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다야마 묘지

원어 항목명 御霊屋墓地
한자 御霊屋墓地
분야 정치·경제·사회/사회·복지
유형 지명/시설
지역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와카마츠구 후카마치 1정목 11  
시대 현대/현대
상세정보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0년 12월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94년
현 소재지 일본 후쿠오카현 기타큐슈시 와카마츠구 후카마치 1정목 11
원어 항목명 御霊屋墓地
원어 주소 日本国福岡県北九州市若松区深町一丁目11番
성격 공공묘지
면적 300㎡
정의

1945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 중 고쿠라 지역에서 조난 당해 희생된 조선인을 추도하기 위해 조성된 묘지.

개설

오다야마 묘지는 1945년 9월 17일 귀환 도중 태풍으로 조난 당한 조선인을 추도하기 위해 기타큐슈시[北九州市] 와카마츠구[若松区] 후카마치[深町]에 있는 시영(市營) 공원묘지 안에 조성되었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어 있다가 1974년에 세상에 알려졌으나 또 다시 오랫동안 방치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다가 1989년 이래 일본 내 7개 시민 단체가 연대하여 기타큐슈시 당국과 협의한 결과 1990년 12월에 추도 위령비가 세워졌으며, 1994년에 일본어와 한글로 된 설명판이 설치되었다.

건립 경위

1945년 9월 17일 재일 조선인의 귀국을 위해 출항한 배가 9월 18일 밤에 초대형 태풍 마쿠라자키[枕崎]를 만나 기타큐슈시 와카마츠구 안세[安瀨] 앞바다에서 조난을 당해 전복되었다. 다음날 아침 고이시[小石], 와카노우라[脇の浦], 와키타[脇田] 인근 해안에는 몸뻬, 작업복 등을 입은 100여 구 이상의 조선인 시신이 밀려 들어왔다. 이들이 어디에서 출항한 사람들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대부분 지쿠호[筑豊] 탄광이나 야와타 제철[八幡製鐵] 등 기타큐슈 지역으로 강제 동원된 재일 조선인과 가족들이었을 것이다. 이들 중 약 80여 구는 고이시 해안에서 가까운 시영(市營) 공원묘지인 오다야마 레이엔[小田山靈園] 동쪽 언덕 약 300㎡의 빈 땅으로 운반되어 매장되었다.

변천

1945년 9월 한반도로 귀국 중 고쿠라[小倉] 지역에서 조난을 당해 희생된 조선인을 추도하기 위해 기타큐슈시 와카마츠구에 조성된 묘지이다. 1974년 봄 일조협회(日朝協會)에서 추진된 ‘규슈 지방 조선인 강제 연행 진상조사단’의 조사 때 인근에 살던 엄정남(嚴正男)의 증언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상황에서 1981년 5월 29일 일본조선우호협회 기타큐슈 지부장 마츠모토 요이치[松本洋一]이 기타큐슈 공원 녹지과에 유골의 수습과 확인, 유족 조사와 공지, 시 주관 하의 안치와 추도비 건설 등에 대해 교섭하였다. 하지만 ‘조선’, ‘강제 연행’ 등 표기 문제를 비롯한 각종 난관에 봉착하였다. 그러다가 8년 뒤인 1989년 ‘젊은이와 강제 연행지를 더듬어가는 순례’와 ‘반전·반핵·반원발을 생각하는 회’의 ‘전쟁의 발자국을 더듬어 본다’는 기획으로 인해 다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들 단체를 비롯하여 ‘민족 차별을 없애는 시민연락회의’, ‘지문 날인 제도를 철폐하는 회(기타큐슈)’, ‘일본 기독교단 기타큐슈 지구 인권 위원회’, ‘갑산 사건 구원회’ 등 7개 시민단체가 1990년 정식으로 와카마츠 구청 건설국에 추모비 건설을 요구하였다. 결국 시 당국과 몇 가지 조정 끝에 그해 1989년 12월에 기타큐슈시 명의로 오다야마 묘지 내에 ‘조선인 조난자 추도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때부터 ‘오다야마 묘지 추도집회 실행 위원회’가 조직되어 매년 일본인과 한국인이 참석한 가운데 추도 집회가 개최되고 있다. 1994년 여름에 일본어와 한글로 된 설명판을 설치하였다. 이때 조난당한 조선인을 추도하기 위해 규슈 조선 고급 학교[九州朝鮮高級学校] 학생들이 민속 무용을 추기도 하였다.

구성

추모 위령비 외에 묘지 주변에는 무궁화가 조성되어 있다. 한국 민족예술인총연합 부산지부에서 솟대를 세워 부산항을 바라보며 영혼을 달래고 있다.

참고문헌
  • 『小田山墓地·朝鮮人遭難の碑』(小田山墓地追悼集會 パンフレット作成委員會, 2014.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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