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岩本志願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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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岩本志願兵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905년 10월 1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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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몰년 시기/일시 | 1997년 |
편찬|간행 시기/일시 | 1944년 1월 |
원어 항목명 | 岩本志願兵 |
성격 | 소설 |
작가 | 장혁주(張赫宙) |
1944년 발표한 재일 한인 1세대 작가군을 대표하는 장혁주의 소설
『이와모토 지원병[岩本志願兵]』은 장혁주가 일본의 전시 체제에 협력하여 출간한 작품으로 일본의 국책을 옹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44년 1월 흥아문화출판(興亜文化出版)에서 출간되었다. 장혁주[1905~1997]는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장은중(張恩重)이다. 경주 계림보통학교와 간역농업학교 재학 중 역사와 일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스무 살 무렵에는 아나키스트 단체에 가입한다. 사립보통학교 교원, 공립보통학교 촉탁 교원으로 재직하다가 교원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1년간 보통학교 교원을 지내기도 하였다. 1932년 4월 잡지 『개조(改造)』의 헌상 소설에 식민지하의 농민의 고난과 분노를 그린 「아귀도(餓鬼道)」가 입선하였고 야스타카 도쿠조[保高徳蔵]의 『문예수도(文芸首都)』 동인이 된다. 1934년 개조사(改造社)에서 소설집 『권이라는 남자[権という男]』를 출판한다. 이 무렵 한글로도 소설을 써서 『동아일보』에 발표하였으며 일본 여성인 노구치 하나코[野口はな子]와 결혼한다. 1938년 장혁주 각본의 「춘향전(春香伝)」이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의 신협극단에 의해 일본과 조선에서 순회공연 된다. 1939년 대륙개척문예간화회(大陸開拓文芸懇話会)에 참가하는 등 서서히 일본의 전시 체제에 협력하는 활동을 하였다. 1943년에는 황도조선연구위원회(皇道朝鮮研究委員会)의 위원이 된다. 1944년 일본의 정책을 옹호하는 소설집 『이와모토 지원병[岩本志願兵]』을 출판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인 아내와 함께 해방을 맞이한 장혁주는 1952년 일본에 귀화하여 노구치 미노루[野口稔]라는 이름을 얻는다. 1952년 출판된 『오호조선(嗚呼朝鮮)』이 장혁주라는 필명을 쓴 마지막 작품으로, 그 다음에 집필한 『무궁화(無窮花)』는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라는 일본 필명으로 출판된다. 이후 역사 소설과 미스터리 등 다채로운 영역의 작품을 남겼다. 만년에는 미국과 중동으로 취재 여행을 하여 영문 소설을 발표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하였다.
『이와모토 지원병』은 장혁주가 일본 내에서 발표한 작품으로, 우리나라에서는 1943년 9월 7일부터 9월 22일까지 조선 총독부 계열의 일간지인 『매일신보(毎日新報)』에 연재되었다. 장혁주는 『이와모토 지원병』을 집필하기 전 1943년 4월 초순에 서울[경성]의 지원병 훈련소에 3일간 특별 입소하였다. 당시 실제로 훈련의 일부를 체험하고 내지 출신의 재일 조선인 훈련생으로부터 이야기도 들은 것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이와모토 지원병』은 장혁주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조선에 징병제가 실시된 것은 비할 바 없는 큰 감격이고 황민화 완성의 기운이 징병제 실시로 더욱 고조된다는 것을 기리기 위해 일제의 지원으로 출판되었다.
『이와모토 지원병』의 내용은 장혁주의 분신인 ‘내’가 경성의 지원병 훈련소에 체험 입소하였을 때 당시 교관으로부터 들은 내지 출신 이와모토[岩本]라는 조선인 청년의 이야기이다. 일본 도쿄[東京]에서 자란 조선인 이와모토가 처음에는 조선인은 황군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을 느끼고 내선일체를 의심한다. 하지만 신사를 참배한 것을 계기로 일본의 국책에 부응하는 우수한 훈련병으로 변모한다는 내용이다. 징병제 시행이 황민화를 촉진시키는 가장 좋은 길이며 하루빨리 조선인들이 황민화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장혁주 작가 자신이 훈련소에 입소하여 체험한 내용을 근거로, 조선 청년들의 황민화와 전쟁 협력을 의식화하고자 하는 프로파간다성이 짙은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