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무라 문학』

원어 항목명 大村文学
분야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일본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제작|간행처 일본 나가사키현 오무라시 마쓰나미시 오무라 수용소
원어 항목명 大村文学
성격 문학잡지
관련 인물 안영이(安榮二)
발행인 아사다 이시지[浅田石二]
정의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강제 송환 대상 재일 한인을 수용하는 오무라 수용소에서 수용자들이 펴낸 문학 잡지.

창간 경위

1950년 12월 나가사키[長崎]현 구 해군 항공 공창지(工廠地)에 세워진 오무라 수용소[현재 오무라 입국 관리센터]는 밀항자, 외국인 등록증 비소지자, 민족 운동 및 정치 운동을 포함한 각종 사건을 통해 체포된 한인을 한국으로 강제 송환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세워진 시설이었다. 개소 후 1970년 9월까지 집계된 수용자는 조선, 중국, 미국, 오키나와 출신자를 더해 총 22,663명이었다. 그중 재일 한인이 21,985명으로 수용자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오무라 조선 문학회’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산하의 재일조선인문학회의 회원 단체로 1956년경 오무라 수용소 내 북한 지지자들의 모임인 ‘태산요계하자치회(泰山寮階下自治会)’가 오무라 조선 문학회를 조직하였다. 『오무라 문학』의 집필자들은 편집자이자 발행인인 안영이처럼 6·25 전쟁 때 사망하거나, 일본에서 민족 교육 투쟁으로 체포되거나 외국인 등록법 위반으로 수용되는 등 여러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발행에는 도쿄 남문 문학 집단의 아사다 이시지[浅田石二]가 중심이 되는 등 일본인도 참여하였다. 아사다 이시지는 「원폭을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노래의 작사가로 유명하다. 『오무라 문학』 잡지 발행 계획 당시에 야마구치[山口]현 이와쿠니[岩国]의 조선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시인 김윤호(金允浩)가 편집과 인쇄 알선을 담당하였다. 김윤호는 이름도 성별도 알지 못하는 오무라 수용소의 ‘동지’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발행을 준비하였다. ‘당국의 부당한 탄압’에 의해 발행이 중지될 위기에 있다는 연락을 받고, 1957년 1월에 해당 내용을 재일조선인문학회 기관지에 실었다. 그로부터 반 년 후에 김윤호에게 『오무라 문학』 창간호가 도착하였다고 한다.

형태

『오무라 문학』의 총 쪽수는 72쪽이다.

구성/내용

『오무라 문학』은 기획 당시 한글로 발간할 예정이었으나 일본어로 발간되었다. 조국을 그리워하는 박창대의 시 「조국의 하늘-조국이 우리를 부르고 있다」와 일본 정부의 폭력성에 대한 아사다 이시지의 수필 「일본 정부의 폭력에 분노를 느끼다」와 안영이가 쓴 소설 「피투성이의 편지」 등이 수록되어 있다. 처음에는 한글 발행을 계획하였으나 일본 당국의 압력을 받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잡지를 보면 일본이 아닌 조선에서 자란 사람들이 쓴 작품에는 일본어지만 한국어 직역 투의 일본어 표현이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집필자들이 수용소 내에서 한국어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한 것으로 보인다.

변천과 현황

오무라 수용소 밖에서 잡지 편집과 인쇄 알선을 도왔던 김윤호에 따르면 『오무라 문학』 제2호 이후 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수용자들은 평양의 ‘조선 작가동맹’과 편지 등을 통해 직접 연락을 취하고 있었는데, 조선 작가동맹은 1958년 초에 한국 강제 송환 반대와 재일 한인 ‘귀국’ 캠페인을 기관지인 『문학신문』에 싣기도 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58년 6월 26일 북한 송환 희망자들 사이에서 단식 투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 26명이 가석방되었다. 하지만 이후 일본 정부의 무대책과 가석방자가 다시 체포되거나 수용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오무라 조선문학회’ 또한 소멸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오무라 수용소에서 북한으로 송환된 사람은 1970년까지 219명[그중 여성이 35명]으로 안영이를 포함한 오무라 문학회 회원도 송환되었다는 것을 여러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오무라 문학』은 아직 해명되지 않은 부분이 많은 수용자들의 일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 『在日朝鮮人文学資料集: 一九五四~七〇』(緑蔭書房,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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