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曠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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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曠野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창간 시기/일시 | 1964년 9월 23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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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어 항목명 | 曠野 |
관련 인물 | 성화(聖化)|임방사(林芳史)|강정기(姜禎基) |
1964년 9월 23일 간토와 간사이 지방권 대학에 재학 중인 재일 한인 2세 대학생과 대학원생이 모여 만든 잡지.
『광야』는 조국을 우러러보는 아버지 세대[재일 한인 1세]와 달리 재일 한인 2세들이 젊은 자신들이 새로운 가치관을 만들어 보자는 의욕적인 시도로 창간되었다. 간행 당시 뜻을 함께한 사람은 20명이며 이중 4~5명 정도가 여성이었다. 편집 책임은 성화(聖化), 임방사(林芳史), 강정기(姜禎基)가 맡았다. 강정기는 1939년 출생으로 한국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다 일본으로 건너가 이후 영국 연극 연구자로 유명하다. 발행인은 광야동인회(曠野同人會), 발행소는 재일 한국인 학생·청년 문학 예술 애호 구락부(在日韓国人学生·青年文学芸術愛好家具楽部)이다.
『광야』 창간호의 총 쪽수는 90쪽이다.
『광야』 창간호에 강정기가 쓴 「광야를 시작하면서[曠野に下って]」에는 재일 한인으로서 일본 문학은 자신들의 문학이 아니며, 언어 문제와 같은 제약으로 한국 문학 또한 제대로 음미할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토로를 볼 수 있는데, 이러한 인식이 광야를 발행한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960년대는 일본에 있는 몇몇 대학을 거점으로 재일한국학생동맹 계열의 한국 문화 연구회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계열인 조선 문화 연구회 등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또한 1965년에는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되기도 하였다. 『광야』에 수록된 작품에서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당시 재일 한인 2세의 사고와 민족의식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엿볼 수 있다.
『광야』의 창간은 호세이[法政] 대학 조선 문화 연구회의 『학지광(学之光)』[1957]과 게이오기주쿠[慶応義塾] 대학 코리안 학생 클럽의 『직하(稷下)』[1962] 등 각 대학을 넘나드는 재일 한인 2세 문학 활동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