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어 항목명 | 韓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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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韓流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일본 |
시대 | 현대/현대 |
원어 항목명 | 韓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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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한국의 드라마·영화·음악 등 대중 문화 컨텐츠가 인기를 얻으면서 일어난 현상.
한류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 1960~70년대부터 한국 출신의 가수와 배우가 아시아 지역에서 활동하면서 현지에서 인지도를 쌓기는 하였지만 가공되지 않은 한국 대중 문화 컨텐츠가 그대로 수입되어 사회적 현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으므로 한류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 대중 문화 전반에 대한 본격적인 한류 붐은 1990년대 말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가시적으로 경제적 수익을 올리고, 형식과 실질 면에서 한류 붐으로서 자리 잡은 것은 2000년대 이후 일본으로부터 비롯한 것이다. 일본에서의 한류 붐은 2003년 드라마 「겨울연가」[일본 제목 「겨울소나타」]를 빼고 설명하기 어렵다. 「겨울연가」 이전에 이미 영화 「쉬리」가 크게 인기를 끌었지만, 「겨울연가」는 일본의 중장년층 여성을 중심으로 전 연령층에게 폭넓은 인기를 얻어 ‘한류 열풍’이라는 사회적 신드롬을 형성하였다. 드라마의 주인공 배용준은 ‘욘사마’, 최지우는 ‘지우히메’라는 애칭을 얻으며 일본 전국에서 사랑받았다. 특히 배용준이 일본을 방문하자 공항에는 팬들이 쇄도하였고, 일본에서의 일거수 일투족이 각종 방송 프로그램에 주요 소식으로 등장하였다. 일본의 유명 인사들은 욘사마와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배용준의 안경과 패션은 유행 상품이 되었고, 드라마의 배경이 된 남이섬을 비롯해 춘천,서울 중앙고등학교 인근은 일본인 관광객 특수를 누리기도 했다. 「겨울연가」의 성공 이후, 유사한 포맷의 한국 드라마들이 속속 일본에 소개되었고, 사극으로 처음 한류 붐을 일으킨 「대장금」과 그 외 사극 드라마는 일본 공영 방송인 NHK에서 정규 편성이 되었다.
한류 붐은 드라마에만 그친 것이 아니었다. 한국의 대형 연예 회사인 SM엔터테인먼트는 당시 10대였던 보아를 데뷔시키면서 철저한 현지화 전략을 펼쳤다. 보아의 성공 이후 동방신기도 유사한 방식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여성그룹 카라는 일본 데뷔를 공식적으로 하기도 전에 큰 지명도를 얻었다. 이는 이미 형성되어 있던 한류 붐 속에서 일본 소비자들이 능동적으로 한류 컨텐츠를 선택한 사례로서 거론된다. 의도하거나 계산된 것이 아니었던 한류가 아시아 시장에서 새로운 문화 현상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자 다양한 분석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미 2000년대 초반에 한류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고 말 것이라는 논의가 시작되었다. 초기 한류 붐 연구자 중의 한 사람인 조한혜정은 “‘한류 열풍’ 현상은 우수한 문화의 저급한 문화로의 전파 현상으로 보기보다는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가적 자본과 미디어의 이동, 그리고 사람의 이동으로 일어나는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초문화화’ 현상의 일부이자 ‘권력 재편’의 고정으로 파악될 현상”이라고 기술했다. 초기 한류가 드라마와 음악에 집중되고 수익 대부분이 이 부문에서 발생한 것에 비해 시간 경과에 따라 한류는 그 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예능 프로그램의 수출, 컴퓨터 게임, 웹툰과 만화, 공연 등 부수적 부문에서도 인지도를 올리면서 아시아 시장을 증심으로 한국 대중 문화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한류는 전통적인 외교 관행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화적 국면에서는 한류 스타를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펼치지만, 갈등 상황에서는 한류를 위시한 대중 문화에 대한 제재 조치 발생이 그런 면모를 보여 주고 있다.
드라마를 통한 한류는 재일 한인 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우선 한국에 대한 인식의 변화에 따라 재일 한인에 대한 이미지도 긍정적 변화를 이끌었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차별과 동화를 통해 일본 사회에서 마이너리티로 인식되었던 재일 한인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 둘째는 경제적 파급이다. 도쿄와 오사카 코리안 타운을 중심으로 한류와 관련된 상품과 한국 음식 등의 판매 호조로 상권이 활성화되었다. 이 외에도 한류의 영향으로 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서 주최하는 ‘우리말 쓰기 결의 대회’를 가진 바 있다. 특히 일제의 피해자이면서도 일본에서 ‘조선인’이란 차별을 받으며 살아야 했던 재일 한인들은 어쩔 수 없이 일본어를 사용해야 했지만, 한류 붐을 타고 모국어에 대한 배움에 많이 동참하고 있다.
또한 민족 금융 기관을 통해 ‘1인 1통장 갖기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으며, 그동안 현지화가 진행되어 온 재일 한인 3세와 4세의 민족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한류는 오히려 일본 우익 세력에 의해 진행되는 혐한류와 헤이트 스피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