에 동시베리아 총독의 파견으로 남부 연해주 지역을 답사한 프르제발스키(Н. М. Пржевальский)[1839~1888]는 1869년에 쓴 글에서 “1864~65년 겨울에 한인 10가구가 조선 정부의 금지를 무릅쓰고 우리에게 이주해 왔다.”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다른 자료들을 참조해 보강한 것으로 여겨지는 자신의 저서 『우수리스크 크라이 여행[Путешествие в Уссуриском крае, 1867~1869]』에서는 한인들이 “이미 1863년 12가구가 이주해 왔다.”라고 수정하였다. 시기가 1년여 앞당겨졌을 뿐만 아니라 가구 수도 10가구에서 12가구로 늘어난 것이다.

한편 1910년 연흑룡주 지역 일대를 조사한 아무르 탐험대의 종합 보고서로서 1912년에 간행된 『연흑룡 지역의 중국인, 조선인, 일본인[Китайцы, Корейцы, Японйцы в Приморе]』에서는 최초의 한인 이주에 관한 서술이 좀 더 구체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당시 아무르 탐험대의 단장 곤닷치(Н. Л. Гондатти)는 1911~1917년 연흑룡주 총독을 지낸 인물로 재러 한인들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취하였다. 아무르 탐험대에 참여했던 그라베(В. В. Главе)가 작성한 이 보고서에는 “1863년 이전에는 블라디보스토크와 남부 우수리군(郡)에 소수의 독신 조선인들이 나타났으나, 이들은 여름에 일하고 가을에 되돌아갔다. 1863년에 들어서면서 가족들의 (영구 정착을 위한) 이주가 시작되었다. 최초의 13가구가 노보고로드만에 새로이 조성된 포세트 구역의 국유지를 점유하였던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신허라는 마을 명칭이 언급되지는 않았으나, 현재 학계에서 받아들이는 학설의 근거가 바로 이 보고서다.

위 보고서의 근거가 되는 자료는 노보고로드 초소 대장인 레자노프(Резанов)가 연해주 군무지사인 카자케비치(П. В. Казакевич)에게 보낸 1863년 11월 30일자[현재 서력으로 12월 13일자] 보고서다. 이 보고서가 남부 우수리 지역에 최초로 이주한 한인들에 대한 첫 번째 공식 보고이다.

이 첫 번째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레자노프 중위는 “한인 몇 사람이 와서 20가구가 노보고로드 초소로부터 15베르스타[약 16㎞] 떨어진 지신허강 분지에 정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하였는데, 이미 이들은 이곳에 대여섯 채의 집을 지어 놓은 상태였다.”라고 보고했다. 이 한인들은 또한 자신들을 중국 마적인 홍후즈[紅鬍賊]로부터 보호해 줄 수 있도록 러시아 군인 5명을 파견하여 배치해 줄 것을 요청했다. 레자노프 중위의 보고를 받은 연해주 군무지사 카자케비치는 한인들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1864년 5월 레자노프 중위에게 홍후즈의 공격으로부터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초소를 지신허 마을 주변에 배치하고, 한인들의 정착을 지원하라고 명령했던 것이다. 레자노프 중위가 이 명령서를 접수한 것은 1864년 가을의 일이었는데, 이 무렵 지신허강 분지에는 60명 정도의 한인들이 새로 지은 집과 채소밭, 농토를 갖고 가축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카자케비치 군무지사에게 보낸 레자노프 중위의 두 번째 보고서는 1864년 9월 21일[서력 10월 4일] 작성된 것인데, 지신허 마을의 한인들에 대해 한층 자세하고 공식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에서 레자노프는 지신허에 정착한 한인들이 열심히 농사를 짓고 있으며 이들이 생산한 메밀을 우선적으로 국고로 구입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원했다. 또 연자매 맷돌을 설치해 주고, 중국인으로부터 빌린 종자와 양식 비용을 갚기 위한 보조금 200루블을 대여해 줄 것도 요청했다. 이주 2년 후인 1865년 연해주 군무지사는 지신허강 분지에 형성된 최초 한인 마을의 공식 명칭을 노보고로드 초소 대장인 레자노프의 이름을 따서 레자노보(Резаново)라 했다.

한인 기록 속의 지신허

그렇다면 재러 한인들의 기록은 어떨까. 현재까지 확인된 최초의 기록은 초기 재러 한인 사회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자 부호였던 최봉준(崔鳳俊)[1862~1918]이 『해조신문(海朝新聞)』을 창간하면서 쓴 발간사이다. 이 ‘발간하는 말’에서 최봉준은 “서력 일천팔백육십삼년은 곧 음력 갑자지년(甲子之年)이라. 우리 동포 십여 가구가 처음으로 이 아국(俄國)지방 지신허에 건너와서 황무지지(荒蕪之地)를 개척하고 연(連)하야 살음(살게 됨)에 해마다 몇십 호씩 늘어가니…”라고 썼다. 최봉준은 함경북도 경흥 출신으로 1869년 8세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따라 지신허로 이주한 후 자수성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이 점에서 이 ‘발간하는 말’은 지신허 이주민이 쓴 지신허에 관한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한 가지 오류가 발견된다. 최봉준지신허 이주의 시기를 ‘1863년’으로 정확히 기록하고는 있으나 ‘갑자년(甲子年)’, 즉 1864년으로 잘못 계산했던 것이다. 문제는 당시 한인들이 음력에 익숙해 있었고, 또 지신허 출신이자 한인 사회의 유력 인사였던 최봉준이 ‘갑자년’으로 알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 정확성 여부에 관계없이 당시 한인들이 최초의 이주 시기를 ‘갑자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두 번째로 소개할 기록은 러시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계봉우(桂奉瑀)[1880~1959]가 1920년 『독립신문』에 12회에 걸쳐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연재한 「아령실기(俄領實記)」다. 계봉우는 1914년 러시아 한인들이 추진하였던 ‘한인노령이민 5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계획한 러시아 한인 이주민사, 즉 ‘강동쉰해’ 간행을 위한 자료 수집과 편집을 책임졌던 인물이다. 계봉우는 1919년 말 북간도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대표로 대한민국임시의정원 의원으로 상해에 파견됐는데, 이광수(李光洙)의 부탁으로 기고한 「아령실기」에 러시아 한인들의 역사를 이주사, 풍속, 노동, 사회, 교육, 독립운동으로 나누어 소개하였다.

계봉우는 “사천백구십칠년 갑자춘(甲子春)에 무산 최운보, 경흥 양응범 2인이 가만히 두만강을 건너 훈춘(琿春)을 경유하야 지신허(地新墟)[차(此)는 연추(煙秋) 등지]에 래주(來住)하야 신개간(新開墾)에 착수하니.”라고 기술하고 있다. 다른 기록들과 달리 최초의 이주 한인으로 최운보, 양응범 2인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되나, 가구 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 계봉우 역시 이주 시기를 ‘갑자춘(甲子春)’, 즉 1864년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앞서 언급한 최봉준의 예와 같이 당시 노령의 한인들이 한인의 최초 이주 시기를 ‘1864년’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초기 지신허의 모습

초기 지신허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앞에서 언급한 프르제발스키는 1868년 지신허 마을을 방문하고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

“가장 광활하고 오래된 한인 마을 지신허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 마을은 노보고로드 항구로부터 18베르스타[약 19㎞] 떨어져 있는, 비옥하고 경치가 좋은 분지에 위치하고 있다. 만(灣)으로부터 시작해 내륙으로 뻗어 있는 산들이 이곳 분지에 이르러서는 마치 두 개의 병풍을 두른 듯한 지형을 이룬다. 분지의 길이는 15베르스타[약 16㎞]이며, 폭은 1~1.5베르스타[1~1.6㎞]이다. 활 모양으로 구불구불하게 굽이치며 빠르게 흘러가는 지신허강은 분지 한가운데를 가로지르고 있는데, 양쪽을 거의 같은 크기로 갈라놓아 농사에 편리하고 비옥한 농토를 만들어 놓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산들은 비탈이 꽤 가파르고 견고한 덤불, 울창한 잡초들과 여러 개의 좁은 길들이 있어 결코 평탄치 않은 형세를 갖추고 있다. 그 뒤로 높은 산봉우리들이 무리를 지어 에워싼 형세가 아름다움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10베르스타[약 11㎞]에 걸쳐 길게 늘어져 있는 지신허 마을의 집들은 100보 내지 300보씩 떨어져 있다. 한인들의 집은 흙벽과 문종이를 발라 막은 창문, 난로[아궁이]와 판자 침상, 초가지붕 등 외형으로나 내부 구조로나 중국인의 집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중략)

집과 집 사이에는 한인들이 공들여 가꾼 마당이 있다. 들판에서의 농사는 암소와 황소를 부려서 하지만 조잡한 형태의 쟁기를 사용한다. 농작물로는 수수를 가장 많이 파종한다. 이는 자신들의 식량일 뿐 아니라 중국인들에게 팔기도 한다. 주식으로 콩, 강낭콩, 보리를 파종하고, 양은 적지만 옥수수, 감자, 메밀, 대마, 담배를 심으며 야채밭에는 오이, 호박, 무, 상치, 고추 등을 심는다.”

한인들이 남긴 기록도 있다. 1882년 조선 정부에서 파견되어 지신허 마을을 찾았던 김광훈(金光薰)과 신선욱(申先郁)은 『강좌여지기(江左輿地記)』에서 마을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큰 산이 솟아 있는 아래에 한 마을이 있는데 마을 이름은 지신허(地信墟)이다. 남북으로 수십 리이고 동서로 사오 리인데 집들이 즐비하다. 그 가운데 양인 초소가 있고 서학서숙(西學書塾)이 있는데, 가르치는 사람이 서양인이고 우리 아이들이 수업을 받고 있다. 이들은 서양 말과 서양 글을 할 줄 알았다.”

김광훈과 신선욱은 지신허가 “동서 5리, 남북 30리”라고 적었다. 당시 지신허 마을은 남북으로 11~12㎞ 늘어선 큰 마을이었으며, 이미 크게 상지신허[Берхне Тизинхе], 중지신허[Среднее Тизинхе], 하지신허[Низнихе Тизинхе]의 3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초기 지신허 마을의 변천

지신허 마을의 주민 수는 국경 지대인 육진 지방 농민들이 대거 월경해 넘어오면서 빠르게 늘어났다. 1863년 최초의 이주민 13가구에서 1864년 가을에는 30가구 140명으로, 1865년에는 65가구 343명으로, 그리고 1866년에는 100여 가구로 크게 증가하였다. 1867년에는 500명이 지신허로 이주하였고, 1868년에는 900명이 국경을 넘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지신허로부터 서쪽으로 14㎞ 가량 떨어져 있는 연추강(煙秋河)[현재의 추카노프카강(Ркчка Чукановка)] 연변의 연추(煙秋)[Янчихе] 마을로 이주하였다. 지신허에 이어 연추 마을이 새로운 정착지로 알려지면서 1867년 조선으로부터 150가구가 이주했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연추 마을에 남고 나머지는 1868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는데, 이들은 다시 수이푼강[현재의 라즈돌리노예강]으로 보내졌다. 그 결과 1869년에 수이푼 강가에 푸칠로브카 마을이 형성됐다. 이곳은 이후 추풍 지방 한인 마을들의 연원이 되었다.

1869년 육진 지방에 몰아친 대흉년은 이전까지의 간헐적인 이주와는 달리 폭발적인 규모의 대이동을 가져왔다. 러시아 자료에 기록된 1869년 가을과 겨울의 대이주를 살펴보면, 1869년 9월 말~10월 초 1,850명의 농민[남자 1,300명, 여자 550명]이 다양한 루트를 통해 지신허로 이주하였데, 이들은 의복이나 비축한 식량이 없었다. 이어 1869년 11월 말~12월 초에는 훨씬 더 많은 4,500명이 지신허로 몰려들었다.

이른바 기사흉년(己巳凶年)으로 불리는 1869년의 대흉년과 그로 인한 대이주는 후일 두고두고 재러 한인 사회에 이야깃거리가 되었다. 이때 여덟 살의 나이로 부모를 따라 지신허로 이주했던 최봉준은 “1868년[1869년의 잘못] 기사(己巳)에 이르러는 본국 함경도 지방에 흉년이 크게 들거늘 그해 겨울에 기황(饑荒) 들었던 백성 수천 호가 일시에 지신허로 내도하니 기왕에 우거(寓居)하던 몇십 호의 농작한 힘으로는 수천 인구를 구제할 방책이 없는지라, 그런고로 기황을 이기지 못하여 생명을 구제하매 극근득생(極僅得生)한 반분(半分)에 지나지 못하였다.”라고 회상하고 있다.

계봉우 역시 「아령실기」에서 기사흉년과 그로 인한 대이주를 매우 드라마틱하게 묘사했다.

“1869년의 흉년은 음력 7월에 내린 장매(長霾)[강풍에 따른 흑비]로 인한 것이었는데, 이때 육진 지방은 한줌의 벼도 거둘 것이 없는 공전(空前)의 대흉년이었다. 이에 더해 얼마 전 웅기만에 미국 상선이 표착(漂着)하였는데 적재되어 있던 물화를 마음대로 나누어 가진 사건을 조사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에 영문(營門) 장교가 사실 조사하러 온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두려워한 경흥 읍민 96가구가 음력 11월 일시에 두만강을 건너 지신허로 몰려들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들이닥친 이들을 맞은 지신허 마을에는 거처할 집도 식량도 없어 이주민들은 굶주림과 추위의 아비규환 상태에 빠지게 됐다.”

지신허 마을은 이렇게 물밀듯이 몰려드는 이주민을 소화할 수 없었다. 러시아 당국 역시 예기치 못한 사태였다. 결국 이주민들을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켜 정착케 하는 것이 최선의 대책이었다. 1869년에는 지신허를 개척했던 최운보지신허 빈민 35가구를 이끌고 추풍(秋豊)[수이푼]으로 이주하였고, 1870년에도 역시 지신허 마을 빈민 60가구가 러시아 관리의 지도를 받아 추풍으로 옮겼다. 러시아 정부는 1871년 여름 지신허 마을 70여 가구 315명을 포함한 연추 등지의 빈민 500명 가량을 아무르주[흑룡주]의 아무르강 지류 사마라 강가의 블라고슬로벤노예(Благословенное) 마을로 이주시켰다. 블라고슬로벤노예는 러시아 당국이 한인들의 러시아화를 목표로 정책적으로 조성한 최초이자 유일한 모범 마을이었다.

지신허 마을의 현재

지신허 마을은 1937년 재러 한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면서 ‘우로치쉐 비노그라드노예(Урочище Виноградное)’라고 불리는 콜호즈로 바뀌었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에는 러시아 농민의 목장으로 이용되었다. 2004년에는 한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여 한국 가수 서태지의 기부로 ‘지신허 마을 옛터’ 기념비가 건립되었다.

지신허 마을은 러시아 최초의 재러 한인 마을로서 이후 초기 이주민들의 대부분이 거쳐갔다는 점에서 러시아 연해주를 비롯한 러시아 극동 지역 각지에 형성하게 되는 재러 한인 마을들의 시원지라고 할 수 있다. 당초 지신허 마을로 이주했던 이주민들이 남부 우수리 지역 각지의 한인 마을들을 개척함으로써 수많은 재러 한인 마을들이 형성될 수 있었다.

참고문헌
  • 『강북일기·강좌여지기·아국여지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 박 보리스 드미트리예비치·부가이 니콜라이, 『러시아에서의 140년간-재러 한인 이주사』(김광환·이백용 옮김, 시대정신, 2004)
  • 반병률, 「러시아 최초의 한인 마을 지신허」(『한국근현대사연구』26, 한국근현대사학회, 2003)
  • 계봉우, 「아령실기」(『독립신문』, 1920. 2. 20~1920.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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