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民衆新聞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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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民衆新聞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창간 시기/일시 | 1945년 10월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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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간|종간 시기/일시 | 1950년 8월 2일 |
속간 시기/일시 | 1952년 5월 20일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46년 8월 15일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57년 1월 1일 |
개칭 시기/일시 | 1961년 1월 1일 |
원어 항목명 | 民衆新聞 |
관련 인물 | 김계담(金桂淡)|김천해(金天海)|김두용(金斗鎔) |
발행인 | 김계담(金桂淡) |
1945년 10월 10일 재일 조선인에 의해 최초로 간행된 재일조선인연맹 계열 신문.
1945년에 간행된 『민중신문』은 재일 조선인이 창간한 신문으로 여러 번 이름을 변경하며 1961년 1월 『조선신보(朝鮮新報)』로 이름을 바꾼 이후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민중신문』은 타블로이드판 2페이지 등사판 인쇄로 창간호를 발행하고, 1946년 3월 25일자 제 14호부터 활자판으로 발행되었다.
『민중신문』은 재일 조선인의 계몽을 목적으로 창간되었고, 『민중신문』의 후신인 『해방신문』은 재일 조선인의 계몽, 일조 민중의 상호 이해, 민주주의 건설을 취지로 했다. 두 신문은 조련의 공식 기관지를 직접 표명하진 않았으나 조련 및 일본 공산당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으며, 재일 조선인 좌익 세력의 실질적 기관지였다. 『민중신문』에는 ‘재일본 조선 동포는, 조선인 연맹의 깃발 아래 민족적으로 결속하자’는 내용의 기사나, 조련 간부의 논문 등이 다수 실려 있다. 『해방신문』은 총 발행 부수 5만부 중 약 2만부를 일본 전국의 조련 지부에 무료로 배포하고, 나머지 약 3만부가 유료 구독자용이였다.
1947년 『해방신문』은 소련 군정을 지지하고 좌파 세력에 의한 조선 민주주의 실현을 바람과 동시에, 미군정은 조선의 민주 국가 수립을 방해한다고 비판하는 신문이라고 연합국 총사령부[GHQ]는 분석하여 검열 대상이 되었다.
1946년 8월 15일 해방 1주년을 계기로 오사카의 『대중신문』과 통합하여 『우리신문』으로 제호를 변경하여 2회 발행하였다. 1046년 9월 1일부터 ‘내외의 정세가 언론의 사명을 중대화하고 있으며, 이러한 정세의 요구에 맞추어 신문의 민주주의적 지도성을 확립하기 위해’ 제호를 『해방신문』으로 다시 변경하여 월 6회 발행을 이어 갔다.
6·25 전쟁으로 인해 1950년 8월 2일 휴간한 뒤 1952년 5월 20일에 복간한 뒤 1957년 1월 1일 『조선민보』로 개칭한 후, 1961년 1월 『조선신보(朝鮮新報)』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고 조선 총련의 중앙 기관지로서 현재도 발행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