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大韓興学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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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大韓興學報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일본 |
시대 | 근대/개항기 |
창간 시기/일시 | 1909년 3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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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간|종간 시기/일시 | 1910년 5월 |
원어 항목명 | 大韓興学報 |
관련 인물 | 조용은 |
발행인 | 고원훈 |
1909년 3월 창간된 재일 한인 유학생의 애국 계몽 통합 단체인 대한흥학회의 월간 기관지.
『대한흥학보』는 유학생 상호 간의 친목 도모 및 학식 교환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크게는 조국 문화의 창달과 국내 동포의 민지를 개도하기 위해 지덕 계발, 즉 국민의 실력을 양성하려는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조선 강점 직전인 1910년 5월 폐간되었다.
『대한흥학보』 제1호부터 제6호까지는 연단(演壇), 학해(學海), 사전(史傳), 문원(文苑), 사조(詞藻), 잡찬(雜纂), 휘보(彙報), 회록(會錄) 등으로 구성되었으나 제7호부터는 논자(論者), 학예(學藝), 전기(傳記), 문원, 시보(時報), 부록(附錄)으로 구성을 변경하였다. 가장 비중이 높은 것은 연단, 학예, 잡찬이었다. 『대한흥학보』에 게재된 주된 내용은 사회 계몽에 관계되는 것과 자연 과학을 중심으로 한 학문과 관련된 내용, 유학생들의 소식 등이다. 특히 구호를 나열하기보다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 것이 『대한흥학보』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대한흥학보』는 창간호 발행 이래 1910년 5월 폐간될 때까지 방학을 제외하고 매월 발행되었다. 창간호의 발행 부수가 2,000부였으나 증간 요구가 있었으므로 2,000~2,500부 정도 발간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09년 9월 말 『대한흥학보』의 구독자 수는 경기도 59명, 전라도 39명, 강원도 88명, 함경도 120명, 충청도 15명, 경상도 28명, 황해도 60명, 평안도 178명으로 모두 508명으로서 평안도와 함경도의 구독자 수가 과반을 차지하였다. 구독자의 과반이 평안도와 함경도에 있는 것은 대한흥학회의 지부가 해당 지역에 설치되었기 때문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국내의 각 학교와 지식인에게 무료로 발송하는 것이 1,500부 이상이었다. 『대한흥학보』 발간의 자금은 회원들의 회비와 의연금, 국내 인사의 찬성금으로 충당하였으나 제8호와 제10호, 제11호에 부족한 발간 경비를 후원해 달라는 긴급 광고를 게재한 것으로 보아 발간 경비가 크게 부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대한흥학보』의 발행은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어 조선 민족과 민중의 독립 의식과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