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芸協 |
---|---|
한자 | 藝協 |
분야 | 문화·교육/언론·출판 |
유형 | 문헌/연속 간행물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창간 시기/일시 | 1946년 6월 |
---|---|
원어 항목명 | 芸協 |
성격 | 잡지 |
관련 인물 | 장비 |
창간인 | 조선예술협회 |
발행인 | 조선예술협회 |
1946년 6월 일본에서 조선예술협회가 발행한 팸플릿 성격의 잡지.
해방 직후 재일 한인의 연극 운동은 일본에 남아 있던 장비(張飛), 박의원(朴義遠), 허남기(許南麒) 등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다. 장비는 김두용(金斗鎔)과 함께 해방 전 조선예술좌(朝鮮芸術座)에서 활동하였으며, 박의원은 신협극단(新協劇団)에서, 허남기는 형상좌(形象座)에서 활동하였다. 1946년 2월 일본에 있는 재일 한인 연극인들을 결합시키는 차원에서 종합 예술 단체인 조선예술협회[예협]가 결성되었고, 장비가 회장을 맡았다. 조선예술협회는 1946년 6월 첫 번째 공연을 계획하였는데, 『예협』은 그 직전에 발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6월 공연에서는 「결실」과 무용극 「쇠사슬은 끊어졌다」가 상연되었다. 6월 공연에 대한 당시의 평가는 『재일조선문화연감 1949년판』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근본적인 결점-연출·연기력의 수준 이하와 여자 배우가 부족한” 탓에 실패하였다고 한다. 공연에 대한 낮은 평가로 인해 계획하고 있던 2회, 3회 공연도 중지되었지만, 재일본조선학생동맹 문화부의 초청으로 김사량의 작품 「봇똘의 군복」을 간다[神田] 공립강당(共立講堂)에서 상연하였다. 조선예술협회는 1947년 3월 재일본조선예술가동맹으로 개칭하였고, 1948년 10월에 해체되었다.
『예협』에 실린 「선언」과 회장인 장비의 글 「예협 창립에 대하여」를 통해 조선예술협회가 “모든 인민이 창조의 주인공으로서 세계적 의미에서 민족 예술을 창조”하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협』에는 「예술을 발전시켜 주시요」[김두용], 「인민의 예술을」[이진규], 「조선의 고대 연극」[홍순창], 「극단 ‘형상좌’ 회상」[허남기], 「조선어 연극에 대해서」·「문맹·예술·교육」[장비], 「창립 공연을 앞두고」[박의원] 등의 글이 실렸고, 일본인 무라야마 도모요시[村山知義], 나카무라 에이지[中村栄二] 등의 글도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