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련히로시마시보』

원어 항목명 朝連広島時報
분야 문화·교육/언론·출판
유형 문헌/연속 간행물
지역 일본 히로시마현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창간 시기/일시 1949년 2월 1일
소장처 일본 도쿄도 지요다구 나가타정 1-10-1
제작|간행처 일본 히로시마현
원어 항목명 朝連広島時報
관련 인물 서채원|김민|김삼보|손정희|한춘식|김영철|박영세|황덕수
창간인 정인규
발행인 정인규
총호수 1~6호[3~4호는 발견되지 않음]
정의

1949년 2월 창간된 재일본조선인연맹 히로시마현 본부의 기관지.

개설

『조련히로시마시보[朝聯廣島時報]』는 1949년 2월 1일 창간된 재일본조선인연맹(在日本朝鮮人聯盟)[조련] 히로시마현 본부[広島県本部]의 기관지로, 순간(旬刊) 형태로 열흘에 한 번 간행된 신문이다. 발행처는 재일본조선인연맹 히로시마현 본부 편집국이며, 편집 겸 발행인은 정인규이다. 간행 당시 편집장은 정인규, 정치부에는 서채원, 김민, 김삼보, 사회부에는 손정희, 한춘식, 김영철, 문화부에는 박영세, 황덕수가 있었다. 현재 남아 있는 것은 1~2호와 5~6호이다. 2호는 1949년 2월 10일, 5호는 3월 10일, 6호는 3월 31일, 호외(號外)는 1949년 2월 12일에 각각 간행되었다.

창간 경위

『조련히로시마시보』 창간호에 실린 재일본조선인연맹 히로시마현 본부 위원장 박윤암의 「창간의 사(辭)」에 따르면, 해방 당시의 상황과 의의를 정리한 후 “해방신문과 조련중앙시보민청시보의 여러 사람의 활동은 그 의미에서 다대한 공헌을 해 오고 있다.”면서 정확한 정세와 여론을 적어도 다수의 동포들에게 호소하고 조직의 단결을 목표로 신문을 간행한다고 밝히고 있다.

형태

『조련히로시마시보』는 신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순간을 원칙으로 간행되었다.

구성/내용

『조련히로시마시보』 창간호의 주요 기사로 「대중의 압력에 의해 하부 권력 기관 동요한다」, 「경찰관의 야만적 폭행」, 「주장 : 지방 권력의 부패와 파쇼화를 허락지 말자」 등 재일 한인 관련 기사와 지역 노동조합 관련 기사인 「민족전선을 즉시 결성하자」 등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공산당의 경이적 진출과 민주 혁명 – 선거를 회고하면서」, 「조련 히로시마회관 건설에 대하여」, 「당면의 민청 활동」, 「조선 여성의 해방」 등이다. 당시 재일본조선인연맹 히로시마현 본부에서는 회관 건립과 민청 고등학원 개교 등에 주력하였음을 알 수 있으며, 본부 편집부에서 지역의 조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작문, 감상, 시 등을 공모하였음도 알 수 있다. 『조련히로시마시보』2호[1949. 2. 10]의 주요 기사로는 「주장 : 인민공화국으로 직결하는 길」, 「파쇼의 대두를 허락하지 말자 : 조련 현본부 상임위원회 성명서 발표대중의 압력에 의해 하부 권력 기관 동요한다」, 「통렬한 자기비판 아래 새로운 체제를 결속한다」, 「새로운 체제 확립 아래 민청대학 설립을 결의하며」 등 재일본조선인연맹 히로시마현 본부와 재일본조선인연맹 중앙의 움직임과 관련된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아울러 재일본조선인연맹 히로시마회관 건립 기금 납부 일람표와 기관지 배포 상황도 지역별로 소개하고 있다. 또한 김일성(金日成)의 연두교시를 인용하며 통일의 길을 피력하는 「북선군(北鮮軍) 침입에 대하여」 등도 눈에 띈다. 한편 1949년 2월 12일 발행된 일본 내 외자(外資) 도입과 관련한 특집 호외에서는, 이로 인해 중소 상공업자 등 히로시마 지역 재일 한인의 생활이 급격히 변화될 것을 피력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경제 9원칙’의 올바른 운영 정신에 위배되며, 특히 일반 외국인과 재일 한인을 동일하게 취급하는 것에 절대 반대한다는 입장을 주장하였다.

변천과 현황

『조련히로시마시보』1, 2호와 호외, 5, 6호는 일본국회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름 형태로 소장되어 있다.

참고문헌
  • 『현대 언론 매체 사전: 1950~1969』(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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